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랭이 꽃 / 정태헌

 

 

 

무심중에 오늘도 발길이 뒷베란다 쪽을 향한다.

토요일 오후, 사람들이 더욱 복작댄다. 상가 한켠에 위치한 약국으론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들락거린다. 무에 그리 아픈 사람들이 많은 건지. 중화 요릿집 사내는 철가방을 들고 줄달음질이다. 비디오방 여자는 어쩐 일인지 급하게 택시를 잡는다. 양념 통닭집 남자는 문밖에서 연신 담배만 태우고 있다. 그리고 몇 발짝 옆 패랭이꽃들은 어깨를 서로 기대고 조용히 머물러 있다.

아파트의 앞베란다보다 어둡고 잡동사니가 굴러다니는 뒷베란다가 더 좋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 아파트 뒷베란다에서 창문을 열고 건너편의 풍경을 바라보면 그 오붓함에 가슴이 따뜻해져 자연 그쪽으로 발길이 가곤 한다.

길 건너편은 상가를 중심으로 1400여 세대에 5,000여명이 거주하는 영구 임대 영세 아파트다. 가난하고 병든 생활 보호 대상자들을 위해 정부에서 제공한 7평짜리 밀집 거주지다.

담벽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쪽과 이쪽은 살아가는 풍경과 생활 모습이 사뭇 판이하다. 이쪽은 소위 중산층 아파트다. 이쪽과 저쪽을 살피로 금 긋듯 담벽이 고집스레 가로질러 있다. 단단하게 보이는 담벽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처음 담벽 한켠엔 양쪽으로 왕래할 수 있는 좁은 쪽문이 있다. 한때는 무시로 들랑거리는 저쪽사람들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그만 폐쇄를 했던 쪽문이다.

십여 년 전, 탁 트인 전망이 좋아 이곳 14층으로 이사를 왔다. 그런데 이태 후, 빈터 저쪽에 영세 아파트가 들어서며 한적한 동네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처럼 ‘북적대며’사는 게 좋겠다 싶은 적도 있었지만 사태는 전혀 다르게 변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쪽에 대한 불평 섞인 말들이 이쪽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맞닿아 있는 벽을 더 높게 세워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고, 쪽문을 폐쇄해야 한다고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그러더니 담장을 높이는 공사가 시작되고 쪽문은 기어이 폐쇄되고 말았다. 그래도 안심이 되질 않았던지 집값이 떨어진다 걱정들을 하고, 급기야는 옹색하게도 아이들 교육을 핑계 삼아 한두 집씩 이사를 가기 시작했다.

한데 근자 들어 웬일인지 제한 시간을 두고 쪽문을 개방한다. 아마 이쪽이 불편해서 일 것이다. 지름길인 쪽문을 막아 버리고 나니 많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우선 나부터도 아침 산책을 갈 때면 이 쪽문을 이용한다. 쪽문을 통해 건너편 아파트를 가로질러 가면 뒷산으로 향하는 길에 쉬이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산책에서 돌아오다 쪽문 부근의 작은 화단에 피어 있는 고만고만한 꽃들을 보았다. 은행나무 밑동 부근에 촘촘하게 피어 있다. ‘패랭이꽃’이다. 누가 이 홍백색의 꽃을 이 곤곤한 동네에 심을 마음이 났을까. 꽃 이름과 모양새가 어쩌면 이다지도 닮았을까.

건너편 사람들은 패랭이꽃처럼 낮은 자세로 오밀조밀 살아간다. 그 동안 이런저런 기회로 제법 저쪽 사람들과 통성명도 하고, 더러 집으로 찾아오는 이들도 생겼다. 그들과의 대화는 편안하고 거리낌이 없다. 가슴을 풀어놓고 격식 없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딴 여자와 눈 맞아 줄행랑을 친 남편을 체념하고 자식들만 바라보며 사는 만수 엄마는 살기가 버거우면 곧잘 집으로 찾아와 눈물바람하고 돌아간다. 옆집 홀아비가 자꾸 추근댄다면서도 싫지 않은 내색을 보이는 과부 민희 엄마, 아들 녀석의 술주정에 퍼렇게 멍든 얼굴로 눈물짓는 곡성댁, 자식들에게 버림받고 혼자 살아가는 방씨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하면 전화로 하소연을 하고, 가출한 아내가 돌아와 뛸 듯이 기뻐하던 만식 씨는 그만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얼마 전 신부전증으로 덜컥 죽고 말았다.

난쟁이 박씨 할머니는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도 굶는 이웃을 보지 못해 몰래 쌀자루를 문 앞에 던져두고 달아나는 자선가다. 남편 여의고 젊은 나이에 남매 건사하기에도 등골 빠지는 건우네는 맛있는 것이라도 생기면 그릇 채 들고 다른 집으로 달리기 일쑤다. 붉은 속살을 드러내 놓고 살아가는 저편 사람들이다.

101동 입구 처마 밑은 노동력을 상실한 할머니들의 쉼터다. 언제나처럼 오늘도 예닐곱 명 가량이 말없이 앉아 있다. 날마다 무슨 생각으로 하루를 보낼까. 내일의 쌀 걱정일까. 급작스레 일자리를 잃은 아들 녀석 걱정일까. 혹시 앓고 있는 치통을 다스릴 병원비가 없어 참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네들은 앞에서 천진스럽게 훌라후프를 돌리는 손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건너편의 가난이 부러울 리야 있으랴만 그들의 마음만은 부럽다. 있는 그대로 서로 가슴의 빗장을 풀고 어깨 비비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저 느껍다. 그들은 단지 헐벗은 것뿐이고 약간 불편할 뿐이다. 그야말로 한갓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 기실 이 세상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는 게 아니라, 조금 풍요로운 자와 약간 부족한 자가 있을 뿐이다.

이쪽보다는 속살을 드러내 놓고 살아가는 저편이 훨씬 활기차다. 새벽같이 일터로 나가는 아낙들, 밤늦게 조브장한 어깨를 이끌고 둥지로 찾아드는, 약간은 비틀거리는 가장의 뒷모습이 차라리 정겹다.

이틀이 멀다 하고 왱왱거리는 구급차, 만취되어 나무의자에 널브러진 고단한 취객, 싸움질을 해결하려는 경찰 순찰차의 사이렌이 끊이질 않는 저편이지만, 그래도 그 소리만큼이나 생생한 생의 감각이 살아 있다.

줄기가 억세고 잡초 같은 패랭이꽃,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생명력 강한 꽃이 아니던가. 오늘은 그 화단에 촉촉하게 비라도 뿌려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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