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락초 / 조현숙 - 제5회 순수필문학상 당선작

 

 

통 유리창 하나 가득 바다가 출렁거린다. 너울이 갯바위를 칠 때마다 하얗게 메밀꽃이 일어난다. 물머리를 세우며 덤벼드는 파도에도 아랑곳없이 높직한 갯바위에서 한 여인이 풍락초를 건지고 있다.

3월의 바람이 드세기도 하다. 바다를 보겠다고 달려왔다가 갈퀴를 세우고 덤벼드는 소소리바람에 도망치듯 들어온 카페다. 뜨거운 바다의 내력이야 한잔 커피에 담아 마시면서 느긋하게 조망하리라, 그렇게 생각했다. 저 여인을 보기 전까지는.

낭창낭창, 대나무 장대가 바다를 더듬는다. 몇 번의 헛손질 끝에 여인이 미역 올을 건진다. 장대를 흔들어 갯바위 바닥 한 편에 미역을 떨구어 놓는다. 거친 바위에 따개비처럼 붙어 선 여인의 발아래로 바닷물결이 쉼 없이 굼실댄다. 깔밋하게 여며 입은 무채색의 차림새에, 손에 낀 분홍고무장갑이 도드라져 보인다. 파도에 떠밀려 오는 미역을 향해 바투 잡았던 장대를 길게 늘이느라 여인의 허리가 직각으로 구부러진다. 꽃샘바람이 등짝으로 쏟아지는 빛살 한 줌을 날려버린다.

봄꽃 향기 피어나는 삼월이면 갯마을 사람들은 꽃 대신 짬에서 돌미역을 딴다. 해녀들이 싱싱한 미역을 베어 망태기에 담아 밧줄에 매달아 놓으면 어촌계원들이 끌어내서 계원별로 노느매기한다. 마을 사람들도 까꾸리라 불리는 대나무 장대를 들고 풍락초를 건지러 앞바다로 나간다. 바람이 한바탕 바닷속을 뒤집어 놓을 때, 파도에 뜯겨 떠밀려 오는 미역을 건지면서 영덕, 울진 갯마을 사람들은 “풍락초를 건진다.”라고 한다. 미역밭에서 미역을 따는 일은 그 마을의 어촌계원들만 가지는 권한이지만, 떠다니는 미역을 나누는 것은 이웃들에게도 허락된 소박한 인정이다.

뜯어낼 수 없는 삶의 지문처럼 바닷바람은 연신 여인의 몸을 훑는다. 떨어질 듯 위태로워 보이지만, 온 생이 그 자리였던 듯 여인의 태는 여일하다. 장대 끝에 미역이 걸린다. 여인이 깊숙이 몸을 구부려 한 생을 건진다.

짬에 단단하게 발을 붙인 미역들이 거친 파도에 휩쓸리면서 이리저리,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다. 물속 깊이 뻗치는 햇살에 키를 키우고 머리채 잡아 흔드는 너울에 시퍼렇게 멍도 키우면서 몸피를 불렸을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고 파도가 치지 않을까. 때로는 굼뉘에 곤죽이 되면서도 어기차게 뿌리내린 생의 이야기를 치렁치렁 풀어놓았다. 그런데 어쩌다 풍락초가 되었을까.

싹쓸바람은 온종일 거친 망나니 춤을 추어대며 온 집안을 난장으로 만들었다. 열심만으로는 안 되는 삶의 속성은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달아나야 하는데 그 자리에 뿌리내린 발을 꼼짝할 수 없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여기서 떠밀고 저기서 떠밀어대는 너울을 따라 미친 듯 흔들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호호탕탕 푸르른 저 바다, 아낌없이 내주고 끊임없이 품어 주리라 믿었던 바다에서 어쩌다 우리는 길을 잃은 걸까? 난장은 기어이 난파선을 만들고야 끝이 났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바다는 더없이 푸르고 고요했다.

엄마라는 배는 부서져도, 침몰해도 걸어서라도 바다를 건너간다. 속수무책 떠다니는 가족의 맨발을 거둬 어느 갯바위 한 귀퉁이에 다시 심었다. 생전 와 본 적 없는 그곳에서도 아이들은 연한 녹색의 싹을 틔우며 자랐다. 희붐한 갓밝이에 눈을 뜨면 아슬아슬한 새날이 너울처럼 무거웠지만 빛살 한 줄기를 부여잡고 허리를 폈다. 온몸에 촉수처럼 뻗친 미역귀를 가지고도 세상의 수군대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소리의 기억도, 근원도 되짚지 않았다. 따져 물으면 검푸른 낭떠러지를 건너지 못한다. 그저 세상이라는 바다의 한 귀퉁이를 낚았다. 짜고 쓰고 눅눅한 바람을 견디면서 세상의 이삭들을 주웠다.

저 여인도 미역밭 하나 나눠 가지지 못한 무명의 섬이었을까. 짬에서 떨어져 나와 허허바다를 정처 없이 떠돌다 이제야 저 거친 갯바위에 맨발을 세운 걸까. 발목이 잘린 미역 한줄기가 여인의 손으로 들어온다. 좀처럼 불어나지 않을 것 같던 미역 올들이 바위 위에 차곡차곡 쟁여진다. 살아있는 것들이 살아내기 위해 수행하는 행위는 장하고 눈물겹다.

이제 여인은 이삭 같은 풍락초를 갈무리해서 해풍과 햇살에 말릴 것이다. 풍랑의 시간을 견뎌냈던 누덕누덕한 생들은 서로 얼싸안고 햇살을 당겨 바짝 마를 것이다. 곧은 등뼈의 꿈으로 잘 꿰어져 어연번듯한 해산미역으로 거듭난다면 어느 어미의 바다에서 어기차게 뿌리를 내리리라. 아니, 날 것 그대로 오늘 저 여인의 쥐코밥상에서 푸른 이야기가 되어도 좋겠다.

문득 여인이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본다. 뻐근한 허리를 펴고 섬처럼 흐르는 구름을 보는 걸까. 여인의 꼭뒤와 내 얼굴이 창에서 만난다. 보이는 사람과 보는 사람 사이에 경계가 허물어진다. 생존의 바다와 완상의 바다가 하나가 된다. 각다분한 춤의 곡절이야 다르겠지만 삶을 이어가는 곡진한 몸짓이야 다를 바 없다.

미역들이, 풍락초가 얼쑤 한바탕 춤을 춘다. 포효하는 파랑의 소리면 어떠리. 부드러운 해조음이면 더 좋다. 장단 맞춰 추는 춤은 비린내 나는 삶이어도 말갛게 씻어내고 꾸덕꾸덕 말려가며 또 하루의 뼈대를 세우는 우리의 이야기다.

세상의 어미들은 바람의 계획 같은 거, 파도의 음모 같은 거 따지지 않는다. 이슬 시간이어도, 한 오백 년이어도 주어진 만큼 장대를 던지고 돌리며 풍락초를 건진다. 한 생을 건지고 부려놓고 다시 세우면서 오늘의 서사를 엮어간다. 한겻이 되도록 나는 여인을, 여인은 바다를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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