이런 인연 / 엄옥례
‘사그락 사그락’ 원고 교정지 넘기는 소리만 감돈다.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리는 편집실이다.
“쯧쯧, 이 사람도 이름이 제대로 불리기는 어렵겠군.”
한 편집위원이 혀를 차면서 원고 주인의 이름을 보고 하는 말이다. 뜻밖의 말에 귀가 쫑긋 선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흔히 쓰는 글자가 아니라서 잘못 불리는 경우를 겪다 보니 동병상련의 마음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때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고개를 들고 빙긋이 웃는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눈치다. 원고를 보느라 눈이 아프던 차에 다들 고개를 들어 궁금한 표정을 한꺼번에 보내니 기꺼이 내막을 들려준다. 부군의 이름이 워낙 특이해서 잘못 불리는 경우가 허다한데, 그 이름이 ‘해포’란다. 해포라고 또박또박 일러줘도 사람들이 십중팔구는 ‘해표’로 듣는지라 그때마다 바다 海, 물가 浦 라고 한자까지 동원해서 꼭꼭 짚어주곤 한단다.
까르르하며 합창으로 웃던 중, 같은 이름을 가진 얼굴이 뇌리에 스친다. 혹시 하는 마음에 성까지 물어본다. 기억 속의 사람과 이름도 성도 같다.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으나 왠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을 것 같은 예감에 마음이 급해져서 재차 묻는다.
“혹시, 영천에서 약국 하시는 분인가요?”
“맞아요!”
벌러덩 자빠질 판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채 서로를 쳐다본다. 이런 인연도 있나 싶어 내가 옆 사람의 손을 덥석 잡는다. 옆 사람은 나와 다른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문학동네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시인이다. 두 해 정도 같이 일하면서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면서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곤 했는데,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러니까 그 특이한 이름의 주인공은 내 옆지기가 오래전에 가게를 열었던 건물의 주인이다.
삼십여 년 전이었다. 혼기를 훌쩍 넘긴 나이의 남편과 내가 부부로 살게 되었다. 얼른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앞서 남편은 결혼하자마자 직장에 사표를 내던지고 컴퓨터 가게를 열었다. 컴퓨터 전문회사에 근무했던 기술을 잘 살리면 돈을 많이 벌 거라는 기대로 마음은 시작부터 장밋빛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컴퓨터는 한두 푼 하는 물건이 아니어서 소수의 사람만 사용했다. 시류에 앞서 가게를 연 탓에 사람들은 호기심으로만 드나들 뿐, 구매는 하지 않았다.
벌이는 없는데 임대료 내는 날짜는 득달같이 달려왔다. 남편과 나, 주변 사람들의 돈까지 긁어모아 가게를 차린 바람에 지갑이 텅 비어 있었다. 월세를 내는 날마다 건물 주인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보증금에서 월세를 제하라는 말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주인은 장사가 잘될 때 줘도 되니 염려 말라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는 대로 가격을 깎지도 않고 선뜻 컴퓨터를 사 주었다.
건물 주인은 대구 근교의 소도시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남편보다 두엇 적은 나이에 훤칠한 키, 귀티 나는 얼굴을 가졌다. 한 마디로 이태리 배우 같았다. 늘 혼자서 가게에 들리는지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처럼 갓 결혼한 듯 보였다. 젊은 사람이 동네에 들어가는 길목에 일곱, 여덟 개의 점포가 딸린 건물을 갖고 있었다.
그때 우리 가게는 가뭄에 콩 날만큼만 컴퓨터가 팔려서 근근이 명줄만 잇는 형편이었다. 와중에 컴퓨터 한 대 값을 계약금으로 내고 다섯 대를 가지고 간 사람이 흔적 없이 사라진 일도 벌어졌다. 장사 처음 하는 사람에게 사기꾼이 덤빈 것이다. 주인은 우리 사정을 알고 보증금이 바닥 나도 집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건물 관리 문제로 가끔 들렀지만, 커피믹스 한 잔 마시고는 씽긋 웃어주며 가게 문을 나섰다.
기대감으로 시작한 가게지만 녹록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리면서 기가 꺾였다. 그만 보따리를 싸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건물주인의 배려로 버티는 중이었다. 이윽고 계약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우리가 바라던 따스한 바람이 그때부터 불기 시작했다. 관청과 기업의 전산화를 선두로 바람은 가정까지 파고들었다.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쳤던 사람들도 일찍 시작한 우리 가게를 잊지 않고 찾아주었다. 값싸고 성능 좋은 컴퓨터가 인기를 끌던 때라 남편은 부품을 직접 조립해서 자신이 고안한 상표를 붙여서 팔았다. 입소문을 타고 손님이 늘어나는 바람에 휴일에도 쉴 틈 없는 나날이었다.
건물 주인이 보내준 봄날의 햇살 같은 배려가 철없이 시작한 사업의 애로사항을 견디게 해주었다. 덕분에 궁핍했던 생활도 벗어나게 되었고, 가게의 몸집도 불려 갈 수 있었다.
오래전 일이었지만 지난날을 떠올려보면 건물 주인은 참 따뜻한 사람이다. 그런데 옆에 앉은 사람이 그의 부인이라니, 이런 인연도 있나 싶다. 나는 당시, 글과는 아주 먼 동네에 있었던지라 그의 부인과 이렇게 연결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살았다. 그러고 보면 인연 참, 알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