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을 닮은 남자
김유진
천막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달, 사슴이 뿔을 가는 달, 또는 들소가 울부짖는 달-인디언이 부르는 7월의 다른 이름이다. 1년을 반으로 접어 나머지 절반을 새로 시작하는 7월은 살아 있는 그 어떤 것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초록은 보다 완숙해지고 열매는 더욱더 단단해지며, 곤충이나 동물은 부지런히 짝짓기하고 알을 낳고 허물을 벗는다. 1년 중 생명력이 절정에 이르는 시간, 바로 7월이다.
지하철이 답답한 터널을 빠져나오자 오후의 햇빛이 객차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꾸벅거리며 조는 사람들 머리 위에도 햇빛이 머문다. 나는 눈이 부셔서 뒤로 한발 물러섰다. 사람들 물결에 밀려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사이 내 몸을 지탱하는 발은 굽 높은 구도 속에서 조여들고 있었다. 힐을 신고도 잘 뛰어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픽 웃음이 낫다. 나도 앉아 병아리처럼 잠깐 졸고 싶었다. 쉽게 자리를 비울 것 같지 않은 어린 연인들이 앞에 앉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싱그럽게 웃었다. 그들 어깨 위로도 따갑고 투명한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내 기억 속으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서클 모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혼자서 좋아하던 선배와 둘이서만 지하철을 타게 되었다. 전철 안은 한가해서 그와 나는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그는 무릎 위에 올려진 가방에서 워크맨을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설레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같이 들을래?”하고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가 건넨 나머지 한쪽 이어폰을 받아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좋아하는 노래, 조안 글레스콕의 ‘센토’였다.
나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그의 왼쪽 귀와 내 오른쪽 귀에 꽂혀있는 한 쌍의 이어폰이 하나의 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의 귀에 꽂히곤 했던 것이 지금 내 귀에 들어와 있다는 묘한 느낌과 심장 뛰는 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청진기처럼 선배의 귀에 크게 들릴 것만 같아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요즘과는 달리 천장에 매달려 달달 거리며 돌아가던 선풍기는 실내의 열기를 식히기는커녕 제 몸의 후끈한 열까지 보탰다. 블라인드를 내렸는데도 머리 뒤의 햇볕은 뜨거웠고 등은 땀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나는 열차 바닥에 그려진 그와 나의 그림자만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선배의 머리가 까딱까딱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가 내 어깨에 닿아서 금방이라도 그와 내가 하나의 그림자로 포개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얼음 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그에게로 비스듬히 어깨를 기울여 보았다. 그에게 다가가는 시간은 그와 내 거리가 1미터도 넘게 떨어져 있는 것처럼 오래 걸렸다. 하지만 정작 그의 머리가 내게로 가까워지자 나는 바보처럼 놀라서 재빨리 어깨를 움츠렸다.
혹시 그가 잠에서 깨어 내 맘을 눈치챈 건 아닐까 싶어 가만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는 여전히 졸고 있었다. 가까이서 그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커다란 키와 갸름한 얼굴에 잘 어울리던 웨이브 머리, 선탠을 한 것처럼 가무잡잡하고 매끄러울 것 같은 피부, 진하고 긴 속눈썹과 반듯한 콧날, 그리고 또렷한 입술 선, 나는 그 입술을 보다가 그만 부끄러워져서 얼른 시선을 내려버렸다.
테이프가 다 돌아갔는지 언제부턴가 음악은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워크맨을 보았다. 그곳에 그의 손이 놓여 있었다. 크지만 가늘고 곧은 그의 손, 그때였다. 워크맨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한순간 가위에 눌린 것처럼 달싹 움직였다. 그 짧은 시간, 내 안에서 그의 손을 잡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솟구쳐 올랐다. 그의 손을 잡고 선잠 꿈에 놀란 그를 토닥여 주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잡지 못했다. 그저 무릎 위에 올려진 내 두 손을 힘주어 꼭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대한 기억은 모두 뜨거운 태양 아래에 있다. 땀에 흠뻑 젖어 농구 코트를 누비던 사람, 학군단 여름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거수경례를 하던 모습, 동아리에서 함께 갔던 바닷가. 첫 데이트, 그리고 작은 내 손을 잡아주던 어느 여름밤.
7월의 열매는 완전하지 않다. 수확을 위해서는 오랜 시간 태양과 소나기를 견뎌야 한다. 그러나 7월에 시작한 내 첫사랑도, 여름을 닮은 그 사람도 삶의 가을을 맞이하진 못했다. 뚝, 뚝, 목련이 하얀 목을 꺾던 어느 해 봄, 그가 좋아했던 노래, 반인반마의 외로운 센토처럼 인생의 여름을 힘차게 달리던 그는 육군 대위로 복무하던 중 탑승했던 헬기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나는 가끔 지하철을 타고 차장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맞을 때면 가위눌린 손을 잡아 주지 못했던 그해 7월을 떠올린다. 다시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발가락을 조이는 구두를 툴툴거리며 지하철에서 내려 거리로 나선다. 아스팔트 위로 벌써부터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그 한가운데 7월을 닮은 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김유진
수원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0년간 중등교사.
수필집 <날마다 머리에 꽃을 꽂는 여자>,<가까이, 더 가까이> 등이 있다.
<성민희 선생님의 추천작품>
여름이면 생각나는 사람,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 아직도 남아있어서 늘 생각나는 사람에 대한 추억과 그 애틋한 마음을 과장없이 잘 나타냈네요. 지나온 길을 되돌아 간다해도 무엇인가 달라질 수 있을까?-같은 느낌으로 저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라서 이 부분이 공감이 되네요. 구성이 맘에 듭니다.
풀빛같이 신선하고 마음 한쪽이 아픕니다.
글 전체의 흐름이 영화 한 편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서정적인 수필가 김유진 선생님을 응원합니다.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7월에 빗대어 그려낸
풋풋한 작품이네요.
7월은 일 년의 반이고
작가도 아마 인생의 절반쯤에 와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