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허한 자세 / 고유진

 

 

향초를 켰다. 한 시간여 만에 폭우가 쏟아지며 도로는 누런 흙탕물로 출렁였다. 무리하게 지나가다 결국 도로 복판에서 멈춘 차도 있고, 우회하려는 차량들로 뒤범벅이 되기도 하여 집에서 내려다본 아래의 광경은 혼돈으로 절정에 달했다. 우리 아파트는 누전이 되었는지 몇 시간째 정전이다. 처음에는 견딜 만하더니 해가 지고 어둠에 휩싸이자 두려움도 덜컥 엄습해 왔다.

학교에서 겨우 도착한 딸아이는 하필 자가발전용 전기가 잠시 멈췄을 때여서 24층을 걸어 올라왔다. 저녁이라고 하여 한여름 더위가 누그러질 리 없다. 무덥고 습해도 전기가 없으니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밥 해 먹기도 여의치 않아 있는 반찬만 대충 내놓고 희미한 촛불을 의지 삼아 끼니를 때웠다. 도시 속 무인도에 갇혀 시간은 숨이 막힐 듯 무용하게 흘러갔다. 은은한 향기를 풍기며 빛을 내는 향초는 분위기 낼 때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최소한의 빛이고 최대한의 절박함으로 내 속마음이랑 함께 타 들어가고 있었다.

문득 10여 년 전 태풍 ‘매미’ 때가 떠올랐다. 아이들은 이미 잠들었고, 그때만 해도 주말부부로 지내던 시절이라 나 혼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미처 태풍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고 빨래를 돌리다 정전으로 세탁기가 멈춘 지 오래였다. 물에 빠진 빨래가 열리지 않는 세탁기 문 너머로 퉁퉁 불어 있는 듯했다. 거세찬 바람이 베란다 창문을 사정없이 할퀸다. 장대비의 습격을 받은 개미처럼 온 문을 꼭꼭 여미고 채워 속히 지나가기만을 속절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창밖으로 살펴보니 어느 자동차 정비소의 셔터가 종잇장처럼 찢겨져 날아간다. 그리 흔하던 길고양이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고 집들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버티는 듯 보였다. 먼발치 다른 아파트의 새시가 떨어질 듯 힘겹게 매달려 있었다.

다음 날 수많은 피해의 사연들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거대한 해일이 덮쳐 바닷물이 상가로 유입된 마산은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남편의 직장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밤새 불안에 떨며 서로 걱정했던 마음을 쓸어내렸다. 그곳의 주변 상황은 말이 아니라고 하였다. 태풍이 분탕질 해놓고 간 뒷자리는 처참했다. 쌓아놓은 자재 통나무가 밀려들어 건물을 막았다. 세워 둔 차는 몇 km나 떠밀려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병원의 의료기기가 물에 잠겨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짠물에 찌든 내와 쓰레기 악취, 산더미 같은 폐기물로 몸살을 앓으며 도시는 하룻밤 만에 극한의 고통과 슬픔으로 부옇게 뒤덮였다. 철벽으로 담을 켜켜이 쌓아 우리만의 공간으로 온전히 지킬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그 어떤 아성도 완벽한 것은 없었다. 자연재해 앞에선 그저 아슬아슬한 모래성에 지나지 않았다.

가까운 일본의 지진을 보면서도 우리와는 무관한 일로만 여기다 아이가 어릴 때 건물이 흔들릴 정도로 진동을 느낀 경험이 있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엄마들은 절체절명의 순간 모두 얼음처럼 굳었다. 위험한 찰나에 빠르게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만 경험해 보지 못한 일에 신속히 대처하기란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연 위에 군림하며 자연을 장악한 듯 허세를 부려도 이것이 인간의 한계임을 깨닫게 된다.

앞뒤, 좌우밖에 모르는 2차원 영역에 지렁이가 존재한다면, 높이가 더해진 3차원공간을 누리는 인간은 지렁이가 상상하기 힘든 세계의 어떤 존재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이를테면 지렁이를 뛰어 넘는 사람의 흔적은 지렁이 입장에서 보면 연결도 이해도 되지 않는 불가사의일 수가 있다. 인간에게 자연도 그런 것이 아닐까. 자연을 완벽히 알기도 이해하기도 힘들기에 더욱이 완전히 정복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자연 현상을 간과하고 소홀히 여기면 그로 인한 또 다른 폐단에 책임을 져야할 수도 있다. 천재지변이 인재로 이어지는 것을 얼마나 숱하게 보아왔는가. 인간은 많은 것을 이뤄 왔지만 달리 말하면 손실되었을 때엔 아무것도 못 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늘 겸허한 자세로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항상 대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전기가 들어왔다. 먹통이 되었던 일상이 재부팅 되어 환하게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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