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세 가지 번뇌로 탐욕(貪慾), 진에(瞋恚), 우치(愚癡)를 꼽는다. 줄여서 탐(貪)·진(瞋)·치(癡)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 번뇌가 중생을 해롭게 하는 것이 마치 독약과 같다고 하여 삼독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시간과 공간의 일회성과 불가역성에 대한 통찰적 의미이지만, 나는 오늘 이 말을 인연의 소중함으로 재해석하고 싶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우리가 같은 강물에 모두 함께 발을 담글 수 있는, 오늘과 똑같은 시간과 공간 속의 인과는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탐심(貪心)의 연장선이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말 가운데 하나다. 누군가에게 “좋은 게 좋은 거야. 공연히 정 맞을 필요가 있나.”라는 말을 들을 때면, 그 괴리감에서 오는 갈등과 모순 사이에서 언제나 번민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말이 마치 “혼자 잘난 척 하지마라. 대세를 따르는 게 정도다.”라는 말과 별반 다름없는 톤(tone)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진심(嗔心)의 연장선이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고등학교 시절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미상불 어떤 계기에 다다랐을 때 좋은 게 좋다고 그냥 알 속에 머무르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를 찾아 과감히 알을 깨고 뛰쳐나오는 도전의 용기가 절실히 요구되기도 한다. 치심(癡心)의 연장선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화엄경의 핵심 사상으로 일체의 모든 것은 오로지 내적인 마음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시작된 선종(禪宗)은 당나라 제6조 혜능선사에 이르러 크게 떨치게 되는데, 제5조 홍인대사로부터 의발(衣鉢)을 물려받은 혜능선사는 당시 일자무식인 나무꾼인데다 20대 약관이었다. 이후 혜능선사는 뭇 제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한동안 숨어 지내야 했다.
어느 날 절에서 승려들이 다투고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당간지주의 깃발을 보고 이쪽 편 승려들은 “바람이 흔들린다.”라고 했고, 저쪽 편 승려들은 “깃발이 흔들린다.”라고 했다.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이게 바로 15여 년의 은둔 생활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내는 혜능선사의 제일성이었다. 그렇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람과 깃발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인 것이다.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시대와 세대를 불변하여 통용되는 말이기도 하고 자연인들이 구체적인 의미보다 막연한 기대감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영어 ‘해피니스(happiness)’의 번역어인 행복이라는 말을 사전에서는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로 풀이하고 있는데, 원래는 “선한 신이 지켜주는 마음의 평화”라는 의미의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행복의 정의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그 유형을 달리했다. 유교적 관점에서는 인(仁)의 마음을,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사랑을, 불교적 관점에서는 자비를 행복 실현의 요체로 보았고, 플라톤은 상호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상태를 행복의 요체로 보았으며, 공중적 쾌락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행복의 원리로 제시하였다.
요즘도 계룡산에는 도인(道人)들이 많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도인에게 “마음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눈에 보이지 않는 몸”이라는 대답을 했고, “몸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는 “눈에 보이는 마음”이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어느 칼럼의 글을 읽으며 나는 그 사람은 진정한 도인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명상에 명상을 거듭하지 않고서는 금방 나올 수 있는 대답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리를 듣는다. 하나로 일치할 때 가장 치열한 행복감을 느낀다는 몸과 마음의 울림이다. 사실 행복이라는 실체가 상대적 개념보다 절대적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기는 하지만, 타자들과 관계를 떠나서 정립할 수 없는 것이 또한 행복의 본질이기도 하다. 결국 행복이란 타인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스스로가 느끼는 자기만족의 자기 평화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타적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 보았다.
행복은 봄과 서로 닮은꼴이다. 행복이 기쁨과 슬픔 등 격한 감정에서 한 발 비켜서 있듯이, 봄 또한 혹한과 폭서 등 극단에서 일단의 거리를 두고 있어, 은근하게 성긴 잔잔한 느낌의 정서가 참 많이 닮았음이다. 하여 행복은 봄처럼 마음이다. 동토의 어둠 속에 씨앗을 잉태한 봄이 틈새를 비집고 시나브로 연둣빛 녹음 속에 스며들듯, 행복은 늘 그렇게 봄처럼 마음속에 다가온다. 의지적 마음의 총화(總和)다. 또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다.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고 땅 위를 걷는 일이다.”라는 임제선사의 말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까지 일상이 기적이다. 행복한 주관의 마음으로 새로운 내일의 태양을 맞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