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조진一朝塵 맹난자

 

 

은퇴 이후의 삶이란 언뜻 평온해 보이나 기실은 좀 지루하다.

바쁘지 않게 해가 뜨고 별다른 일 없이 해가 진다그날이 그날 같다지만 몸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그렇지 않다하루에도 수만 개의 세포가 죽고 다시 태어나며하루 동안에도 마음은 대략 5만 가지를 생각할 정도로 산란하게 요동치며 변화를 계속한다항상恒常한 것은 하나도 없다어제와 달라진 나를 감지하며 천천히 물러나는 일을 익히는 중이다.

액자 '虛心'에 눈이 더 간다글씨를 써주신 오영수 선생도 벌써 딴 세상 사람이 되셨다요즘 나는 <가요무대>를 통해 지인들과 함께한 추억의 시간 속으로 곧잘 빠져들곤 한다.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이 멜로디를 기타로 들려주시던 선생의 모습도 그립고 "파도여 파도여 서러워 마라"를 외치던 친구의 제스처까지도 눈앞에 그려진다어젯밤 꿈엔 그 친구와 함께 있었다.

불교의 인연으로 만난 J씨는 '무문회無門會'의 회장이고 나는 그 총무였다그분은 친구와 내게 가끔씩 우리가 좋아할 만한 물건(스카프나 핸드백)을 내놓고 고르게 하였다. 30년 전우리는 그걸 요긴하게 나누어 썼다이제는 내가 서랍과 장롱을 정리해야 할 나이에 이르러 물건을 없애는 중인데간밤엔 그 친구와 내가 그전처럼 옷가지와 패물 앞에 나란히 앉아있었다친구는 부동자세였고 나는 이것저것 뒤적이며 '누구라도 줘야지.' 하면서 몇 가지를 골라 들었다눈웃음치며 좋아라 하던 그 친구는 시무룩한 표정이었고요긴한 것도 아닌데 손에 든 내 자신도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다찜찜한 상태에서 눈을 뜨니 꿈이었다. ''하고 찬 기운이 스쳐갔다두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 아닌가그때 며칠 전 <전설의 고향>에서 본 마지막 장면이 덮쳐왔다혼인을 언약한 선비가 몇 해 만에 낭자의 집에 당도했는데 집은 이미 폐가가 되었고낭자의 간청으로 그날 밤 두 사람은 냉수를 떠놓고 작수성례를 올린 뒤 신방을 치렀다아침에 깨어보니 이불속 신부는 간데없고 해골이 누워있었다그날 아침선비의 심정이 나와 다르지 않았으리.

나는 꿈에서 내 마음을 보았다놓는 연습을 익혀 왔건만 무의식의 창고에 이렇게 물욕이 남아있다니심층 바닥에 깔린 탐애의 찌꺼기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다그야말로 백골 앞에서 이런 것들은 다 하루아침의 티끌一朝塵이 아니던가.

화면에서는 연이어 최백호 씨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만나본 지 오래된 나의 지인들그들은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을까각자 목숨을 추스르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그분들을 떠올리다가 그만 아득해지고 만다.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마치 엇갈린 기차처럼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 인생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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