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고 그런 사람일 뿐이다 / 신재기

 

 

 

 

작가에게 원고 청탁서를 보내면서 프로필에 출생 지역과 출신 초등학교를 명기明記하도록 요청했다. 물론 '가능하면'이란 단서를 붙였다. 내키지 않으면 응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처럼 단서를 붙인 것은 이것이 그리 익숙지 않은 방식이어서 작가가 당혹해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우려했던 것은 혹시라도 우리 모두에게 잠재하는 지연과 학연이란 트라우마를 새삼 들추어내는 일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다. 예상대로였다. 원고 청탁을 받은 작가 대부분이 프로필에 출신 초등학교를 적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부는 그 의도를 직접 물으며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프라이버시 문제로 연결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호응을 보내는 이도 있으니 실패한 시도는 아닌 듯싶다. 앞으로 계속 욱대겨 볼 생각이다. 애초부터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것도 아니다. 색다른 느낌을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전부였다.


문예지를 직접 편집하면서 저자의 프로필 구성은 매번 고민거리였다. 다른 장르의 문학지나 수필 전문지를 살펴보았는데, 그 모양과 내용이 엇비슷했다. 평균치를 따르기로 했고, 그렇게 실행해 왔다. 대체로 등단 연도와 등단지, 작품집이나 저서 발간 내용, 문학상 수상 및 문단 활동 경력 등이 내용의 주를 이루었다. 대학교나 대학원 학력을 적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프로필 표현은 관례에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작가의 특별한 의도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방향에서 개인차가 보이기도 한다. 가능하면 줄이려는 쪽과 관계있는 이력을 전부 드러내려는 쪽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물론 어느 쪽이든 윤리적 판단 대상은 아니다. 편집하다 보면 약간의 변형이 불가피하다. 일부 내용을 생략할 때도 있다. 이를 문제 삼는 작가도 있는데, 이럴 때는 난처하다. 자기 프로필 표현에 예민한 것과 무던한 것도 개인차라면 개인차가 아니겠는가.


편집위원 한 사람이 회의 때 프로필 구성에 출신 초등학교를 넣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왜 최종학력만 내세우고 최초 학력은 무시하느냐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한 개인을 판단하는 데 학벌을 중시한다. 이는 사회적 병폐로까지 지목될 정도다. 그런데 관례를 깨고 필자 프로필에 출생지와 출신 초등학교를 넣고자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별다른 의도가 없으나 굳이 말한다면 그 이유는 이렇다.


출생지와 초등학교라는 시공간은 수필가 개인의 유년을 짐작할 수 있는 작은 단서다. 수필은 자기가 자기 삶의 경험을 직접 이야기하는 문학이다. 망각에 묻힌 아련한 추억과 삶의 애절한 흔적을 소환하는 것이 수필의 원초적인 모습이 아니던가. 여기에는 대학교 졸업장이나 등단 증서보다 유년의 작은 단서를 내미는 것이 더 합당하지 않을까. 이것이 전부다. 다만 숨은 의도가 있다면, 도깨비바늘처럼 달라붙는 자기 수식修飾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회적 비판이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학교 배지를 왼쪽 가슴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윗옷을 바꿔 입으면 반드시 배지도 옮겨 달았다. 대학생임을 표시내고 싶었던 그때의 심사를 누구한테 몰래 들킨 것 같아 부끄럽다. 나의 작은 공부에 기대어 교수님들 강의에 종종 맞섰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나의 얄팍한 허영이었다. 그간 각종 글 뒤에 혹은 저서 앞표지 날개에 붙였던 내 프로필은 어떠했던가. 대학 졸업에서 박사 학위까지 학력을 촘촘히 적었다. 등단에서 자질구레한 저술까지 가능한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았다. 강의하면서 혹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면서 알게 모르게 내 언어 속에는 과시와 허영이 배어 지워지지 않았다. 그랬다. 부족함이 많았기에 기를 쓰고 나 자신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 같다. 자신 있게 아는 것이 한 줌도 안 되는데 왜 그렇게 많이 아는 체 까불었던가. 한 발 물러서서 나 자신을 냉철히 바라보는 신중함은 왜 그리 부족했던가.


어떤 문예지로 등단하고 어떤 상을 받고 어떤 문학 단체에서 활동하는가는 수필가로서 한 사람을 규정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이는 출생지나 출신 초등학교 등과 같은 자연적 요소보다도 한 개인을 드러내는 데 훨씬 유효하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의 적극적인 영위와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의 능력과 관계있는 것이기에 여기에는 힘이 들어가기 쉽다. 자기 과시와 허영이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프로필은 그 대상의 어렴풋한 윤곽일 뿐이다. 윤곽이 섬세하거나 그 경계선이 선명할 필요가 없다.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그은 몇 가닥 선으로도 충분하다. 생략으로 주어진 희미함과 여백이 그 사람을 더 편안하게 드러낸다. 아무리 많은 언어를 동원해도 한 인간의 정체성을 온전히 말할 수 없다. 존재는 언어로 드러나지만, 언어로 지워지기도 한다. 존재의 진정한 의미는 언어 이전에 그 자체로 빛을 발한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데 대해 늘 불만을 안고 살았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의 무게를 더 인정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틈만 있으면 나를 드러내려고 용을 썼다. 그런데 어느 시점이었을까, 이 부분에 관해 마음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간단했다. 내 안에 남에게 내세울 만한 것이 많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설령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남이 그것을 알아주기는 매우 어렵다.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관심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 이 간명한 이치를 터득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논어》첫머리에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지금도 나를 알아 달라는 욕망이 무의식적으로 불쑥불쑥 튀어 오르니, 나는 아직 '군자'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무명無名의 평범한 내 존재를 수식 없이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다. 조금은 슬프지만!

나는 그렇고 그런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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