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모음 아라리 / 김경희

 

 

방송국 우리말 겨루기 예심을 보러 갔을 때다. 1차 서류를 통과하고 2차 관문은 필기시험이었다. 맞춤법이나 우리말 뜻, 공통 서술어 쓰는 것은 수월하게 풀어나갔다. 손등 위로 볼펜을 돌리는 여유까지 부렸는데 자음 첫소리만 띄워 주고 문장을 완결시키는 문제에서 막혀버렸다. ‘ㄷㅈ ㅁㅇ ㅈㅈ ㅁㄱㅇ’ 퍼즐 조각 맞추듯 말들을 끌어다가 잇대봤지만 번번이 어긋나 시간을 축내기만 했다. 시간 종료를 알릴 때서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서둘러 써서 냈다.

디지털시대,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로 일상의 부스러기들까지 나눈다. SNS의 그물망엔 언어유희가 활개를 친다. 깜놀(깜짝 놀람), 버카(버스카드), 열폭(열등감 폭발) 언어들이 해독불가 상태다. 한글 자모를 떼어 닭 모이처럼 뿌려놓았다. 헤어진 연인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 자음을 해석해 달라는 호소 글이 족족 올라온다. 자음족보 닷컴까지 등장했다. YS, DJ, MB 전직 대통령들의 영문 이니셜이 통용된 마당에 간결하게 표기하는 것은 문자진화라고 엄지를 세워 흔드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자음퀴즈에 땀벌창이 됐던 나는 외계어가 여전히 낯설고 공허하고 맞갖잖다. ㅂㄱㅍ(배고파), ㅁㅂ(뭘 봐), ㄱㅅㄱㅅ(굽신굽신), ㅎㄷㄷ(후덜덜), ㅃㅇ(빠이) 모음 빠진 문자 메시지가 날아오면 머릿속이 순식간 매지구름장이 된다.

모음이 홀로 소리를 내며 안아주는 씨앗이라면 자음은 애틋이 닿아 안기는 소리 씨앗이다. 모음은 소리가 엉기지 않고 가지런하여 울림이 맑다. 아기들의 옹알이소리로 사늑하다. 모양새는 수평이나 수직으로 단조롭지만 어질고 살가워 어느 언저리에 받침이 비집고 들어가도 내치지 않고 포용한다. 숭굴숭굴하고 틀수하다. 자음은 홀로서지 못해 모음에 의지하여 버둥거리지만 예사소리, 된소리, 거센소리, 콧소리, 흐름소리 너울가지가 다양해 변화무쌍하다. 생동생동하고 붚달다. 첫소리, 끝소리 하나로 의미를 넘나들고 여닫는다. 말에 온기를 지피고 질감을 얹고 색깔을 입힌다.

자모음은 소리를 그린 소리그림이다. 훈민정글이 아니고 훈민정음[音]이 그걸 말해준다. 세종이 곰삭도록 별렀던 것은 소리가 주인이 되는 나랏글을 만드는 것이었으리라.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가 아름다운들 사람의 소리만큼 달뜨게 할 수 있을까. 때리고 비비고 울리는 소리는 감칠맛 난다. 쫄깃하고 후련하다. 깊고 얕고, 미끄럽고 거칠고, 여리고 센 소리의 변화가 없었더라면 맹맹하여 어찌 살아냈을까. 가슴 아래서 철썩거리고 뉘누리치는 감정의 무늬를 굽이굽이 표현할 길이 없어 우우, 바람 소리만 목쉬도록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리랑의 ‘아라리’는 ‘누가 이내 맘 알아주리’로 뜻매김되기도 한다. 자음과 모음의 속내엔 아라리가 절절할 듯싶다. 인터넷 시대, 문명의 구둣발에 짓이겨지고 강간당하고 버림받았다. 칼로 저미는 한, 누르고 삭여도 꼭대기까지 치올라 멱찼으리라. ‘아라리, 아라리요’ 목 놓았을 첩첩한 가슴속 응어리. 입술 감쳐물고 옷고름 섶에서 은장도라도 빼들고 싶었을 게다. 정말 어느 날은 글자 씨앗에 오롯이 눈길을 주고 있으면 물기가 맺혀 글썽해 보인다. 탄식 소리, 앓는 소리가 들린다. 소슬바람에 찔레 가지라도 스친다면 모음에서 흰 피가, 자음에서는 빨강, 파랑, 초록, 보라 피가 방울방울 솟구쳐 공중제비를 돌다가 스러질 것 같다. 사전에 따개비처럼 붙어 시어로 펄럭이기를 갈망하며 목울음을 삼킬 소리 무늬들. 우리 얼인 말글의 살점들이 찢겨 나달나달해져 간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글자의 맥놀이는 얼싸안을 때 펼쳐진다. 음양 조화로 만물이 생겨나듯 자음과 모음이 나붓이 껴안고 살포시 껴안아 수천 송이 낱말들이 탐스럽게 피어난다. 생명력이 솟친다. 모음에서 살 냄새가 난다면 자음에서는 땀 냄새가 난다. 두 씨앗의 응결된 가슴이 열려 숨결이 섞여 세상의 무늬를 그려간다. 하늘하늘 심장이 돋쳐 올라 물살이 되고 바람이 된다. 형형색색의 고무풍선이 날아간다. 둘은 한데 엉겨야 영혼의 새가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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