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 / 최장순

 

 

 

"내 젊었을 땐 덩치가 이마-안 했어."

호기 좋은 목소리를 따라 내 고개가 돌아갔다. 전철 휴게실 의자 옆, 두 팔로 아름드리나무를 껴안듯 포즈를 취하고 서있는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솔깃한 귀를 모아 앉은 또래의 노인들이 마치 무용담을 듣는 아이들 같다.

노인의 말을 귀동냥하던 나는 씨익 웃고 말았다. 작은 키와 홀쭉한 몸을 봐서는 한때 풍채 좋았다는 노인을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인에게도 분명, 말처럼 풍채 좋던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젊음과 노동을 모두 비워낸 몸, 약간은 과장된 소싯적 추억 한 토막에서 왠지 모를 서글픔이 묻어왔다.

노인의 말이 내내 전철의 요동과 함께 흔들렸다. 빈 몸, 비워진 터, 공터 같은 단어들이 차례로 통과하는 전철역 이름 위에 오버랩 되었다. 끝내 나는, 생각 끝까지 따라온 노인과 노인에 업혀온 공터라는 말을 떨쳐내지 못한 채 목적지에서 하차했다.

빠르게 진화되어가는 도심에서 한참 벗어난 자투리 땅, 한때는 건축물이 가설되어 호황을 누린 때도 있었을 테지만 현재는 건축물이 사라진 나대지. 수지타산에서 멀어졌지만, 언젠가는 기사회생할 거라는 희미한 욕심을 세우고 있는 공터. 왜 나는 노인과 공터를 한 묶음에 넣은 것일까.

노인이 자신의 몸을 일궈 노동을 짓고, 거기에 생의 기억을 쌓아올린 것처럼, 무형의 추억이 가득 들어찬 곳 공터. 생기에서 한 발짝 물러난 무기력이 존재하는, 그래서 유행과는 먼 공터는 아날로그다. 지난 기억을 잊지 못하는지 여전히 집의 형식을 답습하고, 허름한 골목을 끌어들이고, 살아가는 게 별반 다르지 않은 동네사람들을 불러온다.

터는 공. 고장 난 텔레비전과 척추가 내려앉은 소파와 벽을 내려온 시계가 25시에 맞추어져 있는 곳. 소파에 앉은 고양이가 매시간 방영되는 무료한 풍경을 채널로 돌려보다가 어슬렁 사라진다. 시끌벅적한 오후 학교 파한 아이들처럼 이빨 빠진 직립의 옷걸이에 모여드는 잠자리며 직박구리들. 한때 이름깨나 날리던 다방간판엔 햇살이 들러붙어 단물을 핥는다. 깨진 이발소 삼색기둥에 기댄 혈기 좋은 풀이 장발을 풀어헤치고 있다. 가로등이 흐릿하게 졸고 있을 때쯤이면 폐품이며 고장 난 가구를 버리려는 검은 양심이 마을에서 찾아오고, 취한 오줌발이 기총소사를 하고 지나간다. 어둠이 다 지워진 아침이면 큼직한 박스만 주섬주섬 챙겨가는 젊은 트럭운전사, 뒤이어 플라스틱이며 빈병을 낚아채가는 장년의 수레꾼, 그리고 느지막하게 손수레를 끌고 나온 할머니가 밤새 안부를 묻듯 공터의 구석을 샅샅이 살피고 간다.

살아가는 일이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서로 어울려가듯 공터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 그리고 흘러가는 사계절에 맞춘 그들만의 소유권이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제 소유를 영원히 움켜쥐려는 욕망이 없다는 것이 사람과 다를 뿐이다.

지번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공터에 이름을 올린 것은 개망초였다. 봄부터 제 역역을 넓힌 개망초가 어느덧 각주 같은 꽃망울을 터트려 공터가 제 소유임을 알린다. 나라를 망친다하여 붙여진 이름이지만 공터와 잘 어울리는 것은 망초꽃이다. 이웃인 입술 파란 달개비가 그늘을 쪼아 먹고 왼쪽 방향을 고집하는 나팔꽃이 여름을 친친 감아올린다. 소복이 손을 뻗은 잡초들은 남새로 개명해 나물 이름에는 밝은 아낙들 손에 뽑혀나간다. , 한자리 차지한 바람 빠진 축구공에 비가 투둑 위로를 고여 놓으면 비 그친 하늘의 구름이 동그란 물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보고 간다.

멀리 고성을 지르는 매미소리만큼 뜨거운 여름. 소나기도 한 차례 공터를 다녀가며 제 소유를 주장한다. 느닷없는 비가 남은 무더위를 훑어가면 가을은 슬슬 제 시절임을 알린다. 마개 열어둔 병처럼, 지하철이 들어온다거나 근사한 건물이 들어설 것이라던 소문은 증발되고 잠시 고여 있던 관심도 바닥을 드러낸다.

소소한 풀벌레소리마저 철거되면 어느덧 겨울이다. 인기척 드나들던 문들은 모두 닫히지만 열어놓은 문을 닫지 못하는 공터는 고스란히 추위를 견뎌야 한다. 어느 날 도수 높은 안경을 코에 걸친 하늘이 제 소유임을 알리며 꾸욱 눈[] 도장을 찍는다.

이렇듯 한데 어우러지기도 하고, 잠시 자리를 비껴주기도 하는 질서 속의 공존인 공터. 그렇다면, 내 머릿속을 줄곧 따라온 노인을 공터라고 한다면 너무 이질적인 비유일까. 한때의 젊음에 소신과 의지를 초석으로 깔았을 노인. 그곳에 울타리를 세우고 가족이라는 집 한 채를 지었을 노인이야말로 공터가 아닌가. 상실과 회복을 거듭하는 삶, 그러나 이제 초저녁달처럼 희부연 세월 저편을 향해 달려가는 노동이 비워진 노인은 또한 어쩔 수 없는 공터다.

노인은 싱싱한 초고속의 디지털과는 먼 아날로그.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실히 필요한 아날로그들이 있다. 아무리 디지털이 우대받고 속도가 우상인 시대라지만 디지털이 갖지 못한 아날로그만의 장점도 있는 것이다. 점점 밀려나는 아날로그세대. 그들의 끈끈한 정과 보이지 않은 끈기에 기대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치를 얻고 있는 것일까. 진보와는 한참이나 멀다고, 젊음이 소진되었다고, 감히 누가 노인을 존재감 없는 공터라 말할 수 있을까. 세상이 온통 산 것과 죽은 것들이 뒤엉킨 공터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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