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꽃이 필 때

                                                                                                                                                                    유숙자                                                                                                                             

 그리움이 나를 부른 것 같다. 봄 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리피스 산에 오른 걸 보면-.

집 가까이 있어 아침저녁 걸으며 보게 되는 이 산은 산세가 수려하고 경사가 완만해 등산하기 좋다. 그뿐 아니라 한 시인과 깊은 인연이 있었기에 남다른 감회가 어린다. 정상에 올라 가쁜 숨을 고르느라 기대섰던  소나무는 아직도 우리를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다시 와 보니 신록이 우거져 짙게 푸르고 우리가 즐겨 걷던 길도 유채꽃 물결이 여전하다. 잠시 걸터앉아 쉬던 바위 주변엔 아카시아꽃 무더기가 무성하여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아늑하고, 한가롭고, 평화로운 정경. 둘인 듯 혼자 앉아 상념에 젖는다.

그리움! 울컥 휘몰아치는 감정은 젊은 날의 우정과 다르게 쉽게 표현할 수 없는 혼미함이다. 나무가 뿜어내는 촉촉한 공기, 바람조차 건드리지 않는 정적, 처연한 그리움이 늪처럼 고인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이를 만나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S 시인을 문학 모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인상이 그랬다. 사색적이면서 문학과 예술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 대화가 무궁무진하게 이어졌다. 그의 시는 깊이가 있고 여운을 남겨 감동을 주었다. 분야는 서로 달랐지만, 문학이라는 공통분모가 격의를 좁혀 주었다. 내 수필에 시어가 많다고 시작을 권하는 바람에 잠시 시인들의 모임인 <글빛 동인>에도 참석했다. 시인이 우리 집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음도 잦은 만남을 갖는 데 일조했다

 

이듬해 봄, 산행을 좋아하는 그를 따라 그리피스 산엘 올랐다. 호젓한 산길에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그사이를 헤집고 걸으며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화 지바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유채꽃 물결이 끝없는 출렁이던 넓은 들. 눈 덮인 황량한 벌판. 아스라이 멀어져 가는 라라. 마차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세라 층계를 뛰어올라 가물거리는 물체를 넋을 잃은 듯 바라보던 지바고. 그 잊지 못할 추억의 장면들을 이어가며 영화 같은 숲길 속으로 빠져들었다.

왕복 2시간의 산행, 산 정상 바위에 앉아 적당히 휴식을 취하고 내려오면 Cal’s Jr.가 우리를 반긴다. 따뜻한 커피와 타코 두 개. 꿀맛 같은 점심으로 허기를 달래며 나른함을 즐기기에 알맞은 장소. 여기서도 이야기는 덩굴지며 뻗어나갔다.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시, 소설, 영화 등 끊임없이~.

한 주에 두 번 산행에서, 또는 문학 행사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교우하며 삶의 지표와 취미, 추구하는 목적이 비교적 같아 사이가 더욱 돈독해졌다.

 

세월을 나누며, 문단 생활과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던 삶에 먹구름이 끼었다. 시인이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이따금 대화 속에서 페시미즘이, 우울감이 묻어나긴 했지만 웬만해서는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기에 눈에 들어오는 마음으로만 보았다. 누구에게 한 마디 언질도 없이, 나에게조차 내색하지 않고 홀연히 사라진 그를 허탈이라는 말로밖에 다른 어떤 표현도 가당치 않았다.

이듬해 나의 첫 수필집 출간을 바람결에 들었는지 축하 카드를 메일 해주고 지금까지 소식이 묘연하다. 

 

언젠가 시인 댁을 방문 했을 때 눈을 흘기기만 해도 깨질 것같이 얇은 크리스털 잔에 와인을 따라 주었다.

와인 빛깔이 너무 고와 차마 마실 수 없다고 하자 감상만 즐기자며 잔을 들고 창가로 갔다. 

책과 여인과 와인이 잘 어울리는 창가. 에드가르 드가의 명화에 나오는 인상적인 여인 모습이 슬쩍 스쳤다. 길게 늘어진 커튼이 분위기를 더했고 눈 닿는 곳마다 책이 쌓여 있어 고풍스러운 중세 유럽의 어느 서가가 연상되었다. 그날 문학과 철학, 인식에 관한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테니슨의 ‘이녹 아든’에 빠져 열띤 감상을 나누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고, 계절에서 느끼는 감회가 해마다 다르다.

오늘 오래된 우편물을 정리하다가 예전에 시인이 만든 소식지 <글빛 동인>과 편지글이 얼굴을 내밀었다.

시인을 본 듯 반가웠다.

그리움은 떠남이 없이는 그 심연을 알 수 없는 것 같다. 안타까운 마음에 허허로운 바람만일 뿐. 

그가 칩거에서 벗어나는 날이 오면, 나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 둔 이야기로 울타리를 엮으며 기쁨과 괴로움의 인생 속으로 손잡고 가자 하겠다.   

삶은 무시로 아픈 것. 아프면서 나이 들어가는 것. 그리피스 산은 여전하고 우리가 즐겨 걷던 산길도 눈부시게 푸른 데-. 전설이 주절이 열리는 정상의 바위가 아카시아 향기로 무르익는 데-. 

유채꽃이 필 때면  시인도  어디선가 이 산정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을까. 꽃은 기다림을 키우는 사람의 말 없는 벗, 세월이 그냥 그 자리에 멈추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울한 날일수록 하늘을 본다. 그리피스 산 하늘은 물빛으로 높아만 가고 햇빛이 은총으로 부어지고 있다.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