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탁발托鉢 / 김은주 

 

꽃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다. 새벽잠을 미루고 일어나 산으로 탁발하러 간다. 누가 부르기라도 했나 발걸음이 가볍다. 산천에 찬기가 가시자마자 마음은 떠다니는 구름이 된다.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며 바람이 가자는 대로 산을 오른다. 시켜서 하라 한들 선뜻 할 일인가? 그러나 바람이 길을 열어주는 대로 올라가 보면 그곳에 신기하게도 꽃이 있다. 신명이 꽃을 부르고 부지런함으로 봄을 맞는다.

산 아랫동네를 지나 절 마당을 가로질러 산의 중심으로 든다. 아직은 초록보다 회색이 짙지만 그래도 요맘때가 산을 오르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먹이가 없으니 벌레도 보이지 않고 숲이 우거지지 않아 움직임이 자유롭다. 이렇게 성근 숲 사이로 곳곳에 꽃이 환하다. 모진 겨울을 건너온 꽃을 눈록嫩綠의 숲이 받치고 서 있다.

무시로 산을 오르다 보면 저절로 나만의 지도地圖가 생긴다. 돌복숭아는 산 아래, 생강나무는 한참 위에, 다래나 으름은 계곡 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머릿속에서 자라는 지도는 산에 오지 못하는 겨울 동안 나의 걱정을 먹고 자란다. 혹여 매서운 추위에 얼어 죽지나 않았느니 , 태풍이나 우박은 잘 피했는지, 지도는 부질없는 걱정을 먹이로 삼아 내 곁에 서식한다. 그러다 봄이 오면 통통히 살이 오른 궁금증이 자꾸만 나를 산으로 부른다.

산길을 오르며 머릿속 지도 따라 올봄도 꽃이 무사한지 눈여겨본다. 돌본 적 없고 눈길 한번 준 적 없는데도 산길 모퉁이마다 돌복숭아꽃 저절로 눈부시다. 볕이 잘 든 쪽의 가지는 꽃 무게에 못 이겨 둥글게 휘어졌다. 작년 바로​ 그 자리다. 나무의 키가 더 자랐고 가지의 방향이 조금 달라졌을 뿐 꽃은 그 모습 그대로다. 일 년 만에 만나니 뭉클, 반갑기까지 하다. 모진 추위를 이기고 아무도 모르게 나이테 하나 더한 모습이 씩씩하고 대견하다.

하나씩 꽃을 솎아 가지 사이에 길을 낸다. 꽃을 버린 가지에 진물이 선명하다. 흐드러진 가지에 목탁 염불 한 자락 남기지 않고 꽃을 거저 얻어 오지만 자연은 언제나 무한한 보시布施​를 내게 베푼다. 게으른 일꾼에게 자연이 내미는 마음은 아무런 조건이나 이유가 따로 없다. 그러기에 나 역시 욕심 없는 마음으로 음식에 쓰일 만큼만 꽃을 모시고 온다. 탁발이 어디 일방적인 요구던가? 서로의 마음을 읽고 욕심 없이 주고받을 때 진정한 탁발이 이루어진다.

조심스레 가지를 어루만진다. 얼추 꽃을 따고 보니 빽빽하던 가지에 숨길이 열렸다. 바람이 드나들다 보면 아마 복숭아나무도 더 굵고 튼실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꽃이 담긴 소쿠리를 들고 다시 걷고 오른다. 등에서 촉촉한 땀이 느껴질 때까지 걷다가 보면 누가 일러주지 않았는데도 나 스스로 자연이 된다. 바위를 오르며 바위를 안고 꽃을 따며 가지의 상처를 읽는다.

두 굽이 오르고 나니 산 아랫녘에서 보이지 않던 생강꽃이 골마다 한창이다. 먼저 향기로 나를 이끄는 생강꽃이 봄 숲을 환하게 밝히고 섰다. 생강 역시 그 자리 그대로다. 서로 약속을 주고받은 적 없지만, 따로 약속이나 한 듯​ 화사한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봄 숲에서 침침한 겨울 색을 제일 먼저 밀어내는 것이 생강꽃이다. 화사한 노랑은 사람을 이유 없이 달뜨게 한다.

긴 가지 하나 잡고 꽃을 딴다. 가지가 흔들릴 때마다 어찌나 향이 좋은지 마른 갈잎 위에 서 있는 다리가 사정없이 후들거린다. 잠시 가지에 매달려 꽃을 탐했을 뿐인데 그새 해가 하늘의 반을 지났다. 산속 시간은 산 밖 시간과 전혀 다르다. 잠깐이라 여긴 시간이 한나절일 때가 허다하다. 턱없이 자연에 욕심을 부리다가는 꼴딱 해를 놓칠 수도 있다. 물김치 담글 잔가지와 생강꽃을 적당히 소쿠리에 담고 산에서 내려온다.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머위가 으름덩굴 아래 소복하다. 둥그런 공 모양으로 솟아오른 꽃은 씨방을 가득 품고 있다. 아직은 솜털이 뽀송뽀송한 머위를 나는 눈으로만 즐기며 내려왔다. 다음을 기약해도 될 만큼 아직은 어리기 때문이다.

해거름에 집에 와 마루에 꽃을 쏟아 놓고 받침을 따고 수술을 자른다. 한참 꽃의 모가지를 따고 보니 좋은 곳 가기는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피고 나면 지는 것이 꽃 아니던가? 무심히 사라질 순간을 잠시 우리 곁에 잡아 두는 거라 여기며 얌전해진 꽃을 솥에 넣고 살살 매만진다. ​

잠시 풀이 죽는가 싶더니 화사함도 덩달아 사라진다. 싱싱한 바람 속에서 흔들릴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지만 만지만 만질수록 또 다른 색이 돋아난다. 몸안의 수분을 날리며 서서히 자리 잡는 색은 이전 모습과 확연히 다르다. 생물일 때의 활기는 찾을 수 없지만 가벼워지며 차분해진 모습에 잠시 고요가 깃든다.

덖고 다시 말리며 토닥토닥 잠까지 재우고 나니 이산 저산 다니며 탁발한 꽃이 유리병에 조금 쌓였다. 이 꽃을 언제 어느 곳에 쓸지 나도 알 수 없다. 계절별로 준비한 여러 재료와 은연중에 궁합이 맞는 음식을 만나면 그때 비로소 새로운 인연이 피어날 것이다. 음식과 꽃이 어우러져 생각지도 못했던 기특한 맛이 생긴다면 이것으로 나의 소임은 다한 것이다. ​

생강꽃 몇 송이 유리 다관茶罐에 넣고 더운물을 부어 우린다. 알싸한 향과 함께 돌돌 말렸던 꽃잎이 활짝 풀어지며 기지개를 켠다. 노랗게 우려진 꽃차 한잔 마시고 나니 봄 산을 오르내린 내 몸도 덩달아 낙낙해진다. 봄 개울에 꽃잎 져 내리듯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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