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독백 / 위상복 - 2024 매일 시니어문학상 수상작

 

 

 

"나도 엄마가 죽으면 좋겠어요."

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가을걷이 끝 무렵의 쌀쌀한 밤길, 엄마 등에 업혀 집으로 오면서 아이가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젊은 아낙이 숨을 거둔 친척 집에서 오구굿을 본 아이의 느낌은 유달랐던가 보다. 우리도 금자네처럼 굿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엄마는 얼마나 놀라웠던지, 아이가 어지간히 자라도록 그날 장면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어릴 적 네 모습이 스치면서 발소리가 너를 부른다. 사흘이 멀다고 만났건만 단둘이 마주한 지가 무척 오래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더위가 물러가지 않았는지, 매일 갈아주는 바지도 감기고, 이불도 후줄근하구나. 중복 대서를 지났는데도 계절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고래 심줄도 이만큼 질기지는 않을 터. 눈 감고 입 닫은 채 병실을 지키는 내게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란다.

한 번만이라도 움직이고 싶다. 하지만 내게 남은 힘이라곤 작은 개미만큼도 안 되니…. 주사기로 쑤셔 넣어주는 죽을 받아먹다가 링거를 꽂으니 날개라도 단 것만 같다. 산다는 게 뭐고 먹는다는 건 또 뭔지. 안 넘어가는 것을 억지로 삼키려는 내 꼴이 말이 아닌 듯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말은 못 하지만 귀라도 열려 있어서 천만다행이구나. 오늘도 네가 들려주는 얘기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적어놓고 싶다.

아들아, 너는 자식들 중에서도 좀 특별했었다. 고집은 세고 행동은 물렀지만, 철들고 난 뒤엔 한 번도 내 속을 태우지 않았잖니.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가도 네가 온 것을 알았을 땐 상처가 다 나은 것만큼이나 든든하더구나. 매주 주말이랑 주중에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네가 손꼽아 기다려졌지. 휠체어에 억지로 앉혀 병실 복도를 돌거나 병원 옥상에라도 데리고 갈 땐, 몸은 귀찮고 고달파도 답답한 마음을 날려 보낼 수 있어서 더없이 좋았단다.

지난 삼월 내 생일날이 문득 생각난다. 바로 식당 앞이라, 대여섯 발짝만 떼면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옆에서 부축하려는 너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무척 후회스럽구나. 내가 넘어지는 바람에 흥겨운 잔칫상까지 온통 뒤엎어버렸으니…. 영문도 모르는 증손자 증손녀들과 먼길 찾아왔던 어린아이들은 얼마나 실망했겠니. 늙은 할미가 덕담도 건네고 용돈이라도 챙겨줬어야 하거늘, 어른 노릇은 못 하고 짐만 되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 주무시면 안 돼요."

수술 후, 밤새 내 귀청을 때리던 말이란다. 의사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너는 그 말만 반복했지만, 그날따라 눈꺼풀의 무게가 왜 그리도 무거웠는지 모르겠다. 긴장이 풀린 건지 아니면 기력이 달려서 그랬는지, 아무리 눈을 크게 뜨려고 해도 계속 감기는 걸 어떡하겠니. 제발 감지 말라는 말도 자장가처럼 들렸다고나 할까. 네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면서 그냥 한숨 푹 자고 싶더구나. 그래도 일어나야겠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 때문에 온 힘을 다해 날밤을 새우지 않았겠니.

아들아, 네게 꼭 할 말이 있다. 네가 병실 바깥바람을 쏘여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욕심도 나더구나. 눈멀고 등 굽은 나무가 만만하다고 했던가. 매일 김천까지 와서 앉혀주고 세워주면 일어날 것 같다고 한 말이 네 가슴에 못을 박은 것 같다. 정년을 코앞에 둔 마당에 직장 생활하기도 그리 간단치는 않을 터. 내 말대로 할 수 없는 네 마음만 아프게 한 것 같구나. 사실 네가 구완해 주던 게 좋아서 했던 말이니 속에 담아 두지는 않길 바란다.

어제 시골집 방문은 참 고마웠다. 오줌줄을 달면서 생전에는 집 구경을 못할 줄 알았다. 구급차에 실려서라도 다녀오니까 마지막 숙제도 끝낸 느낌이다. 비록 몸을 일으켜 세울 수도 없었고, 집 안을 속속들이 둘러보지도 못했지만, 네 아버지 만나러 갈 채비는 어지간히 차린 것 같다. 일흔을 넘기면서부터 이승 떠날 준비는 매일 한다고 했는데도 막상 닥치고 보니 당황스럽더구나. 병실에만 누워 지내다 보니 마음 한구석 찜찜했던 일도 어지간히 해결한 듯하다.

살아보니 인생도 별 게 아니더라. 내 나이 아흔셋이면 지금까지 산 것만도 복 받은 게지. 하루를 더 산다 해도 아쉬울 테고 며칠 덜 산들 이미 충분하거늘, 무슨 미련이 더 있겠니. 어른들 말씀이 하나도 그른 게 없는 것 같더라. 부디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 말없이 세상에 왔듯이 때 되면 조용히 떠나고 싶다. 아마도 먼저 가신 네 아버지와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던 네 형이 나를 기꺼이 맞이하지 않겠니.

오늘따라 병실을 드나드는 바람조차 무겁게 짓누른다. 수술한 대퇴부와 고관절이 쑤시는 게 소나기라도 한줄기 쏟아지려나. 찌뿌둥한 하늘에 바짝 오른 수은주만큼이나 마지막 한 조각 남은 힘도 사위어가는가 보다. 아마도 무더위가 수그러들면 다른 계절로 옷을 갈아입겠지. 건들바람이라도 일어야 희망 없는 어미 때문에 고생하는 내 새끼들은 좀 편안해 질려나….

"둥덩둥덩 둥그덩둥덩, 둥덩둥덩 둥그덩둥덩…"

오구가 풀리자, 무녀가 던진 칼끝이 대문 밖을 향한다. 구천에 떠돌던 망자의 넋을 저승으로 고이 보내드린 듯, 오방기를 하나둘 거둬들인다. 요란스럽던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점점 옅어진다. 밤이 깊어지면서 귀뚜라미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가 길게 멈추기를 반복한다. 화려하게만 비췄던 굿판도 마지막 무대가 막을 내리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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