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의 본질과 문학적 형상화 / 엄현옥
문학 작품 속에서 형상화는 작가의 개성과 차별성을 드러내는 창조적 행위다. 한 편의 수필에는 작가의 진솔한 모습이 투영되기 마련이나, 여과 없는 솔직한 모습만으로 창작에 의존한다면 문학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없다. 작가의 영혼이 스며들지 않은 경험의 나열은 문학이라 할 수 없으며, 삶을 바탕으로 한 작가만의 해석이 담겨있어야 한다. 나의 개별적 체험은 기존의 그것들과 다른, 나만의 언어로 표현될 때 비로소 생명을 얻게 된다. 나의 경험이 개인적인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글감의 본질을 해석하는 형상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아가 타자의 공감으로 확산되고 새로운 작품으로 재생산된다. 수필이 문학적 형상화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형상화와 대립되는 의미인 교술적 측면이 공존한다. 따라서 작가의 교술과 구체적 형상화 간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
문학은 의식의 세계이므로, 현실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실제의 구체적 사물의 형상과는 같을 수 없다. 작가 개인의 이야기만으로는 문학이 성립될 수 없으며, 작품 속의 창조적 재현은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 입체적으로 구현하느냐가 관건이다. 작은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작가의 체험은 독자에게 호소력을 갖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를 지닐 때 문학으로 기능한다.
여기에서는 《수필과 비평》 11월 호에 수록된 작품 중, 개인적인 관점에서 시작된 주제가 어떤 방식으로 보편적인 차원으로 나아가 문학적 형상화에 도달하는지 살펴보았다. 거미의 생태를 통해 삶의 실존을 천착하고(함무성의 〈거미〉), 고사리에서 어머니의 삶(진해자의 〈고사리순〉)을 불러온다. 장거리 달리기를 인생에 비유하며,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아 고통의 깊이에 도달한다(장미숙의 〈극한을 향하여〉). 항공기의 비상구 옆 좌석에서 삶의 비상구로 사유를 확산시키는가 하면(허혜연의 〈내 안에 비상구〉), 사소한 방심으로 인해 얻은 교훈(송복련의 〈방심〉)에 이르기까지, 작가 개인의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끌어올린 수필의 그물이 묵직하다.
-함무성의 〈거미〉
거미는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등장한다. 특유한 절지동물인 거미의 생존방식은 거미줄로 곤충을 포획하는 비 호감의 전형이다. 작품 〈거미〉는 거미라는 대상에 대해 작가 자신의 명확한 판단을 유보하고 서두에서는 거미의 모습과 생태적 특성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거미에 대한 주관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제시한다. 거미라는 대상에 담긴 메시지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다. 작가의 집 뜰에서 발견한 거미의 생태 묘사는 정원 곳곳에 부옇게 쳐놓은 촘촘한 거미줄에서 시작하여 덫으로 작용하는 거미줄의 부정적인 묘사에 이른다.
거미줄은 공학적이다. 설계도 섬세하고, 재질은 가볍고 질기며 끈적인다. 그 끈적임은 가로줄에만 있고 세로줄에는 없다하니, 여덟 개의 다리로 더듬어 세로줄로만 다니는 거미는 제 몸은 절대 줄에 걸리지 않는다. 파리나 나비, 벌들에게만 ‘죽음의 덫’이다.
거미는 생존방식도 독특하다. 제 집의 한가운데 버티고 앉아 진동을 전달하는 경로인 방사형 바퀴살위에 여덟 개의 다리를 펼쳐서 살짝 올려놓고, 몸부림치는 먹잇감이 어느 부분에 붙었는지 알아낸다고 한다. 먹잇감의 위치가 확인되면 세로줄만 딛고 다가가서 실로 돌돌 말아 질식시킨 후 진액을 빨아먹는다. 어느 곤충들에게는 거미줄이 죽음의 덫이지만, 거미 자신에게는 절명을 넘어서는 최선의 전략일 수밖에 없다.
-함무성의 〈거미〉에서
정원에서 관찰한 거미줄과 거미에 대한 시점은 작가의 일터로 이동한다. 불경기라지만 출근을 서두르고, 어항의 물고기에게 먹이를 준다. 이어서 연이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한다. 모아놓은 폐지를 전달하기 위한 자신만의 루틴이다. 그녀와의 인연은 십여 년을 넘어섰다. 연이 아주머니는, 병중의 남편을 대신해 허약한 몸으로 거리에 나온 가장家長이다. 아주머니와 관련된 일화와 관찰, 경험은 거미와 그녀와의 동질성을 향해 나아간다. 먹잇감의 포획에 매달리는 거미의 생태적 특성과, 최소한의 연명을 위한 아주머니의 폐지 줍기는 독창적인 사유의 내재적 동기로 작용한다. 거미에 대한 은유적 표현은 함무성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 방법에 의해 다르게 표현되고 해석된다.
거미에게 있어 거미줄은 생존을 위한 진지한 사고의 도구이며, 거미줄을 조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정신도 함께 조율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보기에 한낱 미물도 이토록 진지하다. 생명가진 것들의 순환에서 삶의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중략)
그녀의 동선마다 거미줄 같은 삶의 통로가 보이는 듯하다. 나는 그녀를 ‘천사거미’라고 별명을 붙였다. 아픈 남편은 그녀 삶의 원동력이고, 걷고 또 걷는 일는 그의 몸과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주는 도구이다. 그녀는 꿋꿋이 제 삶을 가꾸는 거미를 닮았다.
-함무성의 〈거미〉에서
작가는 힘에 부쳐 골판지를 아기처럼 업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리어카를 끄는 것이 아니라 리어커가 제 스스로 굴러가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삶의 주체로서의 개체가 아닌, 어쩔 수 없는 삶의 수레에 의해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실체를 본 것 일까. 바쁜 일거리가 없음에도 사무실을 비울 수 없어 출근하는 작가의 모습도 홀로 제 영역을 사수하려는 거미와 다르지 않음을 자각한다.
〈거미〉에서의 성찰적 시선은 자아를 타자적 자아로 인식하는 과정이며, 자아를 지각의 대상으로 전환하는 시선의 분리를 의미한다. 함무성은 성찰을 통해 ‘나’ 자신으로 함몰되지 않고 대상에 대한 거리를 확보한다. 거미-연이 아주머니-작가 자신의 삶은, 인과관계는 무관하나 병렬적 구성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자신만의 삶을 구축하기 위한 몸짓을 대변한다.
작가가 퇴근하여 서두에서 보았던 정원의 거미줄을 바라보니 무당거미가 망가진 거미줄을 분주히 보수하고 있다. 홀로였으나 당당한 무당거미의 모습에서 느슨한 인식의 줄을 팽팽히 당기는 결미는 대상과 사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작가의 관념과 정서를 구체적 형상을 통해 표현하는 형상화에 도달한다. 정원의 거미와 연이 아주머니라는 구체적 인물의 삶, 나아가 작가 자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실존을 드러낸다.
- 진해자의 〈고사리순〉
수필 쓰기는 화제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해석을 통한 의미 부여는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도달한다. 〈고사리순〉에서 작가는 어머니의 삶에 대한 공경과 그리움을 절제한다. 어머니의 모성을 표출하기 위한 담백한 묘사는 격정을 덜어낸 작가의 미적 전략이다.
오름이 많은 제주에는 초봄에 비가 자주 내리면 겨우내 단단했던 땅을 뚫고 지천에서 고사리들이 올라온다. 고사리를 위해 하늘이 비를 뿌려주기라도 한다는 듯 고사리 장마라는 이름이 붙었다니, 그 해석이 일품이다. 중산간 마을을 지나던 작가는 고사리를 채취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어머니의 삶을 떠올린다. 그 시절의 어머니에게는 고사리가 생계수단이었다.
고사리를 한 짐 꺾은 어머니는 어둑어둑할 무렵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산과 들판을 헤매었으니 다리가 아프고, 고사리를 꺾을 때마다 허리를 굽혔으니 허리가 아프고, 먹을거리가 변변치 못하니 배가 고팠을 것이다. 하지만 지친 몸을 살필 새도 없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어렵게 채취한 고사리를 그대로 두면 상품이 안 된다며 곧바로 삶았다.
장작불을 붙이기 위해 작은 솔가지들을 먼저 태웠다. 그 위로 장작을 하나씩 집어넣는다. 장작은 너무 가까이 두어서도 안 되고 너무 떨어져 있어도 잘 붙지 않는다.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솔가지에 붙은 불이 장작에 옮겨 붙기를 기다려야 한다. 어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물이 빨리 끓어오르길 바라며 아궁이에 장작을 많이 집어넣었다. 잘 붙던 장작불이 점차 사그라들며 검은 연기만 가득 차오른다.
- 진해자의 〈고사리순〉에서
어머니의 노동은 고사리 채취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고사리를 삶아내기 위한 장작불의 점화 과정도 지난하다. 과욕은 점화를 더디게 할 뿐, 장작을 적당한 간격을 유지해야 불길로 옮겨 붙는다. 고사리는 자신의 몸을 굽힘으로써 그것을 얻을 수 있다. 허리를 한 번 굽힐 때 고사리 하나밖에 꺾을 수 없다는 점은 삶의 진리이자, 과욕을 버리고 순리에 따르라는 어머니의 교훈이다.
모성을 주제로 한 작품의 경우 어머니와의 에피소드를 나열하는데 머무르기 쉽다. 작가는 개인적인 서사를 제시하기 보다는 어머니의 노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공을 들인다. 〈고사리순〉에서는 이러한 표현 구조를 유지함으로써 객관성에 다가간다. 작가가 어머니의 삶을 고사리순으로 은유하고 집중한 것은 집요한 생명력과 가없는 모성 때문이다. 고사리를 끊어낸 뒤 며칠 후면 어느새 또 다시 줄기가 올라와 있다. 거듭 끊어도 되살아나며 고사리 장마철 내내 끊어내도 그렇게 살아간다.
작가는 어머니의 경험이 육화된 고사리라는 구체물을 내세워 어머니의 삶에 집중한다. 나아가 수많은 대상 가운데 선택적으로 고사리에 주목하여 어머니가 보낸 시간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하지만 마른 장작이라고 눈물이 없는 건 아니다.”라는 결미의 문장에서와 같이, 생소한 관념적 언어가 아닌 정서적 언어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표출한다. 고사리에 대한 객관적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벗어나 주관적인 인식을 지향한다.
- 허혜연의 〈내 안에 비상구〉
어떤 사물이나 사건이 수필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것이 작가의 일상적 맥락을 벗어나는 순간이다. 〈내 안에 비상구〉에서 허혜연은 안이한 사고를 버리고, 자신의 입장을 특별한 상황으로 상정하여 성찰한다. 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작가의 세계관과 부합하며, 보다 나은 삶과 세계를 구현하려는 의지의 산물이다. 수필을 통한 일상의 성찰은 그것이 나비의 소소한 날갯짓일지라도, 삶을 사는 방식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방식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리라.
작품의 서두는 지인과의 제주 여행에서, 먼저 돌아오게 된 작가가 항공표를 예매하는 장면이다. “비 오는 저녁, 나에게 엄청난 임무가 주어졌다.”라는 한 줄의 서두는 독자의 시선을 붙들기에 충분하다. 비상구 옆 좌석의 승객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업무는, 비상 시 탈출 업무를 보조하는 일이다.
① 탑승권 아래에는 ‘비상구 좌석배정 된 승객께서는 비상시에는 다른 승객의 신속한 탈출을 위하여 기내승무원을 도와주셔야 합니다.’라고 적혀있다.
② 예전에 어느 항공기가 불시착하는 사고가 있었다.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구조 헬기에 매달려 있던 모습을 뉴스 시간마다 반복해서 보여 주던 일이 생각난다. 헬기의 프로펠러 바람에 나부끼던 처절한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도 원피스를 입었다. 원피스의 초록 아메바 무늬가 왠지 거슬린다. 잘 입지도 않는 원피스를 오늘따라 괜히 입었다. 생떽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에서 주인공과 기관사가 불시착한 사막도 떠 올렸다.
③ 예전에 보았던 영화 ‘부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가 생각난다. 어둡고 칙칙한 영화였는데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음악만큼은 가슴이 저렸다. 멜로디를 떠 올리며 줄거리를 생각하려 애썼지만 어두운 거리를 헤매던 이들의 끝없는 방황과 유린당한 여주인공의 공허한 눈빛만 아련하다. 그들에게 절실한 건 새로운 삶을 이어갈 비상구가 아니었을까.
①의 문장에서 비행기 티켓 발급이라는 동일한 사건은, 좌석의 위치가 비상구 옆이라는 특수성에 따라 그 맥락이 달라지는 순간의 경험을 명백히 서술한다. 혹자는 비상구 옆 좌석의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설마 무슨 일이야 일어나겠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다른 좌석에 비해 비교적 넉넉한 앞 공간의 혜택을 누리며 다행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의식과 감정을 꿰뚫어보는 몰입도는 독자를 흡인한다.
②, ③의 문단에서 알 수 있듯이 수필이 작가 개인만의 성찰에 머무르지 않고 어떻게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내느냐 하는 문제는 작가의 표현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문장력이나 언어에 대한 인식 등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상상력은 작가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문학에 대한 이해, 세계관 등과 밀접하다. 〈내 안에 비상구〉에서 허혜연 작가의 상상력은 자신의 가치 있는 경험에 의한 상상력이 깊고 넓게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학인의 소명은 창의성과 상상력의 확장에 있다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일상의 우연한 체험을 기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에서 보편성을 추출해냈다.
우리는 가끔 길을 잃고 헤맨다. 비상구가 필요하다. 비상구는 많을수록 좋다. 나도 예기치 않은 일을 만나거나 관계에서 힘든 때는 비상구가 필요했다. 종교는 의지처이자 비상구다. 여행도 좋고 글쓰기나 영화, 음악 등의 예술이 주는 즐거움도 비상구가 되었다. 이 모든 걸 함께 누릴 마음 맞는 친구가 있을 때 금상첨화다.
- 허혜연의 〈내 안에 비상구〉에서
허혜연은 단순한 현상의 나열을 넘어 상상력의 발현에 의한 사건의 본질에 천착한다. 불안함 이륙했으나, 안전한 착륙에 이르기까지 동참한 독자도 비로소 안도한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미완의 여지는, 자신만의 삶의 비상구에 대한 소회로 마무리된다. 유사 시 승무원을 도와 승객을 안전하게 보호할 한시적 업무를 부여받은 작가는 승객의 신분이 아닌 불안감에 사로잡혀 무사 착륙만을 기원하는 입장이 되었다. 누군가는 무심코 넘길 수 있는 일이지만, 윤리적 자아가 강한 작가는 피할 수 없는 책임감에 사로잡힌다. 〈내 안에 비상구〉에서 불안감을 털어내지 못하고, 오래 전 항공기 불시착 사건으로 인한 피해 여성의 안타까운 구조 장면을 떠올린다. 나아가 생떽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와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로 확산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경험이 삶이고, 삶이 곧 문학’이라고 했다. 허혜연의 윤리적 태도와 진정성은,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으로 마침내 발견되고 주관적으로 해명된 실존에 다다른다.
- 장미숙의 〈극한을 향하여〉
달리기는 〈극한을 향하여〉를 관통하는 주요한 언어이며 기호다. 달리기 기능은 어느 한 순간 급격히 상승시킬 수 없으며,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점차 속도를 높여야 한다. 달리기 위한 동일한 움직임의 반복은, 심신의 활력을 주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작가는 동네를 뛰어다녔던 유년시절을 지나 초등학교 시절 단거리 선수 경험도 있었으나 그 정도에서 멈춘 적이 있다. 작가가 달리기에 본격적으로 도전한 것은 스스로 극한으로 내몰고 싶은 절박감에서다. 달리기는 힘이 들지만, 반복하게 되는 관성이 있다. 작가에게 달리기는 자신의 한계를 돌아보고 자신감을 집중적으로 불어넣는 심폐 소생이다.
호젓한 길에 서면 잠들어 있던 욕망이 불쑥 치솟았다.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고 싶은 종류의 것이었다. 삶이 소용돌이 속에 휘말릴 때는 더욱 그랬다. 그냥 두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절박함 속에서 달리기는 이어졌다. 없는 시간을 낱낱이 쪼개 산길을 걷고 달리게 된 이유였다. 어느 날 비가 몹시도 쏟아졌고 다음 날은 질척거리는 산길을 걷기가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평평한 길을 찾아 나섰다.
- 장미숙의 〈극한을 향하여〉에서
집 근처의 둘레길과 생태길로 이어지는 걷기의 여정에서, 뛰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도 달려보리라 작정한다. 장거리 달리기에 대한 부담도 있었으나,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화자를 추월하는 이들을 개의치 않으며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한계에 도전할 뿐이다.
문득 인생도 이렇게 천천히 꾸준하게 달렸으면 좋았을 걸 싶었다. 힘들다고 포기하거나 지레 피하지 않았더라면 현재의 삶이 안정된 궤도에 들어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는 일이란 일정한 페이스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오래달리기일지도 모른다. 장애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도 변수의 요인이다. 어떤 이는 보다 우월한 환경에서, 어떤 이는 열악한 상황에서 첫발을 뗀다. 옆에서 끌어주거나 힘을 북돋아 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홀로 꿋꿋이 구간 구간을 버텨야 하는 사람도 있다.
- 장미숙의 〈극한을 향하여〉에서
달리기와 인생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다. 애초부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아무리 뛰어난 사람일지라도 우승하기 어렵다. 삶의 달기기는 출발선이 다른 레이스이기에, 변수도 속출한다. 함께 달리며 서로 위로를 주고 받을 수 있다면, 삶의 여유가 있으련만, 조력자 없이 달려온 화자의 달리기는, 낯익은 감각과 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구축하려는 다짐이다. 나이도 잊은 채 장거리 레이스에 도전한 작가는, “바윗덩어리 같은 몸을 두 다리로 들어 올려 허공에 잠깐 세우는” 달리기가 지신의 삶에 찾아온 의미를 재발견한다. 이후에도 몇 번쯤 도전할지 모르지만, 자신의 삶을 어떤 모습으로 그릴지에 대한 진정성 있고 진중한 결미는 작가의 심중이 함축된 가볍지 않은 의미를 획득한다.
수필이 윤리적 성찰이나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만 무게를 둔다면 공감에 이르기 어려울 것이다. 어제보다 성장한 자신을 위해 다시 운동화 끈을 조이리라는 작가의 다짐은, 보편적 삶의 철학으로 육화되어 미적 울림과 공감에 이른다. 삶에서 늦은 일이란 없다. 작가의 신체도 상황을 인식하여 적응 중이다. 뒤늦게 도전한 달리기는 심신의 기능 개선 강화를 위해 뛰는 행위를 넘어 작가의 삶에 깃든 사유의 한 과정이며 삶의 방식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 송복련의 〈방심〉
방심放心은 익숙하고 사소하여 긴장을 놓아도 될 만한 상황을 전제한다. 작가가 다 내려온 줄 알았던 계단의 마지막을 놓쳐 몸이 나뒹군 것도 그 때문이다.
책을 발간한 작가는 마지막 교정지를 보낸 후에야 비로소 원고에서 해방되었다. 서둘러 책을 발송했으나 지인 몇 사람만 잘 받았다는 회신을 보내왔을 뿐이다. 책이 읽히지 않는 시대라지만 의외였다. 이유를 알고 나니 봉투에 인쇄된 작가 연락처가 잘못 기록된 것이다. 작가가 직접 연락을 받지 못한 데에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전화번호의 낯선 수신인은 밀려드는 전화와 책을 잘 받았노라는 감사 메시지에 시달렸으리라.
책을 엮는 일은 허공을 밀고 가는 호박순처럼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해 나가야 했다. 마지막 계단에서 한눈을 팔아 걸음을 놓쳤을 때처럼 처음과 마지막 사이, 그 틈새에 숨어 있던 방심으로 실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황스럽지만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실수였다. 묵묵부답인 휴대폰을 바라보았을 수신인들에게 부끄러워 내내 쓰라렸지만 그나마 얻은 것도 있었다.
고마운 사람들의 전화로 내가 넘어진 걸 깨닫게 되었고 내가 해야 할 부분을 바로 실행에 옮기는데 힘을 실어주었다. 허공에 맴돌고 있을 말들의 주인에게는 나의 마음을 전할 길 없지만 전화번호 숫자 하나 차이로 잘못 전달된 고마운 마음에 시달렸을 모르는 분에게 미안함을 전할 용기를 냈다. 낯선 수신인이 여러 번의 문자와 통화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전해들은 후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사과의 뜻으로 책을 드리고 싶다고 하니 보내달라고 주소를 전해왔다.
- 송복련의 〈방심〉에서
인간은 누구나 살면서 많은 일들을 겪는다. 문학 작품 속에서의 경험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관여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자신의 삶을 영위하며 순간순간 접하게 되는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것은 당사자의 사고에 의해 규명된다. 봉투에 인쇄된 전화번호를 끝까지 확인하지 못한 것은 방심이었다. 번거로웠을 사태 수습과정을 거친 작가가 느낀 홀가분함과 작가의 정서에 녹아든 체험인 작품의 주제가 독자를 환기해 준다.
작가는 단순히 멋진 어휘와 문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경험이 자신에게 들려주는 내밀한 소리에 귀 기울인다. 그것들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지만, 수필가는 그 내밀한 것들을 끄집어낸다. 작가의 주관적인 체험보다는 외부의 객관적인 사물이나 사건을 화제로 삼았을지라도, 수필은 작가의 주관적인 의미를 투여하는 방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삶의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으나, 작가는 그 속에서 삶에 대한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낸다. 위에서 살펴본 작품들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으로써의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대상의 본질과 독자의 공감을 찾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나아가 작가의 체험이 녹아든 작품의 주제로 독자의 상상력을 이끌어냈다. 수필의 주제는 이렇듯 우리 시대의 보편적 진실과, 진실의 영속성을 의식하고 문학적 형상화를 통한 대상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