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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수필과 비평' 하계세미나 문학 강연

 

수필 문학의 구심과 원심 /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인문대학장)    

 

 

1. 지적 충전과 정서적 위안의 가능성

 

최근 기후변화로 상징되는 지구촌 전체의 재난이 인류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바꾸어버리고 있다. 통째로 위기를 맞고 있는 주류적 삶의 방식에 대한 대안적 실천이 강력하게 요청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도 결코 작지 않다. 이러한 불안 심리에 예언적 지남(指南) 역할을 해주고 지적 충전과 정서적 위안을 선사해주는 분야가 바로 종교나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가운데서도 찬찬히 홀로 성찰할 수 있는 수필 혹은 산문은 어쩌면 근대문학의 총아인 소설보다 훨씬 더 독자들에게 충전과 위안을 줄 수 있을 가능성으로 충일하다. 그 점에서 수필은 미래문학으로서의 속성을 충분히 견지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수필 혹은 산문이 펼쳐갈 미학적 현재형과 가능성을 동시에 생각해보기로 한다.

 

 

2. 타자에 대한 사랑과 인류 보편의 언어

 

지역이나 문학단체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수필에 종사하는 인적 구성이 규모로나 역할로나 퍽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문학을 대표하는 장르는 언제나 시, 소설, 희곡이었고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비평이 창작과는 다른 부가적 위상을 얻고 있었다. 말하자면 수필은 순수 창작으로 생각하지 않고 본격 장르에서 배제하는 관행이 있었던 셈이다. 사실 수필은 시, 소설처럼 순수한 의미에서의 허구물이 아니다. 작가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두는 경우가 많고, 특유의 고백적 성격 때문에 사인성(私人性)을 크게 벗어나기 어렵기도 했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은 시인,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에 비해 수필가를 아마추어리즘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수필 분야의 도약과 성장은 괄목할 만하다. 그것은 먼저 인적 저변의 확대에서 찾을 수 있다. 수필 관련 매체나 등용문 제도의 활성화는 오래전 문청(文靑) 시절을 겪은 중장년 그룹을 수필로 초대하는 최적의 흡인력을 마련해주었다. 이 연배 사람들은 시나 소설보다는 좀 더 자유로운 수필에 더 깊은 친화력과 선호도를 가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의 미학적 속성은 무엇일까. 그 하나가 진솔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의 욕망에 있다면, 다른 하나는 어떤 주제나 현상에 대해 독자에게 말을 건네려는 계몽의 의지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눈과 귀를 울리는 명작 수필은 한결같이 이러한 진솔함과 소통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때 고백과 소통의 내용이 타자의 삶에 충격과 변형을 주려는 계몽 의지의 소산임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수필을 쓰는 작가는 자신의 주변에서 친숙하게 경험하는 일상에 언어적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다. 일상에서 마주치는 순간적 감동과 깨달음을 평이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문장으로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수필이 아무나 쓸 수 있는 손쉬운 양식은 아니다. 그 안에는 인생에 대한 예리한 비평적 감각도 있어야 하고,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적정한 해석 과정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밑줄을 긋고 싶을 정도로 문장의 매혹이 있어야 한다. 헝가리 출신의 비평가 게오르크 루카치는 수필을 두고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인간 영혼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음의 미세한 풍경을 그리는 양식이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수필이 이러한 은밀하고 신비로운 운명에 대해 균형감 있게 탐구한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우리는 분노가 일상이 돼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하다. 이때 우리는 잘 쓰인 수필을 통해 타인의 경험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우리를 감싸고 있는 이러한 분노의 일상화 분위기를 부드럽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시절의 피천득, 법정, 장영희 등이 이러한 역할을 감당했던 수필가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그 위상과 영향력을 높이고 있는 수필은 삶에 대한 그리움과 긍정의 미학으로 우리를 위안하고 치유하고 나아가 인간 존재의 보편적 감동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타자에 대한 사랑과 인류 보편의 언어를 추구해가는 것을 더한다면, 수필은 매우 충실하고도 고유한 문학 중심부의 역할을 새롭게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3. 자연과 인생의 관조, 새로운 삶의 지향 제시

 

해방후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문학교육’은 매우 중요한 국민국가 구성원 만들기에 기여하게 된다. 이때 모어(母語)를 미학적으로 세련화하고 현대인의 일상을 잘 묘사한 수필 작품이 선호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특별히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수필들이 교과서에 집중 수록된 것은 해방후 씌어진 새로운 작품의 성층이 두텁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문학사에서 수필의 전통이 연면하게 이어져왔음을 알리려는 계몽 기획의 일환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1970년대까지 이어져갔다.

 

우리의 기억 속에 1970~80년대 교과서 소재 수필은 피천득의 「수필」에 나오는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라는 비유적 명명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래서인지 중후한 인문적 에세이보다는 경험적 구체성이 녹아 있는 미셀러니 류가 압도적으로 실렸다. 그 애틋한 목록을 열거해보자. 지금은 교과서에서 완전하게 사라진 작품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양주동의 「몇 어찌」와 「면학의 서」와 「질화로」, 김진섭의 「백설부」, 정비석의 「산정무한」, 나도향의 「그믐달」, 최남선의 「심춘순례」, 피천득의 「인연」, 이양하의 「경이 건이」와 「나무」, 이희승의 「딸깍발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 유달영의 「슬픔에 관하여」, 이상의 「권태」와 「산촌여정」, 윤오영의 「마고자」, 이하윤의 「메모광」, 전숙희의 「설」, 한흑구의 「보리」 등이 기억에 남는다. 작가와 제목만 열거해도 그 자체로 고색창연하기 그지없다.

 

그러다가 1990년대 이후에는 법정 수필이 많이 실렸고 전혜린, 박완서, 이어령, 장영희 등이 각광을 받았다. 그리고 광범위한 제재 확장에 따라 월북작가들 작품이 수록 범주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월북작가들의 전면적 해금에 따라 수필 분야에서는 이태준, 김용준 등 소위 문장파(文章派)들의 고담한 수필이 즐겨 수록되었다. 김기림의 짧은 글 「길」도 선호되었다. 또한 시인이나 작가들이 쓴 수필들도 적지 않게 실렸는데, 박두진, 조지훈, 이청준, 전상국 등의 수필이 실리기도 했고, 예외적으로는 해외 수필이 번역되어 다수 실리기도 했다.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비롯하여 가드너, 임어당 등이 주요 고객이었다가, 최근에는 나쓰메 소세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미셸 투르니에, 움베르토 에코 등의 작품도 들어와 있다. 지금도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로 시작되는 슈낙의 작품은 우울함과 비애의 선명한 감각으로 곧잘 회상되곤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고전 작품들 중에 교술 양식에 포함되는 작품들도 수필에 준하여 많이 소개되었는데 박지원의 「물」이라는 작품을 배운 기억이 또렷하다.

 

수필은 문학 갈래 중에서도 독특한 성질을 지니는 문학이다. 앞에서도 강조하였듯이 시나 소설이나 희곡같이 창작 문학에 가까우면서도 허구적 형상화에 의한 순수 창작이 아니고, 비평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지적 통찰과 이성적 판단에 의해 평가에 이르는 순수 비평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여 그 형상과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도 하고, 날카로운 지성으로 새로운 삶의 지향을 명쾌하게 제시하기도 한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이러한 수필의 속성을 경험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나, 요즘 점점 수필 수록 빈도가 낮아지는 것 같아 안타까움도 더해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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