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이 전하는 소리 / 정서윤

 

 

 

천곡사로 들어가는 고샅길을 대나무그림자가 쓸고 간다. 골짜기의 나무들은 모두 알몸으로 서있다. 득도한 고승이 번뇌를 벗어버리듯 나무들도 몸에 걸치고 있던 옷들을 훌훌 벗어버렸다.

나무들은 남김없이 잎을 버렸는데, 대숲은 청정한 푸른빛으로 겨울바람을 맞고 있다. ‘사운사운 쏴쏴’ 그리운 이의 속삭임이 저러할까. 겨울바람이 대숲을 쓰다듬는 소리다. 대숲에 서면 잃어버렸던 청량한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세월의 때가 더께로 앉은 내 속 뜰을 흔들어 깨운다. 댓잎의 흔들림을 보면, 마음속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소리들을 풀어내는 것 같다.

어린 시절 맑은 영혼 속에 머물던 대숲소리. 그 소리를 떠올리면 그리움이 댓잎처럼 일렁인다. 겨울밤의 따뜻한 아랫목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와 함께 했던 대숲소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 자란 집은, 대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초가였다.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와도 방안처럼 아늑하던 곳이다. 섬돌 위에는 따뜻한 햇살이 온종일 떠나질 않았다. 겨울 한나절을 나는 그 햇살을 동무 삼아 소꿉놀이를 하며 보내곤 했다. 삼복더위에는 댓잎이 요술이라도 부리는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맑은 바람자락이 곧 내 영혼이 머물던 자리요 요람이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유년의 대숲을 어느 날 천곡사에서 만났다. 오래 전에 잃어버린 시간들이 숲 속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삶은 푸른 대나무 같았다. 할아버지를 여의고 청상의 몸으로 외롭고 힘든 삶을 사셨지만, 한 치 어긋남 없이 매사를 잘 다듬어 오신 분이다.

겨울밤이면 우리 집 사랑방에는 밤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새끼를 꼬거나 삼을 삼으면서 소설 같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가 긴 담뱃대를 놋쇠 재떨이에 탕탕 치면서 이야기를 하실 때는 마치 세상 밖에 선 어떤 초월의 기개가 넘치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세상일에 부대껴 힘들 때 대숲을 찾아오면 알 수 없는 어떤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대숲의 바람소리처럼 푸근하게 느껴지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들려 올 것만 같았다. 번뇌의 바람은 대숲이 가져갔는지 청정한 바람소리만이 귓가에 머문다.

대순은 땅을 뚫고 나오기 위해 4년 동안 땅 밑에서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땅 위로 올라와서는 하루에 1미터 이상 자란다고 한다. 한 달 안에 키가 다 자란 대나무는 삶의 행적을 마디로 남겨두고 속을 허공처럼 비운다.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린 기상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올곧음이다. 저토록 꼿꼿하게 서서 속을 비운 것은 그 속에 깨달음의 소리를 담기 위해서일까. 비어있어 울림이 그리도 무한한 걸까.

신라의 태평성대를 누리게 했던 만파식적은 해룡海龍이 신문왕에게 내린 피리라 하였다. 홀연히 바다에 나타난 섬에 두 그루의 대나무가 밤이 되면 하나가 되었다던가. 만 가지의 파란을 잠재워다는 피리소리는 어떤 소리였을까. 그 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인간의 백팔번뇌쯤이야 밀려 왔다 밀려가는 파도보다 더 가벼워질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 소리가 파도에 실려와도 무지한 내 귀는 듣지 못해 번뇌로 끓어오르는지도 모른다.

이견대에서 바다를 바라본 적이 있다. 아주 멀고 먼 알 수 없는 소리가 파도에 실려와 수중왕릉을 둘러싼 바위에 부딪쳐서 까치놀이 되었다. 천지만물의 심금을 울렸을 만파식적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파도소리만이 대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로 들려왔다.

마음의 눈이 밝으신 스승께서 내게 죽비를 보내셨다. 스승은 아마도 내 속 뜰을 훤히 들여다보셨으리라. 아무런 말씀 없이 죽비를 보낸 뜻은 나의 무명을 스스로 치라 하심일 것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내면을 철저히 비우고 단단해지는 대나무. 대숲에서 비로소 내 부끄러운 삶을 보는 것이다. 쓸모없는 욕심으로 속을 채우면서 늘 휘청거리며 살아온 나의 삶을.

대쪽이 맞물려 내는 죽비 소리에는 우주법계에 머무는 자연의 소리가 담겨있는 걸까. 불가에서는 지혜 있는 밝은이가 “탁” 하고 쳐주는 소리에 한 소식을 듣는다고 하였다. 선정의 내면세계에서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듣고 형상 없는 형상을 본다고 했다. 보는 것 이상 볼 수 없고, 듣는 것 이상 들을 수 없는 나의 무지는 지혜로운 이가 죽비로 쳐 준다 해도 깨달음을 얻을 성 싶지는 않다. 죽비로 쳐서 한 소식을 듣는다든가, 해탈을 한다거나 하는 차원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그러니 내 속에 들끓고 있는 부질없는 생각들이나 분방함이라도 다스리라는 무언의 가르침일 것이다.

겨울 산 능선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빈 나무 가지를 후려치며 내 곁으로 달려온다. 내 속에서 빠져나가 대숲을 휘적이는 잡념들을 바람이 받아친다. 정녕 내게 더께처럼 달라붙는 번뇌의 두꺼운 비늘들은 청량한 바람으로 씻어낼 것들이 아닌 듯싶다. 아마도 곧은 대쪽으로 떼어 내어야 할 모양이다.

나를 스스로 치라 하신 죽비소리가 “탁탁” 대숲에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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