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비(北扉) / 권인애 - 제14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

 

 

전형적인 농촌 모습이다. 야트막한 산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으며, 마을 앞과 옆으론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옛날엔 큰 개울도 마을 앞으로 흘러갔다니 배산임수 지형이기도 하다. 집들도 전부 초가나 기와집으로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진다. 어릴 적 살던 마을 같은 익숙한 모습에 고향 집을 찾아가듯 선뜻 마을로 들어선다.

성주군 한개마을. 조선 초기 이우가 정착한 이래 지금까지 줄곧 성산 이씨가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6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민속마을이다. 다수의 과거 급제자와 걸출한 유학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길지에다 반촌이다. 가옥은 75호 정도가 남아있는데, 그중 10개소의 주택과 서당이 지방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마을은 명성답게 세월이 비켜 간 듯 수백 년 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예스러운 고샅길과 토석담이 정겹고 집안과 마을 곳곳에 심어진 봉숭아, 상사화, 배롱나무꽃도 옛 정취를 자아낸다. 간혹 잎이 큰 파초가 보여서 양반가임을 알게 해주는 집도 있다. 고택들은 18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건립된 것으로 보수한 흔적은 보이지만 대부분 원형 그대로 잘 보존돼 있다. 지금도 후손들이 거주하는 집이 많아 자세히 볼 수 없는 점이 아쉽다.

고즈넉한 고샅길을 따라 마을 동쪽을 한 바퀴 돌고 서쪽으로 내려오는데, 돌올한 회화나무 두 그루가 대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 있는 집이 눈에 띈다. 민속 문화재 제44호인 응와종택이다. 공조판서까지 지낸 응와 이원조의 생가라 붙인 이름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북비(北扉)’라는 현판을 걸어 놓은 협문이 오른쪽에서 말을 걸어온다. 북비는 ‘북쪽으로 난 사립문’이란 뜻이다. 성인 한두 명이 허리를 숙여야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문에 현판이라니! 문이 간직한 이야기가 자못 궁금하다.

이원조의 증조부 돈재 이석문은 본래 사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이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임오화변 때, 후에 정조가 되는 세손을 업고 국문 현장인 창덕궁으로 내달렸던 인물이다. 영조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는 것의 부당함을 간했고, 뒤주에 큰 돌을 얹으라는 어명까지 어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삭탈관직을 당했다. 한개마을로 낙향해 은거하면서도 그는 늘 사도세자를 생각했다. 사립문을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북쪽으로 내고 하루도 빠짐없이 북향재배까지 했다니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영조가 다시 한양으로 불렀지만 응하지 않을 정도였다. 후에 이석문은 그의 진심을 인정받아 북비공(北扉公)이란 명칭을 얻고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집 아래 세워진 신도비가 그의 도저한 행실과 충절을 지금도 증명하고 있다. 한때 북비댁으로 불린 것도 이 문에서 유래 되었다.

북비를 열고 들어가 보니 방 두 칸, 대청 두 칸인 네 칸짜리 맞배 기와집인 북비채가 나타난다. 이석문은 이곳에서 기거했다. 집 전체 규모에 비해 다소 초라해 보이는 네 칸 집에서 그의 처지와 마음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북비채 마루에 앉아보니 북비가 마주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북비는 단순한 사립문이 아닌 모시던 주군과 이어지는 한 가닥 통로가 아니었을까. 추모의 마음에 더해 지키지 못했다는 그의 애달픈 회한까지 사도세자 영혼에게라도 전해졌기를….

북비채를 둘러보니 불현듯 돌아가신 할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선비 집안 표시인 회화나무가 지키던 오막살이 사랑채에서 늘 글을 읽고 시를 쓰셨던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구한말에 태어나 학문에 매진했지만, 일제 침략으로 꿈을 펼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신학문을 배우고 일제에 협조해 입신양명할 수도 있었지만,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두 나라나 두 나라의 임금을 섬기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실제로 고종에서 순종에 이르는 조선 왕조의 임금을 섬겼고, 장례식에도 참석해 예를 다했다. 또한 조선 시대 대표 학자인 이율곡의 ‘이기론’에 대한 믿음을 유지했고, 이율곡과 송시열에게서 이어져 온 영남 노론의 일원으로서 학자의 길을 걸었다. 8권 5책의 문집을 남겨서 유학의 맥을 이으려고도 애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생계와는 거리가 먼 일이어서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고 곤궁했다. 가난에 시달리다 보니 할머니는 늘 “돈이 나오길 하나, 밥이 나오길 하나….”하며 푸념했다. 어릴 적엔 나도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그 바탕에는 조선 왕조에 대한 충절이 있었음을.

응와종택은 이석문의 증손자로 판서까지 오른 이원조가 중수하여 지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정승의 생가답게 위엄 있고 화려한 편이다. 그러나 이 넓은 집에서 작고 소박한 북비가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문이 간직한 무게 때문이리라.

지금은 나라의 주인이 국민인 세상이다. 지도자도 5년마다 국민들이 직접 뽑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주군에 대한 충절은 전근대적 도덕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일종의 맹목적 정서라며 폄하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조선 영조 때로 거슬러 가보면 불이익과 위험을 무릅쓰고 절대자인 임금에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될까. 게다가 모셨던 분이 처형된 뒤에도 끝까지 신의를 지켰으니 이석문의 충절은 칭송받아 마땅하리라.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보편적 윤리로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부귀와 영달에 눈이 멀어 대의는 쉽게 저버리고 시류나 눈앞의 이익만 좇는 사람들에게는.

집안을 둘러보고 대문을 나오며 다시 북비를 바라본다. 잘 보존된 문 너머에서 300년 가까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이석문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온전히 보존되어 한개마을을 찾는 이들에게 충절의 표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조만간 시간을 내어 고향의 할아버지 재실에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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