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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길이 있다.
 

수백 년, 아니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그 길을 ‘순례의 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을 생각하면서 한 가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야고보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더 큰가?
 

물론 이 질문은 야고보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으며, 초대교회의 중요한 증인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의 유해가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안치되었다고 믿어졌고, 중세부터 그곳을 향한 순례가 크게 발전했다.
 

산티아고 순례길, 곧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는 바로 이러한 역사와 전승 속에서 형성되었다.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기독교 순례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종교적 목적뿐 아니라 자기 성찰과 여행, 치유와 문화 체험을 목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걷는다.
 

그 길 위에는 여러 상징적인 장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이다.
 

순례자들은 이곳에 이르러 자신이 고향에서부터 가져온 돌을 내려놓는다. 그 돌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담겨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상실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죄책감이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아픔과 후회이다.
 

그리고 그 돌을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상징이다.
 

무거운 돌을 내려놓으면서 마음의 짐도 함께 내려놓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이러한 의식적인 행위가 자기 성찰과 감정적 해방을 돕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돌을 내려놓았다고 해서 죄가 용서되는가?

그 길을 끝까지 걸었다고 해서 구원이 완성되는가?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발에 물집이 잡히고 몸이 지쳤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책이 사라지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다시 물어야 한다.

 

“다 이루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인간의 순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이제 죽을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의 사역이 완성되었다는 선언이다.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에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더 보태야 할 여지가 없다. 십자가는 인간의 공로를 보충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예수께서 친히 이루신 사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게 된다.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왜 우리는 아직도 무엇인가를 더 해야 구원받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왜 우리는 더 많이 걸어야 하고, 더 오래 기도해야 하고, 더 많은 헌금을 해야 하고, 더 고행해야 하고, 더 특별한 장소를 찾아가야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기도도 중요하다.
금식도 중요하다.
헌신도 중요하다.
봉사도 중요하다.  순례도 개인의 신앙적 성찰을 위한 좋은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구원의 값을 지불하는 행위가 되는 순간, 복음은 다른 종교와 다르지 않게 된다.
 

종교개혁은 무엇을 회복하려 했는가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이미 500년이 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내걸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제도나 정치적 권력을 바꾸려는 운동이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구원에 관한 질문이 있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가?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면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교회가 정해 놓은 종교적 행위를 많이 하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가?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으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인간의 공로를 더해서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옛날의 잘못된 구원관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돌을 내려놓는 것과 죄를 내려놓는 것은 다르다

철의 십자가 아래 돌을 내려놓는 행위는 아름다운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상징과 구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돌을 내려놓는 것은 내 마음의 결심을 표현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죄를 없애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순례자가 길 위에서 자신의 죄책을 내려놓을 수는 있다. 그러나 죄의 대가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담당하셨다. 우리가 흘린 땀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흘리신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  이 차이를 잊어버리면 기독교는 어느 순간 ‘고행의 종교’가 된다.

 

더 힘들게 해야 더 거룩해지고,
더 많이 희생해야 더 사랑 받고,
더 많이 바쳐야 더 복을 받고,
더 먼 곳까지 가야 더 깊은 신앙인이 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복음은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킨다.
 

“와서 보라.”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신 은혜의 사건이다.
 

야고보의 길인가, 예수의 길인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목적지가 야고보의 무덤이라면, 기독교 신앙의 최종 목적지는 야고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이다.
 

야고보도 예수님을 따랐다. 야고보도 예수님에게서 구원을 받았다. 야고보도 예수의 십자가를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야고보의 길을 아무리 오래 걸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할 수 없다.
 

야고보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될 수 없다. 야고보를 기념하는 십자가가 아무리 크고 웅장해도, 그것이 갈보리의 십자가보다 커질 수는 없다. 야고보는 증인일 뿐이고, 예수님은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산티아고 순례 길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수많은 ‘돌’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
 

특별새벽기도에 몇 번 참석했는가.
성경을 몇 번 읽었는가.
헌금을 얼마나 했는가.
교회 봉사를 얼마나 했는가.
어떤 직분을 받았는가.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는가.
 

이것들이 모두 귀한 신앙의 열매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께 내세울 공로의 목록이 되는 순간 문제가 시작된다.

 

“나는 이것만큼 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더 많이 봉사했다.”

“나는 교회를 위해 이렇게 희생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공로를 쌓아 놓는다. 마치 돌 하나, 돌 하나를 가져다가 십자가 아래 쌓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복음은 말한다.

그 돌들을 내려놓으라.

너의 공로를 내려놓으라.

너의 자랑을 내려놓으라.

너의 의를 내려놓으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잘못된 종교는 끊임없이 인간에게 묻는다.

“무엇을 했느냐?”

“얼마나 했느냐?”

“얼마나 희생했느냐?”

“얼마나 고생했느냐?”
 

그러나 복음은 먼저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이것이 복음과 종교의 차이다.
 

종교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을 만든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신 사건을 선포한다.  종교는 인간의 공로를 쌓는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든다. 종교는 “내가 이루었다”고 말한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고 말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을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삶의 방향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은 얼마든지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길이 아니라 구원관이다.

돌이 문제가 아니라 돌에 무엇을 기대하느냐가 문제다.

순례가 문제가 아니라 순례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느냐가 문제다.  십자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느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느냐가 문제다. 

 

철의 십자가(Cruz de Ferro) 아래 돌을 내려놓으며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상징적 행위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돌이 아니다. 갈보리의 십자가이다.

 

이제는 십자가에 무엇을 더하지 말자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시 인간의 공로를 구원의 조건처럼 만들고 있다.
 

어떤 사람은 순례를 통해 구원을 찾고,
어떤 사람은 고행을 통해 구원을 찾고,
어떤 사람은 헌금을 통해 구원을 찾고,
어떤 사람은 직분을 통해 구원을 찾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앙 경력을 통해 구원을 찾는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더할 것이 없다.

 

예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다 이루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순례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구원에 대한 감사의 순례여야 한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걷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걷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봉사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를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야고보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야고보를 구원자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철의 십자가 아래 돌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돌이 죄를 없애준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순례할 수 있다.

그러나 순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인간의 공로를 하나도 더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십자가 위에서 이미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십자가가 아니다. 이미 완성된 십자가를 더 깊이 믿는 것이다. 26-06-21-0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