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였던 것을
이희숙
『재미수필』 제27집 테마 수필은 ‘나의 띠’라고 했다. 흔한 이야기가 될까 싶어 다른 주제를 찾다가, 나를 비추어 볼 기회가 될 것 같아 생각을 쏟아붓기로 했다. 자판기 위에서 춤추는 내 손을 발견했다.
나는 1954년 갑오년(甲午年), 청말(靑馬) 해에 태어났다. 한자 문화권에서 시간, 방위, 연도, 달을 나타낼 때 십이지, 십이지간을 사용했다. ‘십이지(十二支)’는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의 동물을 상징하는 열두 가지로 구성되었다. 즉 ‘십이지’에 의해 구분된 시간 간격이나 그에 따른 관계를 의미한다. 이는 인간과 우주의 조화, 만물의 흐름을 알아보려는 데서 유래했다. 말띠는 십이간지 중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띠다.
1954년 갑오년 특징을 글자에 숨겨진 의미로 찾아보았다. 갑(甲)과 오(午)가 결합한 해다. ‘갑(甲)’은 천간의 첫 번째 글자로, 나무(木)에 해당하며 새싹이 돋아나는 시작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오(午)’는 말(馬)을 뜻하며 청말, 푸른 말의 해다. 여기서 파란 색상은 신뢰, 젊음, 희망을 상징한다. 이에 갑오년생의 성격은 대체로 진취적이고 독립심이 강하며, 창의력이 뛰어난 성향을 가진다고 한다. 강한 추진력과 리더십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일까? 현 문인협회에 앞장서 일하는 동갑내기 문우가 많다.
말의 성격과 특성을 반영하여 말 해에 태어난 사람의 개성을 가늠해본다. 말은 빠르고 힘찬 동물로, 동양 철학에서 말띠 사람은 대체로 에너지 넘치고 활동적인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옛 어른에겐 여자가 팔자가 드세다며 환영받지 못했다. 활동적인 여자 역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는가. 그 덕에 전문적인 나의 분야에서 반평생을 일 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관계 속에서 위로와 힘을 얻고 살아있는 이유를 찾기도 한다. 그리 사교적이지 않아도 친화력이 좋아 사람들과 쉽게 어울린다. 어느 사람이든 그만이 가진 장점이 있다는 걸 발견하기에 배우는 점이 크다. 그 때문에 혼자가 아닌 대가족 틈에서 많은 교인, 학부모들과 한데 섞여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많은 사람을 대접한 후에 얻는 기쁨이 무엇보다 더 크다고 할까.
또한 자유로움을 추구하여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선호하며 남을 이끄는 경향이 있다. 오 남매 중 맏딸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집 안에선 숙제, 독서, 일기지도, 밖으론 들이나 바닷가로 나들이, 작은 머리를 굴려 계획하고 주도하며 왕초 노릇을 했다. 부모님이 안 계실 땐 내가 상황을 판단해야 했으므로 결정을 내리는 능력이 길러졌나 보다. 리더십이 자라나 초등학교 시절엔 학급 반장으로 개구쟁이 남자애도 설득해 청소시키는 당찬 아이로 성장했다.
말은 강인함과 도전정신을 상징한다. 나 역시 새로운 도전과 많은 변화를 예견했을까?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서울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렀다. 홀로 서울 할머니 집에서 유학 생활이 시작됐다. 사투리 쓰는 시골 아이가 두려움을 떨쳐내는 경험을 했다. 도전적인 삶을 즐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기에 태평양을 건너 이국땅에서 맨손으로 어린이학교를 설립하는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밀고 나갔는지 모르겠다. 법적 지식과 물질이 준비되지 않은 채로 시청, 소방서, 캘리포니아 주 인가를 받기 위해 그저 열정을 쏟았다. 알지 못해 겪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끝내는 이루었고, 30년 동안 다민족 학교를 운영하며 인재들을 배출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내 신앙이라고 믿으면서.
시작하는 시기가 있으면 거두고 정리하는 계절이 있듯이 은퇴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세월에 깎여 모서리가 무뎌지고, 당찼던 의욕과 에너지가 쇠퇴해 무기력해졌다. 그동안 내가 과연 푸른 말이었을까? 착각이지 않았나? 체구가 작고 다리도 짧은 당나귀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아니 처음부터 나귀 새끼였을 게다. 베다니에 묶여 있던 어린 당나귀였던걸 어쩌겠는가. 자신보다 더 무거운 짐을 싣고 비탈진 언덕길을 오르며 오직 참고 견디어 왔다. 스스로 채찍질하며 잰걸음으로 바지런히 걸어야 했다.
다행히 귀가 길어서 멀리 동물 발걸음이나 사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주인이 쓰신다는 말에 이끄는 고삐를 따라나섰다. 주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 그 소리에 순종할 수 있었고, 길을 잃지 않고 곧은 길로 나갈 수 있었다. 쓰임 받는다는 기쁨으로 만족하며 임했다. 오직 낮은 자세로 온몸과 마음을 드리고자 했을 뿐이다.
이제 은퇴 후 허전할 것 같던 나에게 마지막 사명이 주어지지 않았는가. 가족의 건강을 돌보며 문인협회를 위한 재능 기부,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해 글쓰기에 매진한다.
오늘도 힘겨운 짐을 마다치 않고 걸어가고 있는 작은 당나귀가 보인다.
(원고지 13매)
강인함과 도전 정신으로 힘차게 달려왔고 '오늘도 힘겨운 짐을 마다치 않고 걸어가고 있는 작은 당나귀'
그 선한 영향력이 끼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