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귀루에 올라 / 위상복 - 제14회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대상
삶의 굴레 속에서 신념을 찾는다. 세상을 제대로 알기도 만만찮거니와, 바른대로 말하거나 믿음대로 행동하기도 쉬운 노릇이 아니다. 상식마저 헷갈리는 사회라면 어떻겠는가. 아무리 세상이 어지러워도 바른말을 담고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 끈을 놓지 않는다.
팔조령 넘어 청도읍성 가는 길, 옹기종기 모인 가옥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이르자, 탁영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계서원이 오랜 침묵에서 깨어난 듯 야산 자락에 기댄 채 기지개를 켠다. 와룡산이 청도천과 너른 들판을 품은 양지바른 명당이라 알려진 곳이지만, 따스함보다는 묵직하고 엄숙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다.
어서 오라며 유직문이 팔을 벌린다. 서원 정문이다. 유직(惟直)이라는 말에서 사사로운 인정에 휘둘리지 않는 선비의 강직한 직필이 묻어난다. 붉은빛이 대문짝에 선명한 게, 금방이라도 선홍색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듯하다. 천년 세월에도 잊지 못할 큰 슬픔이라도 간직한 것인가. 정문 따라 가지런히 늘어선 토석 담장조차 한껏 몸을 웅크린다.
정문 안에 우뚝 선 영귀루에 오른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었으나, 몇 해 전 갑자기 폭삭 내려앉았다. 유생들이 시문 읊고 휴식 취하던 2층 누각이 까닭 없이 무너진 게, 마치 억울하게 모함당한 선비를 보는 듯하다. 새로 지은 건물 누마루에 청도팔경이 걸려 있다. 남산의 오산조일(鰲山朝日)과 낙대약폭(落臺藥瀑)에 빠져드는 순간, 이곳 출신 대학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탁영 김일손은 당대 사림을 대표하는 선비다. 영남학파 시조인 점필재 김종직의 수제자로, 약관을 갓 넘긴 젊은 나이에 문과 급제한 신동이다. 일찍이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 사초를 쓸 정도로 학식과 문장이 뛰어났다. 하지만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극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갑자기 강당 앞이 수런거린다. 임금인 듯한 자를 앞세워 배부른 신하들이 뒤따르고, 굴비처럼 엮인 가냘픈 선비들이 줄줄이 끌려온다. 영문도 모르는 구경꾼의 눈망울에 수심이 가득하다. 늦여름 오후, 국문이라도 열릴 참인가. 궁금증도 잠시뿐, 사림의 젊은 학자들을 형틀에 매단 채 임금이 차례로 심문한다.
“네가 나의 할아버지 세조 대왕을 비난한 글을 실록에 남기려 했느냐?”
“그렇사옵니다.”
“어째서 그리하였느냐?”
“사실대로 기록하는 것이 저의 일이기 때문이옵니다.”
혹독한 고문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탁영의 목소리는 의외로 담담하다. 죽을죄를 지었으니 살려달라는 말도, 임금님 입에 맞게 사초를 고치겠다는 말도 없다.
문득 대학 선배 김 선생이 생각난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술자리를 함께해온 막역한 사이다. 새로운 교원 단체 출범을 앞둔 즈음, 모교에서 대규모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상급기관이 눈에 불을 켜고 있어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갑자기 바빠진 선배, 경계가 덜한 집회 전날 대학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공격 목표는 정해놓고 덮칠 방법만 궁리하는 꼴이라고나 할지. 내 지도교수님 연구실에서 하룻밤을 보내자는 말이다.
내 생각은 달랐다. 대학 언저리를 기웃거리다 서른 되어 나선 직장이 아니던가. 더욱이 가족의 밥술까지 달린 소중한 일터였으니…. 교문을 박차고 나서려 해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평교사회 활동만으로도 교사 입장을 어느 정도 전달한 것 같았다. 너무 앞서가는 듯하니 우리도 조금 처져서 지켜보자고 말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정의감에 불타는 선배 귀에 내 말은 공염불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시망을 어떻게 뚫었는지 다음날 집회에 번듯이 고개를 내밀었다. 교원 단체 출범에도 앞장서더니 결국 자기 뜻과 상관없이 정든 학교를 떠나야 했다. 훗날 세상이 변하면서 옛 일터로 다시 돌아왔지만, 후유증이 간단찮았다. 살림살이도 조여 왔고 건강도 가만두지 않았다. 언죽번죽 나대기 좋아하는 사람이 입원과 퇴원만 반복하려면 얼마나 답답할지.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바른길을 걷기 위해 나섰다가 가시밭으로 내몰렸던 이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는가.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로 맺은 열매를 손도 대지 않고 받아먹은 느낌이다. 이익 앞에 변절하거나 권력 앞에 고개 숙인 인물들을 손가락질했던 내가 아니던가. 그때 그들에게 진 빚이 줄기는커녕 늘기만 하는 것 같아 창피하기 그지없다.
청도천 건너편에 내려앉은 남산이 지는 햇살에 드러눕는다.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가 누마루를 에워싼다. 김일손이 즐겨 켜던 탁영금의 여운인가. 마치 앞날을 예감한 듯 자신의 절개를 소리로라도 새겨 놓고 싶었던 것일까. 하나의 거문고로 남겨진 그의 올곧은 정신은 요즘처럼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옥동자는 그저 태어나는 게 아닌가 보다. 교육을 바로잡기 위해 나섰던 이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비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맑지 않으면 발을 씻는다.’라는 탁영(濯纓)의 의미를 되새길수록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사라진 인물이 아깝다. 하지만 교사들 희생이 학교와 학생을 살렸다고 생각하듯, 선비들 목숨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지 않았던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사뭇 다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불의에 끝까지 맞서지 못했던 지난날이 부끄럽다. 직장 걸고 나서기도 쉽지 않거늘 목숨 걸고 바른말하고 실천하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나처럼 힘없고 나약한 사람도 소신대로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좋지 않을까. 만나는 사람마다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불의도 비겁도 멀리 날려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