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 오미향 - 제15회 사계 김장생문학상 수필 당선작
엄마가 돌아가신 후 물건 정리를 했다. 부엌 곳곳에 소주병이 숨겨져 있었다. 싱크대 아랫단에서, 양주병과
포도주가 진열된 찬장 구석진 곳에서, 간장병과 식용유 사이에서도 초록색 병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기제사가 끝나고 시누이와 시고모님의 거침없는 입담이 지나간 후에 돌아서서 몰래 찾아들었을 눈물 한 방울 소주 한 모금. 서울에 있는 여대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장녀라 지방교대를 가야했던 큰 언니가 단식 투쟁을 할 때에도 모른 척 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큰 오빠를 해병대에 보내고 돌아섰을 때에도, 지방 고위공무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아버지가 당뇨합병증으로 거동을 못 하셨을 때에도 남몰래 찾아 들었을 소주 한 병.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도록 답답하고 체증이 내려가지 않았을 때 혼자 식구들의 눈을 피해 들이켰을 것이다. 소주는 우리 엄마의 눈물이었을까. 우리 엄마의 창문이었을까.
마음을 다잡고 싶을 땐 동네 커피숍으로 간다. 아직은 경제활동이 가능한 남편과 배움에 목줄이 걸려있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버린 오전 시간. 책 하나 달랑 옆구리에 끼고 일부러 골목길을 골라서 걷는다. 도시의 소음과 번잡함을 피해 동네 모퉁이에 자리 잡은 조그만 커피숍으로 간다. 교회가 동네 주민을 위해 제공한 공간이다. 젊은 애들처럼 노트북을 펼치고 집중하는 게 아니라 그냥 노트에 끄적댈 뿐이다. 가끔 산문 몇 단락도 나오고 시 구절이 머릿속에 맴돌 때 얼른 적어놓는다.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창이 넓은 커피숍에서의 커피 한 잔이다. 혼자 들이키다 정리 안 된 감정의 찌꺼기들을 소각하고 싶을 때 창이 넓은 카페로 간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을 시킨다. 다소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시큼 씁쓰레한 아메리카노 향이 번질 때, 한 모금의 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갈 때가 누군가의 아내도 엄마도 아닌 나 자신과의 만나는 시간이다. 상대방의 상황을 배려도 안 하고 자기 도취에 빠져 지치도록 자식자랑을 해대는 지인들과의 의미 없는 모임이 계속 될 때에도. 허전함이 가슴 가득 차 있을 때. 남편과 시댁의 재력을 늘어놓는 여대 동창을 만난 후에도 혼자 커피를 마신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흘러나오는 물을 주체할 수 없을 때 커피의 그윽한 향이 내 안으로 걸어 들어 왔다. 살아야 해, 버텨내야 해, 이 세상이 나의 것이 될 때까지 비루한 삶을 이어가야 해. 세상과 만나고 싶을 때, 나의 창문은 커피 한 잔이다.
오늘도 아들은 칭얼댄다. 공부는 해서 뭐하냐고.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매일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야동을 당당하게 보는 이유는 뭘까. 세상과 등지고 싶은 마음, 기존 질서에 대항하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나 남들이 다할 때 나만 안 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가. 나만 소외되고 후회할 일만 남을 뿐이라고 열심히 얘기 해봐도 아들은 들을 귀가 없나 보다. 자아로 가득 차고 음악의 세계는 한없이 풍요로워서 세상의 일은 남루하고 폼이 안 날 것이다. 각이 안 잡힌 후줄근한 상자일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세상과 만나는 창은 음악이다. 그애가 불러주는 발라드는 가끔 나를 양탄자를 타고 동화의 세계로 들어가게 했다. 그가 켜는 바이올린의 현은 너무나 감미로웠다. 'G 선상의 아리아'는 성모마리아의 눈물과 기도가 잔잔히 그려지곤 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연주하던 사계四季는 계절의 변화를 온 감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공부의 끈을 놓지 말라는 꼰대 같은 잔소리를 또 뱉는다.
살면서 이사를 몇 번 했다. 그때마다 집의 기준은 창이 넓어야 하는 것이다. 남쪽으로 향해있고 마루 끝에서 끝까지 유리로 한 면을 완벽하게 도배해야 하는 게 나의 선택 기준이다. 그 창을 통해 들숨 날숨을 쉬었다. 시아버님이 제사를 강요하고 관혼상제에 목숨 걸었을 때는 그 창을 통해 바깥의 온도를 느꼈다. 바람이 동쪽으로 불면 동쪽을 향해 돌아누웠고 서풍일 때는 숨을 골랐다. 석양 무렵의 해는 내 안의 뜨거움을 왈칵 쏟아냈다. 초경을 치르는 아이마냥 준비도 없이 그 강렬하고 혼탁한 붉음에 내 마음도 불이 붙듯 붉어져 버렸다. 내가 걸으면 내 그림자가 창에 어른거렸다. 길지도 짧지도 않음이 딱 표준이다. 그 중간지점이 표준으로 살기를 강요당했고 스스로 그렇게 중간층이라 여기며 지내왔다. 누가 만든 중간이고 중산층이었을까. 바보스럽게도 가운데쯤 어정쩡하게 서 있음 양쪽 극한대로의 바람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소리쳐 외치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렇게 혼자 창을 통해 울고 웃고 보낸 시간이 한 시절이었다.
나는 언제나 섬이었다. 누구와 함께 있어도 고립 무원한 하나의 섬이었다. 그 섬에서 벗어나고자 책을 읽었고 글을 끄적댔다. 세상과 소통하고 싶을 때에는 유리로 만든 창을 열고 숨을 쉬었다. 숨이 약간 찰 정도의 언덕과 계단을 걸으며 찾아든 언덕배기의 17층 아파트는 나를 둘러싼 섬이다. 그 섬 안에서 가족을 위해 밥을 지었고 공간이 빌 무렵에는 책을 펼쳐 상상의 섬으로 들어가곤 했다. 바깥의 소리는 파도와 같아서 예고도 없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다가도 어느새인가 빠져나갔다. 고민과 고통이 뭉쳐진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는 항상 내 곁에 와 자잘자잘 머물렀으나 달이 뜨고 조수간만의 차가 줄어들면서 조금씩 사라지곤 했다.
나만의 섬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창을 통해 세상과 주고받은 대화는 이제 내 곁에 자리 잡았다. 대화는 생각을 쌓았고 그 더미는 영혼의 양식을 주었다. 시간의 줄기 속에서 돌고 돌아 어렵게 내 옆에 앉은 글쓰기의 매력을 한층 더 높여보고 싶다. 자석의 양극처럼 철버덕 끌어안아 자근자근 글을 써보련다. 나지막이 열리는 창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코끝에 와 닿는다. 이 시간 이 공기와 햇살을 나는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