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나를 보고 웃는다 / 김규련

 

 

 

돌에도 정이 오가는 것일까.

한동안 버려뒀던 수석이란 이름의 돌들이 저마다 몸짓을 하며 가슴으로 다가온다. 하나하나 먼지를 털고 닦고 손질을 해 본다. 모두 한결같이 돋보인다. 십여 점 되는 돌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모두가 개성이 뚜렷할까.

수석인들은 나의 돌을 보고 이것은 산수경석 저것은 폭포석 또 저것은 물형석, 무늬석, 호수석, 괴석 등 온갖 이름을 붙이곤 한다.

허나 나는 아직 돌밭에서 수석을 캐내고 이름을 붙여 부를 만한 전문적인 식견은 없다. 그저 오가다 문득 마음에 들고 연이 닿아 한 점씩 모아왔을 뿐이다.

돌들을 벗삼아 곁에 두고 묵묵히 앉아 있다. 어느덧 한나절이 지났다.

나는 이미 돌들을 따라 심산유곡을 소요하고 있지 않은가. 숱한 바위 언덕과 벼랑을 넘고 무수한 골짜기도 지나왔다. 험준한 산봉우리를 넘어 지금은 물보라에 옷깃을 적시며 폭포 곁에 서 있다.

그늘진 곳에서 수석들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떤 놈은 멧돼지 같고 어떤 놈은 공룡 같고 또 어떤 놈은 주작 같다. 괴물들의 갑작스런 울부짖음에 깜짝 놀라 환상에서 깨어난다.

돌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표정 속에 숨어 있는 많은 의미를 찾아 읽어본다. 돌은 비록 속진 속에 굴러도 탈속의 멋이 있고 세상사 온갖 잡음에 부딪쳐도 흔들림이 없다. 항간에 변혁이 생겨 떠들썩해도 태고의 정적을 깨뜨리지 않는다. 돌은 간청해 오는 사람의 심정에 따라 걸맞은 설법을 무언으로 베풀어 주는지도 모른다.

돌들이 차츰 역광을 받으면서 히죽히죽 웃음을 흘리기 시작한다. 왜 그럴까. 인간 만사가 꿈같고 허깨비 같아서일까. 아니면 거품 같고 그림자 같아서일까. 사람들이 그토록 집착하는 권세며 명예, 재물이며 지위, 이 모든 가치가 돌 앞에서는 하잘것없는 한갓 아침이슬이기 때문일까.

이번에는 돌들이 껄껄 웃어댄다. 인간들의 슬픈 희극이 퍽 재미있는 모양이다. 애씀과 땀 흘림으로 삶의 탑을 쌓아올리는 사람은 말이 없다. 헌데 위선의 탈, 성인의 탈, 천사의 탈을 수시로 바꿔 쓰고 외줄타기 잘 하는 사람은 대성했다며 으스대고 다닌다.

마음과 행동과 말이 따로 노는 잔재주꾼들은 스스로 겨레의 스승이나 된 것처럼 큰 소리 쳐댄다.

무소유의 청복을 설파하면서도 자신은 은근히 재물을 챙기는 성직자가 득도한 사람이라고 존경받기도 한다. 이 거짓된 인간의 몸짓이 우습다는 것일까.

돌들 언저리에 사람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명멸하고 있다. 조금 전 돌들을 껄껄 웃게 한 부끄러운 인간의 형태들이 어쩌면 나의 변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심한 자괴를 느끼며 부질없이 떠올렸던 환영을 얼른 지워나간다.

내 감성의 영토 속에 들어온 돌들이 조용히 말을 건네 온다. 뭣을 봤다고, 들었다고, 알았다고 말을 함부로 쏟아내지 말라고 한다. 나는 그 동안 말이 많았다. 이젠 가슴의 뜨락에 묵언의 팻말을 세워둬야 한다고 꾸짖는다.

내 몸은 늘 낮은 데로 임하는 척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항상 자존심이라는 아만이 머물고 있었다. 자존심도 벗어놓고 하심(下心)공부를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타이른다.

돌들이 한참 머뭇거리다 또 입을 연다. 왜 구름처럼 흘러가지 못하느냐고 따진다. 젊어서는 허황된 야심에 걸렸고, 중년에는 보잘것없는 자리 욕심에 걸렸었다. 지금은 되지도 않는 글짓기 욕심에 걸려서 끙끙거리고 있지 않느냐고 한다. 맞는 말이다. 늘그막에는 훌훌 다 털어버리고 무애의 흉내라고 내 보라고 권해온다.

아직도 욕심 많은 이 촌로가 침묵과 하심과 무애를 어찌 입엔들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것이 더 크고 무서운 욕심일지도 모른다.

창 밖에는 땅거미가 깔리고 있다. 오늘따라 왜 자꾸만 흘러온 삶의 유역이 뒤돌아 보이는 것일까. 뭣인가를 기다리고 차지하고 붙잡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이었던가. 곧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전화벨이 요란하게 들려온다. 홀연히 명상에서 깨어난다. 수석들은 한갓 돌멩이로 여전히 내 곁에 졸고 있다. 내일은 팔공산 나뭇잎새에 가을빛이 깃드는 소리나 들으러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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