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쓰기와 N잡러 / 김현숙

 

이웃 블로그에 링크로 걸어놓은 글이 신선했다. ‘이상한 프로젝트 막 쓰기’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내용이다. 깃발을 든 것은 사십 초반의 여자. 2기라는 걸로 봐서 두 번째인 모양인데, 주어진 루틴(routine)이 제법 흥미롭다.

 

‘기간은 1월 한 달, 일요일을 제외한 6일을 블로그나 브런치에 1일 1포스팅 한 후 카톡방에 링크 걸기, 분량 주제 제한 없음. 노 배려, 어디 가서 못 듣는 꿀팁·정보 제공 없음. 각자 느낌이 오는 대로 블로그나 브런치에 마구 쓰시라. 톡방 대화는 신경 쓰지 마시라.’

 

보증금을 얼마간 내고 임무를 백 프로 수행하면, 정해놓은 환급액에 수행하지 못한 회원의 몫을 n분의 1로 나눠주겠다는 조항도 있다. 나처럼 낯 가리기 심한 사람도 용기를 내게 하는 곳이 온라인 세상이다. 그것도 막 쓰라 하니 못 할 이유가 없다. 선뜻 손을 들었다. 참여 인원은 40명, 대부분 익명으로 삼, 사십 대의 여성이다.

리더는 자칭 ‘N잡러’, 그녀는 프리랜서이고 작가이며, 강사이다. 그 외에도 그녀가 꼽는 직업이 다수다. 말 그대로 직업이 N개여서 ‘N잡러’란다. 거기엔 주부 역할도 포함이다. 그녀가 리더인 프로젝트가 ‘막 쓰기’ 말고도 ‘맵모닝’(아침에 모여 마인드맵 그리기), ‘전콘씨’(전자책이 콘텐츠의 씨앗이 된다의 준말) 등 한둘이 아니다.

들뢰즈를 빌려 말하면 그녀는 한 마디로 노마드다. 즉,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바꾸어 나가며 창조적으로 살고자 하는, 그것을 위해 여러 학문과 지식의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앎을 모색하는 인간형’이다. 노마드인 그녀는 매사 적극적이고 뜻을 두면 실천을 우선으로 한다. 그녀의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새로워진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는 내 젊음이 놓쳐버린 것들이 참 많았구나 싶다. 내 삼십 대는 육아와 밥벌이만으로도 허우적대야 했고, 노마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으니.

그녀가 돈도 안 되는 이 일을 왜? 이유는 글 쓰는 일은 고독하고 힘든 일이며, 자신의 의지는 얇은 종이 두께라 강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 말인즉 더불어 즐기면서 써보자는 게 이유다. 서로 시너지를 내자는 것이다. 더 보탠다면 글쓰기를 좋아하고 많은 일을 시도하는 그녀가 요즘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을 수도 있다.

 

멤버들이 쓴 글은 매일 단톡방에 링크된다. 나는 링크를 따라 그들의 집(블로그)을 기웃거린다. 내 집이 지붕을 덮고 칸막이만 한 초가라면, 그들의 집은 인테리어가 잘 된 신개념 아파트다. 내 글이 두서없는 소소한 생각을 기록했다면 그들의 글은 경제, 사회, 가정, 독서, 영화 등 광범위하다. 유튜브와 팟캐스트에 올리는 자료와 강의를 소개하는 글도 있다. 그들의 글은 미래를 향한 도움닫기이고 나의 글은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를 향하고 있다. 그들이 쓰는 단어는 어렵고 낯설다. 그렇다고 인터넷 검색까지 하면서 읽고 있는 건 또 무언가. 나는 마치 과거에서 온 시간 여행자처럼 그들의 세상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성거린다.

말처럼 막 써도 되려나. 글을 써본 이들은 안다. 막상 쓰기 시작하면 혼자 읽는 글이라도 대충 쓸 수 없다는 걸. 나는 직업도 없고 꼭 써야 할 의무도 없다. 노마드? 창조적 인간? 그것도 이미 마음으론 접었다. 굳이 명분을 세운다면 ‘퇴보하지 않은 인간’이 되고 싶을 뿐이다. 뭔가에 관심을 두어 생각하나 얕고, 쓰는 놀이에 중독은 되었으나 중얼거림에 불과한 이순의 여자. 혹자는 등단했으니 의무는 져야 한다며 글을 쓰라 등을 떠밀고, 잊을만하면 원고청탁서도 날아온다. 대부분 인연으로 오는 것들이다. 선뜻 승낙하는 것도 두렵고 거절을 하려니 체면이 걱정된다. 쓰고 싶지만 자주 머뭇거리는 나에게도 강제는 필요하다.

 

“일단 씁시다. 아무거나 막 쓰셔도 됩니다. 대신 쉬지 말고 꼭 쓰셔요.”

느슨해진다 싶으면 카톡방에 던지는 그녀의 말에, 리모컨을 누르며 소파에서 뒹굴던 내가 슬그머니 컴퓨터 앞에 앉는다. 글은 써지지 않고 생각만 많아진다. 집을 지으려면 설계도와 그에 맞는 재료가 필요한 법. 글을 쓰는 것도 다를 바 없지 않나? 정해놓은 주제에 어울리는 소재들을 모으고, 구성을 고민하는 게 보편적 글쓰기가 아닌가. 그러다 마음을 바꾼다. 무계획이면 어떤가. 빈손으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지은 자연인의 집이 의외로 더 멋질 수 있다. 물론 과정마다 ‘궁리’를 해야 하니 무계획이랄 수도 없다. 그런데 막 쓰다 보니 앞도 뒤도 없는 쪽글이다. 그게 좋은 씨드(씨앗)가 될 수 있단다. 딸 같은 그녀, N잡러가.

링크로 올리는 내 글을 읽는 창조적 인간형, 노마드인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공감을 꾹 눌러주고 댓글을 달아주면서도 이미 흘러가 버린 먼 과거를 바라보는 느낌은 아닐까. 하긴 이런 고민조차 시간이 많은 나니 하는 일이다. 그들은 대부분 N잡러, 하찮은 생각에 시간을 허비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들은 매일 새로운 미래를 위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려 노력해야 하므로.

‘막 쓰기’는 막을 내렸고, 미션은 성공했다. 몇몇이 다시 출발하자는 목소리를 내었으나 리더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종료를 선언했다. 답습은 흥미를 잃게 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 프로젝트로 그들의 일상과 생각을 엿보게 된 건 뜻밖의 수확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맞물려 돌아가는 세상, 세대와 세대 간의 격차는 심해졌고 빠른 걸음으로도 쫓아가도 숨이 차다. 그들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루틴을 지키는 것이 전부였다.

 

며칠 전 또 반짝 새 프로젝트가 떴다. 이름하여 ‘글 모닝 프로젝트’. 이것 역시 N잡러, 그녀가 든 깃발이다.

 

‘진짜 글쓰기를 하고 싶은 간절한 사람들만 오시라. 매일 아침 5시 반에 모여 한 시간 동안 각자 자기 글만 쓰시라. 주제 상관없다. 목표는 스스로 정하되 공유하자. 일체 대화 없이 과묵함 중시.’

 

매일 새벽, ‘N잡러’의 지시에 따라 Zoom을 열고 가상의 세상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같은 시간에 글을 쓴다. 보이지 않은 그녀가 나를 감시하는 느낌, 나쁘지 않다. 나는 주어진 루틴에 자발적으로 비공개 글 10편, 공개 글 10편을 쓰겠다는 항목을 추가했다. 헉, 뒤늦게 과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물 건너갔다. 낑낑거리면서라도 달려 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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