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보석송 / 김기수

 

 

 

내 마음에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고 빛을 흩뿌리는 보석 같은 노래가 있다. 노래를 떠올리면 오랜 시간 숙성된 와인의 향기가 끼쳐든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하고 신맛이 감도는. 영국 가수 톰 존스가 부른 이다. 오랜 옥살이 끝 사형 집행을 앞둔 죄수가 꿈속 고향을 그리는 정경을 묘사한 수인(囚人)의 노래다. ‘The old home town looks the same/As I step down from the train~(열차에서 내려서 본 고향은 변함이 없구나~)’

대학 시절 국문과 친구 네 명과 영문과 여학생 두 명이 어울려 금요일이면 쉼터를 찾아 대화를 나누고 막걸리를 즐기는 ‘금막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2박 3일 캠핑을 떠났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만큼 마음이 설렜다. 그보다 모임에 마음속에 둔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와는 집이 같은 방향이어서 종종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가 이었다. 1966년 톰 존스가 리바이벌해 세계적으로 히트했고, 국내에서는 조영남이 <고향의 푸른 잔디>로 번안해 부르기도 했다. 나 또한 좋아해 흥얼거리던 노래였지만 영어 가사를 몰라 외우기 바빴다. ‘좋아하는’ 그녀가 ‘좋아하는’ 노래이니 어찌 안 배우고 배기랴? 졸업 후 그녀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녀는 떠났지만 노래는 남았다. 그것도 전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70년대 엄혹한 군사 정부 시절 입대하려고 재학 중 신검을 받았다. 폐에 구멍이 있어 치료 후 1년 뒤 다시 신검을 받으라는 보충역 판정이었다. 교직 과목을 이수한 나는 1년 후 정교사 발령을 내주겠다는 결정에 따라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꿈 많은 청춘은 나름 자부심과 열정을 가지고 수업에 임했다. 그러던 차 군 미필자는 물론 보충역도 교단에 서지 말라는 고시가 발표됐다.

방위 소집을 받아 훈련단에 입소해 기초훈련을 받고 성남에 있는 종합행정학교 행정실에 배치됐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에서 최하 서열인 이병으로서 수직 낙하한 것이다. 군대가 철저한 계급사회이니만큼 자존심과 자부심을 내려놓아야 했다. 삶으로부터 용도 폐기된 느낌으로 괴롭고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군사경찰 중대장이 나를 찾았다. 바짝 졸아 ‘발이 안 보이게 달려가’ 대위 계급장을 단 중대장에게 부동자세를 취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멸공! 김 이병,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어허, 기수야, 나야! 손 내려. 야, 이게 얼마 만이냐?”

중대장이 멍한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앉으라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중대장 녀석이 나의 신상 명세를 파악하고 행정실로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녀석이 나를 보고 위로했다. “나이 먹고 고생이 많다. 가끔 여기 와서 이야기 좀 나누자.” 녀석이 사무실로 놀러오라고 했지만 자격지심과 열패감에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다른 곳으로 배치되었다. 대학생들의 교련 훈련장인 문무대로.

그곳에서 사고가 있었다. 외출하여 사회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헤어져 귀가하던 중 현역병과 다툼이 있어 영창 행이 된 것이다. 어린 군사경찰들은 전직 교사인 나를 대우하고 배려해주었지만 그 같은 현실이 더욱 나의 마음을 헤집었다. 초긴장 상태의 감방이지만 점호 때가 되면 노래를 부르는 시간이 있었다. “각방 노래 일발 장전!” 내 차례가 되어〈Green Green Grass of Home>을 불렀다. 대학 시절 여친 앞에서 사랑의 포로가 되어 잘 보이려 뽐내며 부르던 노래를 어둑하고 눅눅한 유치장 1호방에서 다시 부르게 된 것이다!

 

Then I awake and look around me

(그때 난 잠에서 깨어나고 주위를 바라보네)

At four gray walls that surround me

(사방이 회색 벽인 내 주위를)

And I realize, yes, I was only dreaming

(그리고 알았지, 꿈을 꾸었다는 것을)

For there's a guard and there's a sad old padre

(간수와 슬퍼하는 한 늙은 신부랑)

Arm in arm, we'll walk at daybreak

(새벽녘에 우리는 팔을 끼고 걷는다네)

Again I touch the green, green grass of home

(다시고향의 푸른 잔디를 만지지)

 

3주 간의 유치 생활 후 불기소 처분으로 풀려났다. 소집 해제 후 나의 안식처는 역시 학교였다. 가르침과 배움으로 이어진 교사 생활은 감사와 행복의 원천이었다. 몇 군데 학교를 옮겨 다니며 첫 인사로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를 해주었다. 학생 중에는 꼭 “선생님, 제일 좋아하는 노래 불러 주세요.” 청하는 학생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언제나〈Green Green Grass of Home>을 불렀다.

퇴직 후 빼놓을 수 없는 일과가 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인간 극장과 아침 마당을 시청한 후 CD로 팝송을 듣는다. 쳇바퀴 돌듯 추억의 언저리를 더듬으며 톰 존스의 노래에 빠진다. 내 휴대폰의 컬러링은〈Green Green Grass of Home>이다. 벨이 울릴 때마다 교도관에게 필을 내맡긴 채 그린마일(Green Mile‧감방에서 형장까지의 길) 어둑한 복도를 걸어 사형장으로 향하는 수인의 운명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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