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새긴다. 고로 존재한다 / 이정림

 

 

 

'참자, 참아!' 무슨 경전처럼 이 말을 날마다 되뇌었다. 어린애들은 걷는 게 뛰는 것이라니, 어떻게 뛰지 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래층 여자는 매일 도를 닦듯 참고 참았다.


그러나 때때로 수도자들도 파계를 하듯이, 여자는 자기최면이 풀리기라도 한 양 자신도 모르게 위층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조금만 조용히 해 주시면 안 되겠어요? 딱 그 말만 하고 내려왔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참는 김에 더 참을 걸. 얼굴 마주보며 살아야 하는 이웃인데, 듣기 싫은 소리를 주고받는다는 게 얼마나 거북한 일인가.


아래층 여자는 자기가 한 말이 목에 걸려 종일 안절부절못했다. 다음 날 저녁 초인종이 울려 나가 보니, 웬 남자가 문밖에 서 있었다. 위층에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뜩이나 위층에 올라갔던 일을 후회하고 있던 참이라,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었다.그런데 아래층 여자를 정말로 얼어붙게 만든 것은 위층 남자의 거친 말투가 아니라 그의 모습이었다. 윗집 남자는 러닝셔츠만 입고 서 있었는데, 근육이 불거져 나온 팔뚝에는 요란한 문신文身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문신을 보자 아래층 여자는 사색이 되었다. 그 문신이 어떠한 말보다 강한 무기가 되어 자신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짐작대로 그 남자는 '깍두기'라 불리는 조직폭력배였다. 아래층 남자와 위층 남자의 싸움은 마침내 법정까지 갔고, 결말은 아래층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성형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의 말을 들어보면, 문신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조폭이나 성매매 여성은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회사원, 변호사, 의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 하니, 위층 남자도 그런 가장이요 아기 아빠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더라면 아래층 남자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아래층 남자도 위층 남자의 문신에 호기심을 느껴 슬며시 따라 해보았을지 누가 알겠는가.


평범한 이들이 문신을 하는 이유는 남들보다 특출하게 보이고 싶은 과시욕 때문이다. 어느 유명한 사진가는 목덜미에 나비를 그려 넣었고, 어느 가수는 머리 양쪽으로 길게 올라가는 뱀을 새겼다. 또 어느 운동선수는 옆구리에 알 수 없는 기호로 바코드 문신을 해서,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은 그가 바로 로봇이었다는 게 증명이나 된 듯이 재미있어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튀고 싶은 자기만의 표현에 굳이 남의 공감까지 얻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들의 독특한 미적 취향에 스스로 만족해했을 것만 같다.


사람들은 왜 고통을 참으면서까지 자기 살을 파고 그림이나 글씨를 몸속에 새겨 넣으려 하는 것일까. '착하게 살자!'는 글귀를 몸에 새긴 남자는 정말로 착하게 살고 싶은 자기 다짐을 굳히기 위해 문신을 했을 것이다. 화살로 뚫은 하트 모양을 남보라는 듯이 팔뚝에 새긴 사람은 자기의 사랑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정말로 있었을지도 모른다. 옛날 여인들도 변치 않는 우정을 약속하기 위해 손목에 콩알만 한 점을 입묵入墨하지 않았던가. 또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동성애하는 궁녀들끼리 애정의 표시로 벗 '붕朋' 자를 몰래 몸에 새겼다는 기록도 있다. 그들은 방법이 유치했을 뿐 자신들의 다짐과 각오를 분명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신을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가슴에 새기고, 일찍 잃어버린 자식을 잊지 않기 위해 그 아이의 얼굴을 문신으로 남기는 부모도 있다고 하는데, 그 효심을, 그 참척의 아픔을 어떻게 쉽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며칠 전, TV에서 한 중학생을 보았다. 아무리 그 아이가 싸움질을 잘하는 일진회 소속이었다 하더라도 용 두 마리를 몸에 새기기에는 가슴이 너무 가냘파 보였다. 어린 학생이 새 같은 제 가슴에 그렇게 무시무시한 문신은 한 것은 남에게 강하게 보이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약함을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겉을 더 강하게 싸매고 덥고 위장하려 든다. 조폭이 등판에 용호상박龍虎相薄의 타투를 요란하게 새기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피바다'라는 별칭을 가진 무서운 군대 교관이 검은 안경을 벗어 보이자 순한 청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자신의 평범한 얼굴로는 부하들을 엄격하게 통솔할 수가 없어 검은 안경을 썼다고 한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던 어느 장군도 깡마른 모습에 늘 검은 안경을 썼었다. 가려야만 편한 사람들의 심리 속에는 떳떳하지 못한 그 무엇이 항상 잠재해 이었고, 스스로 강함을 위장하려 드는 사람일수록 실은 속이 무른 이들이 많음을 심심치 않게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나 조선조 시대에는 도망가는 노비에게 문신을 했다고 하는데, 이제는 그런 형벌적인 뜻은 없어져 버렸다. 다만 미학적인 기능과 자기과시, 또는 약간의 주술적인 뜻만 지니게 되었을 뿐이다. 수능시험을 잘 본다는 점쟁이의 말에 따라 고3 여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발바닥에 점 하나씩을 찍고 간 애는 그래도 애교가 있다. 어느 재미교포는 가슴에 나무를 그리고 뿌리 부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의 초상화를 새겼다고 하는데,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기 위한 진지한 마음을 그렇게 문신하고 싶었을 것이다.


연예인들이 얼굴에 애교점을 찍고, 젊은 엄마들이 자기 아이의 볼에 헤나 문신을 그려 줄 만큼 이젠 우리 사회에서 타투는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영구적이든 일시적이든 흔적은 언제나 후회를 몰고 온다. 젊어서 한때 유치한 생각으로 새긴 문신을 남이 볼까봐 반팔셔츠를 못 입는다는 남자, 죽어도 사랑이 변치 않을 것 같았던 여인의 이름을 이제는 지우고 싶은 남자, 그들은 한때의 일탈적 표현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했다.


남의 시선이야 곱든 않든 문신을 하는 사람들은 "나는 새긴다. 고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존재감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없는 듯 하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 순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사람, 따뜻한 미소만 가지고도 남을 설득시킬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 앞에 서면 절로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두 손을 모으게 하는 것은 위협이 아니라 공경이고, 그것은 상대에 대한 아름다운 승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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