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굴한 굴비 / 공순해

 

 

깊은 바닷속은 깜깜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별천지가 벌어져 있을까? 빛이 투과할 수 없으니 깜깜할 게다, 그러나 깊은 바닷속 사진을 보면, 뜻밖에도 화려한 빛깔로 일렁인다. 붉은 말미잘, 초록 꼬리에 검은 바탕 흰 줄무늬 물고기, 노랑 꼬리에 검정 바탕 청색 줄무늬 물고기, 흔들리는 연초록색 수초들... 노랗거나 주황색인 비늘을 번뜩이는 물고기에 이르면 찬탄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이건 아예 파스텔화(畵)가 아닌가.

들여다보노라니 슬며시 의문이 인다. 인간이 볼 수 없는 심연(深淵)에 어찌 저런 세계가 존재할까? 깊은 산 골짜기, 인적 없는 모퉁이에서 홀로 피고 지는 꽃 같구나, 안타깝다. 그래, 이게 바로 생명이다. 미물조차 생명을, 존재함을 드러내려 그 깊은 심해(深海)일망정 색깔로 치장하고 생을 과시한다. 그리고 그 생(生)이 육지로 연장(?)될 때, 인간에게 유익함을 나눠주기도 한다.

그 중 정말 놀라운 존재는 조기다. 조기가 굴비가 되려 아홉 번 죽는다는 말을 들어 본 적 있는가? 한 번도 아니고 아홉 번이나? 그물에 걸려 죽고, 소금에 절여 죽고, 냉동되어 얼어 죽고, 끈에 졸려 죽고, 건조할 때 말라 죽고, 냉동실에 다시 들어가 죽고, 손질하는 칼 아래 죽고, 불 위에서 익어 죽고 드디어 인간의 입속으로 사라져, 장렬히(?) 전사(戰死)한다. 구사일생(九死一生)에서 일생(一生)도 못 건진 조기, 애도를 표하는 것만으로는 그 비통함을 다 드러낼 수 없다.

한데 조기에는 더 놀라운 반전(反轉)이 있다. 조기가 굴비가 되는 과정에 26명의 인간이 밥줄을 얻는단 사실을 아시는지, 조기 잡는 어부는 물론이고, 말리는 사람 엮는 줄 만드는 사람, 엮는 사람, 등등, 바람, 소금, 사람 손길의 만남이 기온, 습도, 풍속과 섞여 제품이 되는 조기는 굴비로 진화(?)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인간으로 치면 인(仁)을 알고 덕(德)이 높은 종교인쯤에 해당한다 할 수 있겠다.

나아가 이름조차 명상적이다. 굴비! 이 이름을 남긴 사람은 고려조(高麗朝)의 이자겸이라 한다. 그가 도참설(圖讖說)을 믿고 난을 일으켰다가, 인종(仁宗)에 의해 귀양을 간 곳은 영광, 거기서 조기 말린 걸 처음 맛본 그는 임금에게 이것을 진상했단다. 그리고 비록 진상은 하지만, 너무 맛이 좋아 그런 것이지, 자기가 비굴해서 진상하는 것은 아니란 뜻에서 그 이름을 굴비라 명명했단다. 보위를 노렸던 그가 왕에게 진상품을 바치다니, 그러며 굽히는 것은 아니다? 게다 불굴(不屈)도 아니고, 굴비(屈非)? 900여 년 전, 왕보다 더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자신의 곳간을 채우며, 민초(民草)들을 절망에 빠뜨렸던 그가 귀양지에서 쓸쓸히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것 또한 삶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시시포스의 바위 같은 시간은 계속 굴러내려 드디어 2012년, 왜 허덕이며 살아야 하는지 이유도 모르고 지난 한 해를 깡총거렸던 우리는 아마 올해도 또 그렇게 용틀임하듯 한 해를 넘겨야 하리라, 오죽하면 월가점령을 감행했을까, 곳곳에 분노가 먼지 덩어리처럼 굴러다닌다. 점점 더 무거워지고 낡아가는 짐 가방 같은 삶을 껴안은 채 정지 신호판 없는 생의 대로(大路)를 내달린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해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구사(九死)해야만 굴비로 거듭나는 조기라면 이런 경우 어떻게 할까? 죽음을 앞두고 혼란스러운 마음(?) 먼저 다스려내지 않을는지, 그럼, 마음을 다스리고 혼백(魂魄)을 과로시키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물은 파도가 없을 때 거울이 되고, 불은 고요할 때 빛난다는 경구라면 도움이 될까? 이 말은 중국 양나라의 유협이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 마음 가다듬는 방법을 설명할 때 남긴 말이다.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이렇게 냉철한 경지에 도달하긴 어려울 게다. 그러나 조기의 순응(?)을 터득한다면, 그쯤의 경지는 병아리 눈물만큼이나마라도 따라잡게 되지 않을까.

생명의 본질은 존재다. 그러기에 바닷속 미물도 본능에 따라 화려한 색깔로 제 생을 지켜낸다. 외딴 골짜기 눈먼 풀꽃도 꽃을 피워 존재를 드러낸다. 생명은 ‘중단 없는 전진’이다. 그 어려운 시절도 넘겨 왔는데, 뭘!

자~, 올핸 무슨 색(色)으로 생(生)을 칠해, 명(命)을 지켜낼까? 만일 비굴한 생명이 된다면 굴비에게 체면이 안 서겠지? 암, 말이 안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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