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소리

                    최선자

 

  자주 바람이 된다서재 문틀에 걸어 놓은 풍경을 손으로 쳐보는 것이다그때마다 절 마당을 걷고 있는 기분이 든다종소리의 향기는 여운이라고 생각한다울적하거나 화가 날 때도 청아한 풍경소리가 매만진 마음이 여운에 젖으면 책장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른다.

  풍경은 여행길에 화개장터에서 사 왔다길을 가다가 오래된 풍경에 시선이 멈췄다중년 아저씨가 좌판도 없이 인도에 물건을 늘어놓고 무심한 얼굴로 앉아있었다내가 풍경에 관심을 보이자 벌떡 일어났다하지만 풍경을 살피는 나를 지켜보고만 있었다오히려 팔려고 애쓰는 것보다 신뢰가 갔다재질이 놋쇠인 듯한 풍경은 군데군데 녹이 슬었지만곡선의 단아한 모양이 마음에 들었다손에 들고 쳐보니 소리와 여운도 일품이었다.

  크기보다 제법 묵직하다몸체鐸身의 길이와 맨 아래 지름이 내 검지 두 마디 정도다풍경을 감싸듯 크고 작은 산이 그려져 있다산봉우리까지 곡선인 풍경에서 만든이의 온화한 성품이 느껴진다몸체에 부딪혀 소리가 나게 하는 치게鐸舌는 콩알 같다중앙의 작은 판을 중심으로 네 개가 십자 모양으로 달려있다자세히 보면 하나가 약간 큰 듯 보인다큰형 노릇을 하는지 일을 제일 많이 한다판 중앙에서 몸체 아래로 늘어진 사슬 줄에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붕어風板가 매달려 있다세월의 발자국에 비닐과 지느러미의 빗금이 선명해 금방 헤엄쳐 갈 듯 보인다.

  집안에서 풍경소리를 듣기에는 무리다베란다에 걸어 놓아도 마찬가지였다풍판이 움직일 만큼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다어디 잃어버린 게 한두 가지던가에어컨 바람에 익숙해진 몸은 집안에 자연 바람이 들어오지 않아도 더위를 모른다현관문에 달까도 생각했지만풍경소리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대신 내가 바람이 되기로 했다서재 문틀에 못을 박고 걸었다.

  풍경소리를 듣고 있으면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들리는 듯하다마음이 차분해지고 즐거워진다번뇌에 빠졌거나 화가 날 때는 오래 듣는다음악보다 자연의 소리를 좋아한다가끔 여행길에 파도 소리나 새소리물이 흐르는 소리 등을 손전화기에 녹음해 와서 듣는다요즘은 무섬 외나무다리 밑을 흐르던 물소리를 자주 듣는다.

  종소리의 향기는 여운이다내가 범종 소리나 풍경소리를 좋아하는 이유다꽃향기를 맡으면 기분이 좋듯이 종소리의 여운도 마찬가지다은은한 소리가 마음을 씻어준다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건 바람이 되어서도 느낀다붕어의 몸이 돌지 않거나 한 바퀴 정도 돌게 치면 풍경소리가 더 맑고 여운이 길다하지만 세게 쳐서 두세 바퀴 돌면 소리만 크고 여운이 짧다.

  때와 장소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진도 팽목항 방파제 난간에는 맹골군도를 바라보는 풍경이 여러 개 있다작은 몸으로 세찬 바닷바람에 제대로 울지도 못한다마치 세월호 아이들을 보는 것 같아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갈매기도 서러운지 날지 않던 검푸른 바다차마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도 의례적인 인사 같아서 못했다풍경처럼 맹골군도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렸다.

  초겨울동학사에 간 적이 있다나무들도 잎을 내려놓고 동안거 중이었다여기저기 둘러보면서 고즈넉한 산사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오후에 도착한 게 탈이었다시간이 갈수록 날씨가 흐려졌다다섯 시가 넘자 바람이 강해졌다그때 어디선가 들려온 풍경소리를 따라갔다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며칠 동안 암자에 있었던 경험의 투영이었을까법종루 처마 끝에서 온몸으로 울고 있는 풍경이 부처님께 매달려 흐느끼는 여인 같았다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가을볕에 보은의 대추가 얼굴을 붉히던 날법주사 팔상전 풍경은 비췻빛 하늘에 올라가고 싶은 듯 유유자적 걷고 있던 뭉게구름의 옷자락을 잡았다지나던 바람이 위험하다고 말리자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아예 뭉게구름 허리춤을 꼭 붙잡았다나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어떤 인연을 만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악연 속에 있으면 고통스럽고 선연들 속에 있으면 인생 행로가 바뀔 수도 있다내가 만학도로 소설과 수필시를 쓰게 된 동기는 중년의 끝자락에 만난 선연들 덕분이다상처 입은 영혼들을 시로 치유해 주려고 애쓰는 교수님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나에게 문학의 길을 열어준 선생님예술대학원에서 소설을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 대학교 동기.

  ‘후링이라고 부른다는 일본 풍경소리가 궁금했다일본 여행을 떠나는 딸에게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딸이 사 온 후링은 쇠로 된 삿갓 모양이다우리 집에 있는 풍경의 두 배 크기다풍판은 물고기 대신 빳빳한 종이로 만들었다가로 오 센티세로 이십 센티 정도의 풍판에는 바다 그림이 있고 뒷면에는 취미의 풍경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치게는 가운데 구멍이 있는 둥근 쇠판을 양쪽으로 늘려 끝이 뾰쪽하다그래서인지 소리가 강하고 여운이 짧다종이 풍판은 바람에 잘 날리지만운치가 없다일본에도 여러 종류의 풍경이 있을 게다그중 하나일 테니 일본 풍경 소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절이나 암자에서 풍경을 주로 썼다고 한다물고기 풍판이 많은 이유다. ‘물고기는 밤낮으로 눈을 감지 않으므로 수행자는 마땅히 물고기처럼 자지 않고 수행에 임하라.’는 뜻이다법구인 목어도 마찬가지다신라 때 만든 석탑에도 탑 모서리마다 풍경을 달아두었던 구멍들이 남아 있다니 얼마나 오래전부터 만들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

  풍경은 쇳소리를 싫어하는 산짐승을 쫓기 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절이나 암자가 깊은 산속에 있으니 스님들도 산짐승의 습격을 받았을 수 있다어찌 보면 무기나 다름없다그런 풍경에도 아름다운 모양과 소리운치를 더하기 위해서 애썼을 조상들을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단독에 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욕심을 부리면 산골 마을에 있는 집이면 더 좋겠다바람이 부는 날 마루에 앉아 처마 끝 풍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나도 누군가에게 풍경소리의 여운 같은 선연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은수필> 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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