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의 좌표
협회 소모임에 참석해 합평하던 어느 날, 나는 선배들에게 글을 읽는 대상이 누구라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지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의 내 글은 대상이 명확하지 않아 혼란스러웠다. 미국 이민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읽는 사람은 한국에 있는 한국인들이라 생각하며 쓴 탓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음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증거였다. 그로 인해 글의 흐름이 어긋나거나 비틀어지고는 했다. 정확히 원하는 방향으로 향하지 않았다. 어색했다. 한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 같다는 생각을 퇴고 때마다 했다.
원인은 문화였다.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른 문화의 이야기라서, 생활권이 달라서,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덧붙여 설명해 줘야 하는 것들이 생기고는 했다. 그것들은 문장의 흐름을 방해하고 글 전체의 흐름도 방해했다. 불필요한 문장이 많다는 선배들의 지적이 계속되었다. 나 역시 수긍했다. 하지만 나는 왜 설명해야 했을까? 독자였다. 내 글을 읽는 대상이 한국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는 국문학을 전공했다는 자존심에 한국어가 있는데 영어를 사용하는 것에 날이 서 있었다. 대체할 한국어가 있으면 영어를 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우리 단어만을 고집하며 1년간 글을 썼다. 깨달음은 가드너에 관한 이야기를 쓰던 중 왔다. 가드너를 정원사로 바꾸니 애초 내 글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달라져 버렸다. ‘가드너’를 고용해서 잔디를 깎은 집과 ‘정원사’를 고용해서 잔디를 깎은 집은 규모부터 달랐다. 글의 정체성이 희미해졌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이 마침내 나를 따라왔다. 왜 선배들의 글 속에 한국어로 번역이 가능함에도 영어단어가 그대로 들어가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디아스포라. 한국을 떠나왔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이곳에 있고 이곳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니 듣는 사람 또한 이곳의 사람일 것이다. 당연한 사실을 참으로 빙 돌아왔다.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글을 시작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막연했던 마음이 사라진 까닭이었다.
수필은 여전히 내게 가르쳐 줄 게 많은 듯하다. 네가 어디에 있는지를 봐. 너의 좌표를 봐. 너의 이야기는 그곳에서 시작되는 거야. 태평양 너머를 보지 말고, 바로 발 앞의 태평양을 먼저 보라고 또 한 번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래야 바르게 나아갈 수 있다고. 순리란 그런 것 아니겠느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