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시학 제15호에서

 

디아스포라 시학: 상처와 결핍, 시의 언어

강수영 (문학평론가)

 

1. 디아스포라, 기표의 정처 없는 여정

 

디아스포라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30년전 만 해도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는 생소했다. 21세기가 시작되어 20여년이 흐른 현재 디아스포라는 지구화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경험을 담아내는 개념 중 하나가 되었다. 재일한국인 작가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를 ‘근대이후’를 살아갈 인간의 존재형식의 구현이라고 한다. 지구 상 더 많은 사람들에게 디아스포라적 경험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대착오적 질문이 새삼 다시 들렸다. 2023년 여름 엘에이 한인 타운에서 개최된 한국번역문학원 주최 미주권역 디아스포라 한글문학 교류행사 <경계를 너머, 한글문학>에서 였다. 참석자들 사이에서 ‘디아스포라’라는 기표는 어떤 고정된 기의로 수렴되지 못한 채 부유했다. 누군가에게 디아스포라는 정처 없는 우리네 삶을 가리켰고, 다른 누군가에겐 낯선 타자를 위한 기표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지구화시대의 권력 중심에 있는 미국, 그 중에서도 엘에이 한복판에 모인 북미지역 한인들에게 정치경제적 난민과 박탈의 역사를 담은 ‘디아스포라’라는 기표는 달갑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런 불확정적인 기표의 여정은 디아스포라의 숙명이다. 디아스포라 예술이론가 미즈로프에 따르면 디아스포라는 재현불가능하다.그렇다면 디아스포라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과녁을 벗어난 화살 같다. ‘무엇’에의 집착은 기표의 방랑을 한 지점에 고정시키려는 욕망이다. 어원적으로 ‘산포’를 의미하는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20세기 후반을 지나 2020년대에 이르기까지 학술문화계에서 겪어온 변천과정 그 자체가 디아스포라 경험에 견줄 만하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왜’ ‘누구’의 질문으로 바꾸어 물어야 한다.

디아스포라 경험이 재현불가능 하지만, 그렇다고 역사현실의 구체성이 부재하지는 않다. 21세기 지구화시대의 디아스포라는 이주와 난민, 유랑과 유배의 경험을 아우른다. 이 정처 없는 이산에 각인된 상처와 결핍의 경험은 현대인의 보편적 정서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한인이민주체들 역시 디아스포라에 속한다.이민주체 자신이 난민의 귀양과 박탈 경험과 무관하다고 아무리 선을 긋는다고 해도, 이민경험에 깊숙이 자리란 상처와 결핍을 지워버릴 순 없다. 디아스포라의 역사적 구체성은 따라서 우리 각자 뿌리뽑혀진 경험을 의미한다. 태어난 곳에서의 박탈은 자의냐 타의냐의 구분을 넘어선다. 탈향은 근본적으로 주체의 외상이다. 낯선 곳으로의 이주는 언제나 결핍의 언어로 밖에 재현될 수 없다.

이 글은 재현불가능한 디아스포라를 시적 언어와 구조로 언어화하려는 시인들의 노력을 ‘디아스포라 시학’이라고 이론화하려는 필자의 기획연구 일부이다. 그 첫 시도로서 지금까지 이 시학의 가장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두 시인, 재미한인시인 배 정웅과 미국 주류 문단의 시인 션 힐을 읽으면서 디아스포라시학이 어떤 것인지 희미하게나마 윤곽을 그려보려고 한다.

 

 

2. 방랑생활의 끝에 “오래도록 떠돌다가” : 시인 배정웅

 

고 배정웅시인은 출발점에서부터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위치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바람’으로, 자신의 이민을 ‘방랑생활’로 일컬었다. 뿌리 뽑힌 채 떠도는 생활의 정착지는 남 캘리포니아의 ‘빈 방’이었지만(「쓸쓸히 빈방을 지키는 이에게」), 그의 시에는 남모르는 울음이 담겨있다.

 

새들은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

살육의 도시 리마에서 울지 않았다.

우리처럼 보따리 싸들고

우리처럼 남부 여대로

안데스의 강추위를 건너고

따그나의 국경을 건너고

차라리 적막한 땅,

아라까에서 울음 울었다.

아끼끼 어분 공장위에서 울음 울었다.

한 해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불모의 땅,

떠나온 뻬루와 뭐 다를 바 있으랴.

눈물 흘려보았자 사막의 땅 어디에 흔적이나 남으랴마는,

새들은 화약냄새 그득한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 안으로 삼켰던 울음

차라리 적막한 땅 바다위를 맴돌며

남몰래 남몰래 울음 울었다.

망명객처럼 까스떼자뇨로 울음 울었다.

--「새들은 뻬루에서 울지 않았다」 전문

 

이 시는 1999년 출간된 동명 시집 표제작이다. 시인은 새들의 울음을 이민자 혹은 망명객의 통곡에 비유한다. 시에서 새들은 단순한 자연의 생물이 아니라 뻬루의 참혹한 현실을 목격한 증인이다. 자신의 모국에서 일어난 역사적 비극을 목도한 새들이 망명객이 되어 목 놓아 운다는 내용의 이 시는 역사적 상처와 결핍을 비극적 서정을 통해 전달해 준다. “우리처럼 보따리 싸들고/ 우리처럼 남부 여대로” 새들이 산을 넘고 국경을 건너는 대목에서 “우리처럼”은 한인이민자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시의 새처럼 어떤 비극적 현실 (그 현실은 “화약 냄새”가 나는 것이다)을 목도하고 보따리 싸들고 그곳을 떠나 적막하고 불모의 땅, 타지로 가서 남몰래 망명객처럼, 그곳의 언어로 울 수밖에 없다.

배 정웅의 시에는 풍부한 ‘에스노그라피적’(ethnographical) 어휘와 소재들이 가득하다. ‘에우칼립또’(유칼립투스), ‘쭈루삐’(바퀴벌레) 등 원어를 그대로 표기하고, 반도네온 등 자신이 잠시 머문 곳들의 문화를 소재로 삼는다. 이런 남아메리카의 문화와 역사, 언어를 담는 에스노그라피는 언제나 디아스포라적 감성, 즉 떠나온 땅에 대한 그리움, 향수와 민속설화라는 여과지를 통해 재구성된다. 모국에 대한 향수를 천편일률적으로 토로하는 ‘동포시’와 달리 그의 시는 칠레,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등지의 문물과 자연환경을 전경에 두고 한국적 정서와 문화로 그 의미를 견인해내는데, 이런 방식은 어쩌면 한인디아스포라문학이 따라가도 좋은 방향인지도 모르겠다.

가령「마두금 소고」를 보자. 마두금은 몽골 사막에 사는 사람들이 낙타나 말의 뼈로 만든 피리이다. 이 피리의 소리는 낙타새끼가 어미를 찾는 소리와 같아서 연주소리를 들으면 낙타도 눈물을 흘린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는 향수의 정조를 불러일으키면서 결국 시인은 마두금 소리처럼 “생의 목울대 깊이 쌓인 슬픔 퍼내어/ 사막의 마른 알갱이 단 몇이라도 적시어/ 춤추게 하였으면”하고 불가능한 소망을 드러낸다. 이 시는 몽골사막의 유목민과 낙타까지 포함한 인류전체의 고향 상실성을 시적 절창으로 뽑아내고 싶은 희구를 담고 있다. 디아스포라의 울음은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즉 목숨을 걸고 몸을 부수어가며 내는 어떤 동물적 울음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인간적 차원을 넘어서는 소리를 시로 담아낼 수 없을지 모르지만 시인은 이미 불가능성을 인지하면서도, 그리고 시와 결별해야 “자신의 불행이 끝날” 것을 알면서도 “시를 쓰는 한 인간의 눈물을 엿보려고/ 전인미답의 모래 위에 발자국 찍으며/ 낯선 낙타들도 여럿 달려”(「마두금소고」) 올 때 까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숙명을 산다.

또 한 시에서는 배정응은 “술집 바람벽마다 ‘무의 가면’이 그려졌다”라고 쓴다(「무의 가면이 그려졌다」). 떠나온 시대의 문학풍경을 배경으로 그의 시를 이끄는 영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람’ 위에 쓴 시라는 이미지에서 방랑, 혹은 어디에도 정박하지 않는 노마드적 삶의 방식이 시의 물질적 토대임을 명시한다. 특히 시인 천 상병과 김 종삼의 “비정상적인 걸음걸이”에서 시란 꼿꼿이 서서 당당히 걸어가는 것과는 달리 “세상을 절룩”거리며 가는 것이라는 시인의 인식도 드러난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에겐 제2의 고향이 된 ‘아메리카’를 절룩거리면서 사과 속에 든 벌레처럼 열차의 몸속을 파고드는 벌레가 되어 울거나(「사과벌레」) 안데스 산간마을에선 나무에 목을 맨 귀신을 본 (「안데스 산간마을의 봄」) 기억으로 ‘텅 빈’ 방에서 “남에게 보여지지 않는/ 투명한 눈물의 방울들을/ 은밀히 간직한 채 살고”있다. “태평양 너머 누구던가/ 나처럼 쓸쓸히 빈방을 지키는 이에게/어떤 상징이나 은유도 없는/그런 편지를 쓰고 있다” (「쓸쓸히 빈 방을 지키는 이에게」)는 대목에 이르면 자신의 방랑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아메리카’를 호명하는 그의 시는 아무런 비유를 담지 않은 담백하고 ‘순수한’ 편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적 과제, 즉 떠나온 땅의 쓸쓸한 존재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남미통신」연작과 「신 남미통신」연작으로 이어지는 시들로 형상화된다. 시인은 삐이라 강가에서 “에스빠뇰어”로 울고 있는 개구리소리를 들으며 기억 속 어린 시절의 개구리 소리와 젊은 시절 베트남 참전 당시의 개구리 소리를 떠올린다(「남미통신 1」). 이 통역 불가능한 이방의 말은 “내 자슥아” 하고 부르는 어머니의 사투리(「남미통신 4」)와 공존한다. 시인은 남아메리카에 와서 처음엔 그저 일제 재봉틀 소리와 남녀가 안고 도는 탱고선율 밖에 못 듣다가 차차 끌려간 아들을 내 놓으라는 아르헨티나 어머니들의 울부짖음을 마침내 들을 수 있게 되어 이국 모성의 통곡을 자신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조선치마 앞자락 눈물 자국으로(「남미통신 11」) 번역해 내기에 이른다. 시인은 계속해서 땀 뻘뻘 흘리는 크리스마스(「남미통신 15」), 볼리비아의 카니발(「남미통신 47」), 식모살이 갔다 주인에게 겁탈당한 14살 소녀의 아버지가 술에 취에 길에 누워 통곡하는 장면(「남미통신 26」), 잘 먹지 못해도 무럭무럭 자라는 볼리비아 인디오족 소년들(「남미통신 62」)을 편지지에 태워 태평양너머로 띄운다.

또 이런 편지는 어떤가? “지 에미가/ 문둥이 인줄도 무심코 잊은 대 여섯 살/ 머슴 아이 하나 작은 남근을 만지작거리며/ 천방지축으로 뛰놀고 있었다. 천상의 그지없이/ 성스러운 햇빛 한 조각 빤짝빤짝/ 뛰놀고 있었다”(「신 남미통신 2- 서양문둥이」). 이 시의 부제는 “서양문둥이”이다. 난생처음 본 서양문둥이가 컬러사진에 “해수스 밴디가”, 스페인어로 축복을 뜻하는 말을 적어 걸고 있다. 그 뿐인가. 원주민으로부터 구입한 산돼지쓸개를 되팔아 딸의 신발을 사는 시인은 부끄러움과 상처 입은 마음에 쩔쩔매고(「신 남미통신 3」), 멕시코에서 “전생의 누부”를 만나 그녀의 아이들이 시인을 매부, 아재로 부르는 촌수 헷갈리는 촌극을 벌이기도 한다(「신 남미통신 4」).

이 일련의 남미통신 말미는 어머니, 모국, 모국어에 대한 갈망과 회귀본능으로 귀결된다. “걸어왔던 첩첩 외로운 길”이 아니라 “죽어서라도 되돌아가야 하는/ 그 멀고먼 험한 여정에 대한 은밀한 전언”을 “잉카잔도의 험한 길을 거쳐” 온 페루 산 큰 게를 삶다가 사색하는(「페루 산 큰 게」) 시인은 “마중물”이 되어 보려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펌프질을 할 때 붓곤 했던 마중물을 “펌프의 자궁 속”에 들이붓는다고 묘사하고, 어머니의 사투리 어투를 통해서 “미물일망정/ 이렇듯 내가 먼저 저를 부르고 저를 반길 양이면/ 저 보이지 않는땅밑 지심 아득한 곳에서부터/ 찰랑찰랑 몸 흔들고 춤추듯 쏟아진다” 고 적는다(「마중물」). ‘내가 먼저 부르는’ 마중물이 되었던 적이 있냐고 스스로에게 반문할 때 마중물이 되고자하는 시인의 소망과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무엇을 ‘마중’할 것인가. ‘고향’ 즉 모태이자 기원이요, “저 보이지 않는 땅 밑 지심 아득한 곳”에 있는 무엇이다.

배 정웅 시의 ‘아메리카’는 이주와 이산의 물결이 쉼 없이 흐르는 곳이다. 배 정웅은 이민자 혹은 망명자의 서러움과 그리움을 그가 디디고 서있는 땅의 경험과 모국의 문화적 기억을 결합해서 새로운 시적 세계를 구성한다. 시인은 꿈꾸기의 불가피성과 미완성은 어쩌면 인간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저 ‘아메리칸 드림’조차 이 본질에서 그리 멀지 않다. 외다리 비둘기를 바라보는 노동으로 지친 미싱사들의 모습을 통해 미국의 ‘다른’ 얼굴을 포착해낸 「자바시장의 비둘기」라는 탁월한 시에서 이방(異邦)에서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이민생활의 하루해”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생생한 삶의 현장으로서의 아메리카를 그린다. 배 정웅의 시는 낯설지만 생동감 있고 문화적으로 소화력이 강하며 모국어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과 동시에 이질적 언어성에 대한 민감한 이해를 바탕으로 구성된 ‘시적 아메리카’를 만들어낸다.

 

3. 뼈 속에서 자라는 거리감: 시인 션 힐

 

션 힐의 시는 아메리카흑인의 디아스포라적 감성을 담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개념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배 정웅이 한인아메리카의 디아스포라 시학을 구현했다면, 션 힐은 미국의 흑인노예역사에 뿌리를 둔 흑인디아스포라의 경험을 다룬다. 배 정웅과 달리 션 힐 자신은 노예경험 뿐 아니라 이주의 경험조차 없다. 1973년생으로 전형적인 남부의 소도시 흑인공동체 출신인 션 힐을 디아스포라주체라고 할 수는 없다. 배 정웅에게 디아스포라가 그의 방랑적 삶 그 자체였다면, 션 힐에게는 디아스포라는 정체성의 뿌리를 모색하는 역사적 상상력의 형태를 띠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 지구적 시대의 ‘여행’을 통해 축적된 노마드적 경험으로 나타난다. 즉 디아스포라의 21세기 변형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비행과 로드 트립이 인간주체에게 열어 준 공간이동을 통해 생성된 체험이다.

션 힐의 경우처럼 디아스포라 시학은 이제 더 이상 이산을 직접 경험한 세대에 한정될 수 없다. 서론에서 밝힌 바, 디아스포라는 이제 어원이나 개념에 국한된 용어가 아니다. 구체적 현실에 기반 한 경험으로서의 디아스포라, 감수성과 시적 상상력으로서의 디아스포라, 역사와 현실을 보는 관점으로서의 디아스포라, 정치적 정체성을 가로지르는 주체성으로서의 디아스포라 등을 아우르는 세계관이자 정서, 시적 실천으로서 이해해야한다. 션 힐만큼 가장 전형적인 미국인으로서 성장한 시인이 디아스포라적 감성을 표현하는 시인은 드물다. 션 힐은 여행을 정기적으로 하면서, 여행경험을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관점을 축적하는 동력으로 사용한다. 동시에 흑인노예의 후손으로서 흑인디아스포라의 유산을 자신의 시적 자산으로 삼는다.

가령 그의 장시 중 하나인 「바하마여행: 배에 있던 흑인들에 관한 명상」을 보면, 바하마 행 유람선을 탄 화자가 수백 여 년 전 대서양 노예무역의 역사를 떠올리며 노예선 갑판아래에 ‘화물’처럼 취급되었던 흑인 노예를 떠올린다. 화자는 가족여행 중이다. 갑판 위에서 햇살을 받으며 샴페인을 마시는데 음악이 들려온다. 화자는 선 상위 여행자의 신분이지만, 동시에 대서양 항로를 따라 아메리카대륙으로 끌려온 노예선조를 떠올리고 있다. 그러니까 이 시에는 두 개 이상의 시간대가 공존하면서, 현실의 화자와 오랜 과거의 노예들이 중첩된다. 그들과 화자의 공통점은 피부색이고, 그의 정체성이 노예무역이라는 역사의 트라우마를 망각할 수 없게 한다. 가족여행에서 그는 흔한 즐거움을 누리기보다는 “바하마비치에서 면세로 산/ 투명한 푸른 물이 든 술병/ 봄베이 사파이어”로도 위로받지 못하는 심정이 된다.

션 힐의 시적 화자는 이렇게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이 없음에도 그것을 ‘뼛속 까지’ 느끼고 있다. 그에게 일상의 체험은 디아스포라적이다. 「휴가」에서 화자는 미시시피 강을 건넜고 앨버커키와 산타로사까지 달린다. 로드트립 중인 화자는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멈추고 고친 뒤 다시 달린다. “이렇게 까지 멀리 올 생각”은 없었음에도 화자의 로드 트립은 멈출 줄 모른다. 그런 와중에 가족들이 마치 사지가 잘려나가듯 떨어져나가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거리감이 뼛속에서 자라난다.” 그의 멈추지 않는 여정은 고향 조지아 주로 부터 멀어지는 과정이었다. 그의 뼛속에서 자라나는 거리감은 바로 디아스포라의 경험이 몸속에 각인되는 것이다.

션 힐의 디아스포라적 여정은 매혹적이다. 그는 뭔가에 홀린 듯이 미국 48개주의 땅을 밟았고 캐나다의 여섯 개 지역과 일곱 개의 타국, 세 대륙을 다녔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홀려있다”고 한다(「오늘 나의 세 번째 홀림에 보내는 엽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그는 가족과 친지를 본다. 그의 홀림은 타지와 타인의 낯섬을 향하지만 그곳과 그들에게서 그는 낯익은 장소와 지인을 마주한다. 그래서 그는 계속 홀려있고, 그의 여행은 멈추지 않는다. 이런 형태의 여행은 ‘관광’과 다르다. 관광이 정해진 목적지와 그곳에서의 ‘구경’ 그리고 ‘여흥’을 의미한다면, “신발 바닥”이 닿은 그 무수한 장소에서 그의 경험은 배 정웅의 정처 없는 방랑생활에 견줄 만하다.

‘밖’으로 향한 그의 방랑은 다른 한편 그가 잠시 머무는 장소에 대한 관찰과 성찰에 맞닿아있다. 외부로의 시선은 원심력으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중심으로 모이는 구심력에 이끌린다. 마치 디아스포라의 움직임이 외부로 방랑하게 하지만 또 뿌리를 향한 갈망을 낳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션 힐의 화자는 고향인 조지아 주를 떠나 미네소타 주의 베미지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일련의 시들이 베미지에서의 경험을 탐색한다. 션 힐의 화자 뿐 아니라 시인은 자신이 생활하는 장소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생활의 터전이 바뀔 때마다 그 장소는 시의 소재가 된다. 이건 생각보다 당연한 귀결은 아니다. 누구나 바뀐 장소에 반응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장소의 변화로 인한 낯설음에 예민해지고 이질적 경험은 시적 감수성을 자극하게 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누군가의 말처럼 ‘끝없이 떠돌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디아스포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적어도 션 힐에게는 시 쓰기는 디아스포라적 실천인 듯 하다. 베미지 외에도 알래스카, 텍사스, 뉴욕 등지의 도시에서 거주했던 경험은 그의 시에서 노마드적 여정의 일부로 형상화된다.

가령 “외침”이 아니라 “말더듬”으로 오는 봄이란 어떤 계절인가. <베미지의 봄>에서 묘사되는 봄은 여전히 눈발이 예고된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고 단풍나무의 수액을 받는 시즌이 시작되었음에도 또 눈발이 날린다고 한다. 베미지에서 봄의 온기는 말을 더듬는 듯이 온다. 그리고 화자는 “말한 것이 새 나가지 않게 해준 눈의 방식”이 그립다. 봄이 오는 계절에 여전히 잔존하는 겨울의 기운과, 얼어붙은 계절에의 그리움은 현재의 시간에 남은 과거의 흔적이고 그리움이다. 이런 경험의 방식은 바로 디아스포라시학의 본령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4. 디아스포라 시학의 윤리성

 

디아스포라 시학은 무엇보다 윤리적이고 윤리적 일 수 밖에 없다. 자신이 서 있는 중심으로부터 멀어지는 이산의 움직임은 타자와의 조우를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발생시킨다. 타자와의 만남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다. 타자와의 대면은 호불호의 선택이 아니라 삶의 조건으로서 감당해내야할 것이다. 타자의 환대를 준비해야한다. 디아스포라 시학의 시적 윤리성은 타자와 ‘부딪치는’ 과정에서 그 만남을 서사화하는 시적 실천으로 이룩된다. 시적 화자는 타자의 얼굴에 응대함으로써 비로소 디아스포라 주체가 된다. 그리고 타자와 주체사이에는 서러움의 연대가 형성된다. 디아스포라 주체는 타자의 서러움에 반응하는 공감의 서정을 통해 타자의 부름에 응답하기를 요구받는다, 이처럼 디아스포라의 윤리적 차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적 실천이야 말로 디아스포라시학을 구성하는 첫 번째 원칙이 될 것이다. 배 정웅과 션 힐을 시를 짧게나마 검토해보면서, 디아스포라의 문제 지형과 그 문학적 형상화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이제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서 어떻게 디아스포라적 감수성을 발현시키고 실천할 것인가를 묻자. 디아스포라라는 표현이 담고 있는 상처와 결핍을 부정하지 말자. 상처없는 주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은 더욱 근본적으로 결핍되고 상처에 민감하므로 존재하게 된다. 시인이라면 디아스포라적 차원에 이미 도달해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시인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설 것인가이다. 문 저쪽에서 기다릴 타자를 환대할 준비를 해야한다.

 

경식, 『디아스포라 기행: 추방당한자의 시선』 (김혜신 옮김), 돌베게, 2006.

icholas Mirzroeff, "The Multiple Viewpoint: Diasporic Visual Cultures". DiasporaandVisualCulture:RepresentingAfricansandJews.LondonandNewYork;Routledge,2000.

 

디아스포라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Stuart Hall, "Cultural Identity and Diaspora" 참조.

션힐의 시는 그의 대표 시선집 『홀림』(문학세계사; 강수영 옮김)에서 읽을 수 있다.

 

장석주, 『들뢰즈, 카프카, 김훈: 천개의 고원 그리고 한국문학의 지평』,작가정신, 2006. 이 책에는 노마드, 유목을 주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길을 내면화하는 방식으로 표현한 대목이 있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Totality and Infin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 Pennsylcania: Duquesne University Press, 1969)를 참조. 레비나스는 주체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주체가 된다고 했다. ‘나’는 반드시 ‘너’가 필요하다는, 타자의 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