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찔레꽃 / 유혜자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 놓아 울었지 …… 중략……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 「찔레꽃」을 들으면 이 가수처럼 목 놓아 울지는 않았지만 나대로의 슬픈 사연이 생각난다.

철커덕 철커덕, 엿장수의 가위소리는 찔레꽃 덤불 밑에서 공기놀이하던 소녀들의 고개를 일제히 소리 나는 쪽으로 돌리게 했다. 수업을 끝내고 집에 와서도 태양의 뜨거운 입김이 찔레꽃 하얀 빛을 바래게 하던 기나긴 6월의 오후, 6월의 메뚜기처럼 어디로든 튀고 싶고 강물 따라 돛을 높이 달고 멀리 떠나고 싶던 초여름 날, 엿장수의 가위소리가 구원의 나팔소리처럼 반가웠다.

옆집 가게의 아저씨들도 무료하던 참이라 엿장수를 마중 나가 하얗고 반듯한 엿가락이 놓인 수레를 길 한 쪽에 세워놓게 했다. 아저씨들은 엿치기를 하려고 우리들을 두 편으로 갈라서게 했다. ㅎ과 나는 소풍갈 때 자전거로 데려다 주던 큰 아저씨 편에 섰고, 人과 ㅇ은 작은 아저씨 편에 섰다. 엿판에서 한 개씩 엿을 집어 든 아저씨들은 '얍' 하는 소리와 함께 뚝 분지르고 부러진 자리에 입김을 세게 불었다. 그리고선 의기양양하게 부러진 부분의 구멍을 보라는 듯이 내밀었다. 큰 구멍의 엿을 쥔 사람이 이기는 엿치기놀이, 3판 양승으로 큰아저씨가 이겨서 부러뜨린 엿가락을 여러 개 얻어먹었으나,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엿치기에서 진 작은 아저씨가 돈이 없다고 반값만 내며 엿장수에게 개평 준 셈치고 그냥 가라고 했다. 재료값도 안 된다고 난처해하던 아저씨의 표정과 초췌한 모습, 읍내 변두리에서 어렵게 산다는 그는 병자(病者)였다. 그날도 퉁퉁 부은 다리를 절면서도 가위소리를 청랑하게 울리며 읍내를 돌아다녔다. 그때는 많은 집에 식량이 떨어지던 보릿고개였다. ㅎ과 나는 어른들을 설득해서 돕고 싶은 똑같은 마음을 갖고, 며칠 후에 엿장수 집을 찾아가자고 약속을 했다.

 

뜻하지 않은 6.25전쟁이 발발한 것은 우리 작은 약속만 못 지키게 한 것이 아니었다. 읍내 밖 40리로 피난 갔다가 9,28수복 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우리집도 ㅎ의 집도 타버려 빈터만 허탈하게 바라보아야 했다. 우리 가족은 변두리에 작은 집을 얻어 살았는데, 오래도록 읍내에 돌아오지 않던 ㅎ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난리 통에 돌아가셔서 산 밑 헛간 같은 데서 산다는 소식이었다. 학교에도 나오지 않았고, 이듬해 중학교 진학 때도 얼굴을 봤다는 사람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병으로 고생하던 엿장수도 읍내에 나타나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고향을 떠났던 나는 대학 졸업 후, 고향 친구에게서 ㅎ이 읍내 한복판에서 양장점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뻤다. 어려서 키는 작았지만 얼굴이 하얗고 예뻤는데 어떻게 변했을까, 일반학교는 못 다녔지만, 양재학원에 다녀서 번듯한 양장점을 차렸다는 것이 무엇보다 대견했다. 마침 고향 선산에 다녀오면서 ㄱ읍에 들를 수 있어서 일마나 다행이었는지, 가게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마자 “ㅎ이 맞지 나 중앙동에 살던 아무개야.” 내가 말했을 때, 당연히 놀라며 반가워할 줄 알았던 ㅎ이 너무도 냉담하게 모른척하는 것에 의아하여 나는 어설프게 눈물을 흘리다가 그대로 돌아 나오고 말았다. 대전행 막차 표를 예매했기에 그동안 그리움의 언어를 어떻게 다 쏟아놓을까 미리 걱정하고 있던 터였는데.

6.25전쟁이 준 피해는 휴전까지 3년 동안 450만 명의 인명이 죽거나 다쳤고, 남한의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었다는 통계이다. 이런 국가적인 피해 밖에도 개개인의 인성이 파괴되고 입은 상처는 어찌 숫자로 헤아릴 것인가.

ㅎ은 유년주일학교도 함께 다니면서 모세 등 성경얘기도 많이 듣고 이따금 옥녀봉에도 올라 넓게 펼쳐진 논산평야와 금강 물을 내려다보며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꿈을 이야기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장사익의 대표곡인 「찔레꽃」은 장사익이 어느 날 집 앞 화단에 핀 장미를 발견했는데, 그때 어디선가 싸한 향내음이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고 한다. 그 향기가 장미에서 나는 향기인 줄 알고 코끝을 장미에게 댔는데 그 향은 장미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장미 뒤에 조용히 숨은 하얀 찔레꽃이었다. 그때 장사익은 털썩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바로 들찔레꽃 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찔레꽃」은 이날 있었던 일을 노래로 만들어 부른 것이라고 한다.

나의 노력으로 얻은 기술과 실력보다 우연의 힘으로 승부가 결정되던 엿치기처럼, 집안 형편이 좀 나았기에 교육을 좀 더 받은 나는 안일하게 사노라 남에게 유익을 주는 향기를 마련하려고 노력했는가. 어려서부터 가족을 열심히 부양하고 남의 옷을 공들여 아름답게 지어주려고 노력하는 ㅎ이 숨어서 싸한 향을 내는 들찔레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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