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재능 / 김상태
일본의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가 그의 웹사이트에서 한 말이 묘하게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여자 대학원생이 한 질문에 대답한 말이란다. 질문자는 이런저런 이유로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이라 매번 낑낑대고 있지만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글을 좀 더 쉽게 쓰는 방법이 없을까요?" 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한 하루키의 대답은 간단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여자를 말로 꾀는 것과 꼭 같아서 어느 정도까지는 연습으로 잘 되지만 기본적으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야 합니다."
말로 여자를 꾀는 것과 글을 쓰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도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글 쓰는 것을 이렇게 거침없이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하루키다운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점에서 그러한지는 더 설명이 없으니 잘 모르겠다.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나를 두고 문인이라고 말하기는 좀 부끄러운 감이 없지 않다. 수필집을 7권이나 출간했지만 문인이라고 떳떳하게 밝힐 처지가 못 되는 것을 속으로 늘 느끼기 때문이다. 젊었던 시절 한때 시인이 되겠다는 꿈도 가졌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 극작가가 되겠다는 꿈,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가진 적도 있지만, 타고난 재능이 없는 줄 알고 일찌감치 포기한 것은 천만 다행한 일이다. "여자를 말로 꾀는 재주"와 글재주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하루키의 말을 듣고 아하 그렇군, 하고 감탄을 했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글도 그만두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글재주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여자를 꾀는 재주는 타고난 위인들이 더러 있는 것을 주변에서 보았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재능이라서 항상 부러움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신수사법新修辭法에서는 글을 쓰는 언술을 네 가지 타입으로 구분한다. 사물을 이해시키는 '설명說明', 나의 주장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논증論證', 있는 그대로 보이도록 하는 '묘사描寫', 일어나는 일을 차근차근 이야기하는 '서사敍事'가 그것이다. 논증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받아들이도록 하는 근거가 논리에 있는 것과 감정에 있는 것이 다르다. 앞의 것을 그야말로 논증(argument)이라고 말하지만 뒤의 것은 설득(persuasion)이라고 한다. 논리적으로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감정적으로는 따를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자를 말로 꾈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이 설득의 언술에 탁월한 사람이다.
여자를 꾀는 데 있어서 잘생긴 외모는 물론 말 이전에 좋은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자질만으로 여자를 완전히 설득할 수 없다. 설득의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은 말을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매력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외모가 비록 시원치 않아도 말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매력을 발산하는 경우가 있다. 말솜씨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말을 잘한다고 해서 그리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여자에게 그 매력이 더 마음껏 발산된다면 하루키가 말하는 바로 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다.
공군 초급장교 시절 내 나이와 비슷한 중사와 같은 방에서 하숙을 한 적이 있다. 이 친구야말로 여자를 꾀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사실인지 풍인지는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그가 꾄 여자 친구가 양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녀석은 절대로 출중한 외모를 지닌 사내라고는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말을 썩 잘하는 편도 못 되었다. 알다시피 공군 중사가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여인들이 그와 사귀었던 것을 보면 특별한 어떤 재능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없었다. 물론 사귀는 기간이 질지는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여인들과 사귀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사귀는 것을 보면 그에게 여자를 꾀는 특별한 말솜씨가 있었던 것임에는 틀림없었다고 짐작된다.
말솜씨와 글 솜씨는 분명히 다르다. 말은 썩 잘하는데 글은 별로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글 솜씨는 탁월한데 말은 변변치 못한 사람도 있다. 둘을 함께 갖고 있는 사람보다 둘 중 하나만 갖고 있는 사람이 더 많다. 하루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로는 말로 여자를 꾀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바로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글을 잘 쓰는 재능을 타고 나야 한다는 뜻이다. 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예술이 그렇다는 말이다. 어느 대중 음악가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좋은 가수가 되는 것은 90퍼센트의 재능과 10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천재는 1퍼센트의 재능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 어느 유명 인사의 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쓰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자기 속에 숨어있는 원석 같은 재능을 찾자는 모토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얼마쯤은 맞는 말이다. 글 쓰는 재능을 한 번도 발휘하지 않은 채 산다는 것은 억울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교실에서 대단한 작가가 배출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수강생들도 그런 기대를 갖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우선 지도하는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사람 일은 알 수 없으니까 나도 눈이 휘둥그레질 작가가 나올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로 나의 '생활수필반'에서 지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바른 글을 쓰기 위해서다.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하여 만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나만 즐거운 것이 아니라, 수강생들도 다 같이 즐거워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세계 문화의 대세가 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 같다. 민주주의란 대중화시대와 맞물려 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천명闡明처럼 앞으로의 세상은 대중이 원하는 바대로 되어 갈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원칙이 잘 시행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국에는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학도, 아니 모든 예술이 대중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대세를 잡아갈 것이다. 물론 가끔 천재들이 출현해서 기수처럼 깃대를 펄럭이며 대중들이 가야 할 길을 가리켜 주기도 한다. 그러나 천재가 아닌 대중들도 보다 나은 문학, 아니 더 나은 예술을 위해서 천재의 작품을 이해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자면 스스로 그 예술을 해 보아야 한다.
내가 '생활수필'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설강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본격적인 문예수필이 아니라, 생활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충실히 기록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수필 말이다. 내 의도를 짐작이나 한 듯이 수강생들도 문예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글쓰기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인 반이다. 모두 자기의 생활을 충실히 기록해 보겠다는 사람들이고 생활하다 보면 때가 낀 마음을 정화시켜 보겠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쓴 글을 얘기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곳, 글을 쓰면서 친하게 된 사람들과 교류하는 곳이 바로 '생활수필' 교실이다. 내 의중을 어떻게 알았는지 개강 이래 수강생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로 15년째 이 교실을 운영하고 있으니 정말 신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글을 잘 쓰는 재능을 여자를 말로 꾄다는 것에 비유한 하루키의 말은 맞다. 글을 잘 쓰는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그러나 꾄 여자를 헌 신짝처럼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을 것이다. 꾄 여자를 사랑해야 한다. 사실 꾄다는 말에 얼마간 어폐가 있다.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꾄 다음에 사랑이 따르지 않는다면 아름다움 결과를 얻지 못한다. 사랑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함께 있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한 적이 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을 쓸 때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겪는다. 그러나 괴로움을 겪고 난 뒤에 즐거움이 찾아오기 때문에 글을 쓰는 보람도 느끼는 것이다. 게다가 그 글은 나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정화淨化시켜 주는 과정의 하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