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수필론

신화로서 수필과 수필가의 꿈

 

박 양 근

 

 

스위치 온 : 수필은 우주의 소행성

 

수필은 21세기의 신신화(Neo-Myth)다.

수필은 시적이고 소설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절제의 언어이므로 시적이고, 서사적이므로 소설적이고 우주의 삶을  담아내므로 드라마틱하다. 그런데 시보다 영감이 넘치며 소설보다 구성력이 뛰어나고 드라마보다 현장감이 넘치면서 인간 삶의 철학과 꿈을 펼치는 문학 장르는 무엇인가. 신화다. 그러면 대상에 대한 한없는 질문을 던지고 근원적인 해답을 찾아 사유하며 나뭇잎에서 우주의 색깔을 찾아내고, 달팽이의 더듬이로 우주의 신호를 포착하며 인간의 질박한 삶을 대상을 통해 은유적으로 풀어내는 문학은 무엇인가, 수필이다. 그 점에서 신화와 수필은 유사하다.

고로, 신화성을 지닌 수필문학을 이루려면 점성가와 같은 명상으로 자연과 소통하고 점술가의 영감으로 인간의 희로애락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언어의 대를 흔들며, 솟대의 새처럼 작으나 한없이 높고 무거운 걸음으로 천상계와 지상계 사이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솟대를 지켜볼 것이다. 그럴 때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우주를 묶는 담론인 신화가 얼마나 수필과 닮아 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수필의 문학성은 격조 높은 사유와 언술에서 출발한다. 아무리 감동적인 체험이라도 표현이 저급하면 작품은 평가절하 되기 쉽다. 반면에 표현이 진솔하면 부끄러운 약점, 잘못된 실수, 숨기고 싶은 결점을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부분이 진지해진다. 그러면서 서사를 전개시키는 구성, 적절한 비유, 신선하고 유연한 문체로써 주제를 형상화하고 의미화한다면 좋은 수필로 도약하게 된다.

달리 말하면 수필은 다음과 같은 요건을 갖춘 항성과 같아야 한다. 항성은 자유롭게 유영하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천체의 법칙에 따라서 무한한 우주를 여행한다. 그것은 시작이 없는 곳에서 출발하여 끝이 없는 곳에서 계속되는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룬 항해이다. 살아 있는 한 달리는 소행성의 질주력과 에너지야말로 작가로서 수필가가 체득하여야 할 요건이다.

1차원은 신변이나 신체를 친구나 이웃에게 담담하게 털어놓는 고백의 진지성을 말한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누락하면 진솔하지 못하며 헤픈 넋두리는 잡문이 되기 쉽다. 문학적인 인간은 일상의 다양성, 수용의 다양성, 인식의 다양성, 그리고  표현의 다양성을 통해 자아를 발전시켜야 한다. ‘내가 하니까 개성’이 아니라 ‘나만 할 수 있으니까’ 개성이고 ‘벗는 수필’ 아니라 ‘삭히고 빚은 수필’이면서 고유의 색깔로 서술하여야 자조와 자성과 자각의 삼각 구조가 이루어진다. 수필을 인생학이라고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차원은 지적 생산성을 가진 수필을 말한다. 케케묵은 지식이나 피상적 개념으로 짜깁기한 글은 인상미(Impression)와 표현미(Expression‎‎)가 부족하다. 산문으로서 수필은 지성, 객관, 논리, 경험이 깔려야 한다. 수필은 아는 것만큼 쓸 수 있으며 새롭고 낯선 읽을 거리와 생각거리가 내재되어야 독자의 공감을 얻게 되므로 지식이 흩어진 낟가리 같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3차원은 상상의 띠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상상은 짜깁기한 지식이나 덧칠된 감정이 아니라 사람과 사물에 대한 이해력과 그 근원을 파고드는 감수성과 분별력을 말한다. 과거의 체험을 해체하여 대상을 새롭게 조명하고 대상을 통하여 우주의 근원과 삶의 고리를 표현할 때 수필은 신화에 버금할 통찰력을 지니게 된다.

4차원은 적절한 미적 구조와 미학성을 구축하려는 노력을 지적한 말이다. 문학작품의 내적 외적 요건인 사색, 감성, 표현력이 함께 엮어지는 적기(Writing) 단계에서 미적 구성은 예술수필이라는 완성품을 만들어 낸다. 서 말의 한약재를 달여 한 그릇의 탕약을 만드는 과정을 곱새겨 볼 시간이 그때이다.

수필가에는 4계층이 있다. 첫째가 잡문수필가(Scribbler)로서 수필가라는 이름을 빌어 평이한 삶에 대한 기록으로서 다작을 한다면, 둘째는 저자수필가(Author)로서 빨리 수필집을 발간하여 저자라는 이름을 얻으려 한다. 작가다운 작가라면 셋째의  작가수필가(Writer)로서 최선을 다하여 한 편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면서 문학의 향기를 모색하는 사람이다. 그렇더라도 예술의 피안은 멀리 있음으로 네 번째 예술수필가(Artist Essayist)는 내용과 형식에서 완벽을 기하는 예술의 극점을 추구한다.

 

칩 1 : 문자도(文字圖)를 관측하라

 

로그 인 : 언어의 측량사

‘삶의 의미나 가치를 재발견케 하는 것이면 좋은 수필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필이 어떤 글인가를 모르면 수필처럼 쓰기 쉬운 글이 없고, 수필의 진수(眞髓)를 알면 수필처럼 어려운 글이 없다는 근원(近園)의 말처럼 참다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의 선과 진실의 극점을 지향해야 한다는 요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좋은 수필은 그러한 의욕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상에는 명문도 많고, 명작을 남긴 작가도 많다. 그러나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이 더 큰 감동을 남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은 작가의 명성이 작품의 수준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증거에 해당한다. 좋은 시란 결국 언어를 절제한 양식인 것처럼 산문도 함축적이면서 깊이 있는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이처럼 참으로 좋은 글은 많은 언사를 빌리지 않고서도 독자의 상상력을 발현(發現)시키는 경제적인 글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수필은 쉽게 읽힐 수 있어야 한다. 쉽게 읽는다는 가독성은 쉽게 써도 좋다는 묵시적 허용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독자가 쉽게 읽기 위해서는 작가는 투철한 장인 정신으로 묶고, 엮고, 펼쳐 내야 한다. 허투루 쓰인 글은 읽기가 어려우며, 난해한 글은 정신적 피와 땀이 배어 있지 않다는 변명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연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생태망의 일부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을 묘사하고 설명하는 글은 유기체로서 상관성과 결속성을 지녀야 하고 이런 조건을 갖춘 문자도만이 문학의 걸개가 된다. 주제를 선택하면 주제에 적합한 제재와 언어가 정해지며 나아가 주제, 제재, 문장, 경험, 독자, 작가라는 제 요소가 언어로 결속되어야 이데아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주제와 소재와 문장 구조가 서로 의탁하여 좋은 작품이 만들어지듯 수필은 무형식이 아니라 유형식과 홑형식의 글이다. 그리고 홑형식이란 작품 하나하나가 그것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맞춤 형식을 지녀야 한다는 뜻이다.

문학적 언어는 일상적 언어나 과학적 언어와 달리 인간의 체험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면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기호이다. 코울리지가 시는 “가장 훌륭한 단어들이 가장 훌륭한 순서로 나열된 것”이라고 한 말도 문학은 최적의 언어와 최적의 문맥을 지닌 도형(圖形)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지켜보면 각각의 별자리는 하나의 전설과 신화와 이야기를 지닌 작품으로서 우주는 작가가 해석하여야만 하는 거대한 문자도가 된다.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수필가는 문장의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클릭 1 : 형상과 인식의 결속

문학은 언어 예술로서 사물을 형상화하고 이데아를 인식하는 정신적 활동이다. 문학어는 형상화 작업에서 실용어나 일상어와 차이가 나며, 인식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지식의 습득과 구별된다. 형상화란 무엇을 보여 주는 것이며 피상적인 것에 오감으로 자각할 수 있는 구체성을 부여하는 표현이므로 관념만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수필은 무의미해진다.

인식은 무지의 그림자로 덮인 진실을 밝혀내는 정신적 행위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글도 인식의 글쓰기에 속하지만 문학과 거리가 먼 것은 형상화만이 문학의 목적이 아니듯이, 인식만이 문학의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의미하게 간주되어 온 대상에서 참된 무엇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심미적 기쁨에 못지않다. 인식의 과정을 살피되 형상화가 이루어져야 글 읽기라는 문학적 체험이 가능해진다. 특히 수필 문장에서는 형상화와 인식화라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결속의 효과가 커진다고 하겠다.

 

손, 세상으로 내미는 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한 가닥의 끈이다. 끈과 끈이 만나 꼬이고 엮어져 굵은 밧줄이 되는 것처럼 이 세상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 서로의 손을 잡고 힘을 모으기도 하고, 손을 들어 비판하기도 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나의 손이 얼마의 힘을 가진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손을 잡거나 내 손을 잡는 누군가가 따뜻하고 포근하게 엮어지는 마음의 끈을 느낄 수 있다면 더할 수 없이 기쁠 것 같다.

―강여울의 「손」 일부

 

작가는 손이라는 육신의 일부로써 대상과 대상 간에 대화와 유대감을 강화하려고 한다. 작가는 소통을 꿈꾼다. 그 소통은 손을 잡아 한 가닥 끈으로 삼고, 여러 사람의 손을 잡아 굵은 밧줄을 만들려고 한다. 손으로 손길과 손짓과 손질을 하면서 마음의 끈을 묶을 때 손은 마음의 은유다. 손은 보이는 형상이지만 마음의 끈은 보이지 않는 인식의 대상이다. 여기에 인식과 형상이 결속한다. 이처럼 혈육의 정은 타자와의 인간애가 나아가며, 화분의 꽃과도 소통을 이루어 낸다. 존재에 대한 인식과 존재와의 소통이 손이라는 소재로 결속된 좋은 예문에 해당한다.

 

클릭 2 : 주제와 제재의 결속

수필의 소통은 말할 필요도 없이 문장이라는 장(場)에서 이루어진다. 독자와의 소통은 자칫 작가의 눈 낮추기로 나아가기 쉬우므로 독자 읽기를 달성하면서 문학성을 지니려면 사물이 지닌 고유한 속성과 주제 의식을 결속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은 작가가 제재를 통해 발견한 의미를 다시 독자가 공유하여 독자와 제재 사이에 재공유가 이루어질 것을 요구받는다. 주제를 내면화하기 위해 소재를 투시하는 전략화는 적절한 소재를 선정하는 분별성, 소재와 주제를 일치시키는 적절성, 그리고 소재와 주제를 잇는 유기성이 상호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창작은 표현과 소통이라는 목적적 언어 행위이기 때문에 제재와 주제를 접근시키는 전략이 본격수필, 고급수필, 문학수필을 만들어 간다.

주제와 제재의 상관성에서 주의할 점은 사물을 얼마나 ‘새롭게 낯설게 보는가’ 하는 점이다. 현대문학이 가장 중요시하는 참신한 시각은 신선하게 성찰된 주제를 제시함으로써 대상의 본질과 동질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한다. 동질화란 작가가 소재와 상호 교감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사람의 경험과 정서가 소재에 녹아 내려 주제와 소재의 결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스승이 아이들 사이를 한바퀴 휙 둘러본다. 마음에 드는 그림이 없나 보다. 덤덤한 표정이다. 그런데 아까부터 무리에서 벗어나 산속 옹달샘을 보며 부지런히 스케치하는 소년이 보인다. 스승은 손짓으로 그를 불러 그린 그림을 펴 보라고 한다. 수줍은 듯 혹은 자신이 없는 듯 겨우 펼쳐 보이는 그림 속에는 동자승이 물동이를 지고 산속으로 걸어가고 있다.

스승은 무릎을 탁! 쳤다. 오늘 화동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보이지 않는 곳의 보임’이 화폭 속에 가득 담겨져 있지 않은가. 스승은 소년이 그린 ‘숨어 있는 절’ 그림을 아이들 앞에 아무 설명 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하루의 사생 수업을 마친다.

 

―구활의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 일부

 

윗 글의 주제는 ‘보이지 않는 곳의 보임’이라는 여백이고 제재는 화동의 그림이다. 그 그림에는 동자승이 물동이를 지고 가는 모습만 그려져 있고 산사는 분명히 산에 있지만 절은 그림 밖에 숨겨져 있다. 여백의 미로서 숨은 절과 그려진 동자승은 주제와 제재의 놀라운 결속을 보여 준다. 나아가 스승도 아이들에게 그 그림을 보여 주기만 할 뿐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산사라는 주제의식과 물동이라는 제재가 결속한 여백의 그림이 ‘보이지 않으나 존재하는 것(Unseen being, Nowhere→Now here)’의 섭리를 일깨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클릭 3 : 외적 요소와 내적 요소의 결속

수필문의 완성 여부는 숱한 언어가 이리저리 엮어져 하나의 거대한 성운과 같은 문자도(文字圖)를 이해하고 있는가로 결정된다.

이를 위한 세 번째 요건으로 외적 요소와 내적 요소 간의 결속이 필요하다. 외적 결속은 수필을 이루는 제재, 주제, 문장, 구성 간의 응집력이라면 내적 결속은 문장에 대한 것으로 단어, 구, 절, 문장, 단락, 의미부 사이의 연계성을 말한다. 좋은 글인가, 미흡한 글인가를 느낄 수는 있으나 왜 그런가를 분석하는 작업이 쉽지 않은 까닭은 외적 내적 결속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수필문은 단순히 열거된 것이 아니라 상호간에 연관성을 지닌 유기체이다. 실제 어느 작품이든 결속성이 없지는 않지만 문제는 수필을 이루는 주제와 제재, 대주제와 종속주제, 내용단락과 기능단락이 언어를 통해 전체의 일부가 되도록 디자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달리 말하면 예술성을 지니도록 외적·내적 결속을 강화하는 것이다.

아래 소개한 글은 화자가 한방병원에서 함께 치료받는 여승을 봉숭아에 일치시키면서 절대고독을 지향하는 실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풀어내고 있다.

 

침구실에 같이 불려 들어갔다. 빨쪽하게 열린 커튼 사이로 뽀얀 맨발이 보인다. 초등학생 계집애 마냥 발도 작다. 고슴도치가 된 스님과 내가 의원의 명령에 따라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다. 커튼을 넘어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린다. 커튼 밑으로 법당 향내가 솔솔 넘어오는 것 같다. 통증을 참는 심호흡인가? 아파도 혼자, 서글퍼도 혼자일 수밖에 없는 절대 고독, 거기에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자기연민인가? 이따금씩 호요- 한숨짓는 소리가 들린다. 무소뿔처럼 홀로 가야 할 구도의 길, 평생 잿빛 버선 속에 감추고 살아가야 할 저 발가락에다 불현듯 주홍빛 꽃물을 들여 주고 싶다. 문득 남산 오막살이 토담 아래 지천으로 피어 있던 봉숭아꽃이 떠오른다.

―안병태의 「여승(女僧)」 일부

 

이 글의 외적 요소는 주제에서는 고독과 해탈, 제재는 침구실, 문장은 설명과 사유와 묘사로 구분되어 있다. 내적 요소는 이미지의 대립으로 나타난다. 주홍빛 봉숭아꽃과 뽀얀 맨발, 통증을 참는 심호흡과 호요- 한숨짓는 소리가 속세와 탈속의 세계를 반영하며 “스님과 내가 의원의 명령에 따라 같은 침대”에 누운 서술은 함께하되 아픔은 홀로 견딜 수밖에 없는 절대고독의 주제와 결속한다. 이러한 내외적 결속을 통해 작가는 성스러운 구도의 길을 걷는 여승에 대한 애처로움을 “오막살이 토담 아래 지천으로 핀 주홍빛 봉숭아와 발가락 꽃물”로 표현한다. 작가는 그 여승을 봉숭아물을 들여 주고 싶은 여동생으로 인식하여 에로티시즘에 혹하려는 독자를 세속적 연상이라는 함정에서 구원해 주고 있다.

 

수필에는 고요한 관조와 따뜻한 유머가 있으며, 개인의 회한과 만인이 공유하는 역사의식이 담겨 있다. 작가는 문장의 힘을 빌려 이것들을 표현하여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러한 수필을 마구, 그냥, 함부로 쓸 수 없다. 「수필을 쓰면서」에서 “수필은 수필일 따름이다”라고 말한 윤모촌 선생의 진의도 수필의 결속성에 충실하라는 조언에 해당한다.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이야기를 미적 구조로 묶을 때 좋은 수필이 되기 마련이다. 수필 쓰기에서 이보다 더 절실한 연금술적 결속은 없다.

 

클릭 4 : 상상과 이미지의 결속

노드롭 프라이는 일찍이 『문학의 구조와 상상력』에서, “상상력이란 인간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있음 직한 본보기(Model)를 구성하는 힘이다”라고 정의하였다. 영국의 수필가인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 : 1672∼1719)은 「상상의 즐거움」이라는 평론에서 “상상은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리 속에서 심상을 만들어 가며,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이것을 종합하면 상상은 사실에 매이지 않고 작가가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좋게, 더 다양하게 만들어 보는 능력을 말한다. 안성수는 『현대수필』에 기고한 「수필 오디세이 (3)」에서 “상상이 모색하는 대상은 우리의 심신에 은밀하게 숨어 있을 수도 있고, 오감의 지평 너머에 있을 수 있으며, 인류가 꿈꾸는 피안이거나 물리적으로는 아무리 하여도 도달할 수 없는 이데아”라고 말하며 대상을 세 개의 근원으로 구분하였다. 나아가 그는 ‘새롭게 본다’ 함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인식과 비판을 의미하고, ‘있음 직한 본보기를 구성하는 힘’이라 함은 ‘우리가 살고 싶은 이상 세계’의 제안을 뜻하며 ‘새로운 심상을 형성한다’ 함은 현실의 이상화라는 변증법적 상상이라는 미학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상상론을 종합하여 보면 상상력을 인지하는 인간의 기능으로서 오감이 지닌 수용력을 연관 지어 볼 필요가 있다. 오감은 인간이 지닌 가장 예민하면서 감수성이 넘치는 외부와의 수용 통로로서 대상을 가장 먼저 접할 뿐 아니라 이성이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해한 대상을 포착하기도 한다.

 

나의 꽃밭에서 죽음처럼 깊은 겨울잠을 자고 일어선 저 초화의 일생이 말을 건다.(상상) 저 애의 말이 나의 말이다. 벙어리처럼, 나는 시련과 환난으로 인한 비명과 신음을 발설하지 못했다. 가장 진하다는 혈육에게도 어리광이나 엄살을 떨 수 없었다. 내 생명은 내가 먹어야 지켜지듯이 내 삶은 나의 책임이니까. 마치 저 애들이 동천한고를 흙 속의 깊은 어둠에 묻혀(시각 이미지) 스스로 연단하고 있었듯이. 저것들이 드디어 제 몸을 파열하는 깨어짐으로 거듭나(청각 이미지) 세상의 빛을 향하여 고개를 내밀 듯이 나도 결국 나를 깨뜨리고 찢어서야 외출할 수 있었지. 내 언어의 외출, 내 영혼의 외출. 상처투성이의 삶이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나를 용서하고 이해하기로 했다.(인식)

 

―김용옥의 「그 이름을 부르며」 일부

 

작가가 겨울 초화에게 말을 건네는 몸짓은 예술이라는 세계에서는 인간과 무생물일지라도 상호 소통하게 된다. 작가는 자연의 변화를 오감을 통해 상상하여 담을 찾아낸다. 그것은 자연이 벙어리가 아니라 제 삶을 스스로 짊어지고 인고한 끝에 마침내 어둠과 흙의 무게를 이겨내고 제 몸을 파열시켜 부활하는 영혼의 외출로 인식한다. 그래서 봄의 함성은 자신의 외출을 알리는 소리임으로 자신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김용옥의 「그 이름을 부르며」는 상상과 오감의 이미지와 인식이 결속을 이룬 점에서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로그 아웃 : 탈주, 결속, 그리고 재탈주

작품은 생명체다. 끊임없이 작가의 영적 교감에 의하여  수축하고 이완된다. 글은 인체처럼 수많은 단어라는 세포로 이루어지므로 완성미를 이룬 작품은 작가의 분신과 같다. 하지만 작가는 한 편의 글을 완성하면 새로운 다른 생명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첫 작품이라는 영토에서 벗어나 문학을 이루는 제 요소를 다시 결속시켜 두 번째 작품을 만들어 내는 일련의 과정에 해당한다. 이러한 반복과 재현은 창작을 하려는 한 되풀이된다. 다시 말하면 결속과 해체의 탈주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속에 탈주가 개입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탈주가 작가의 몫이라면 결속은 작품의 속성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작가의 탈주 의식이 강할수록 작품은 이완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견고하게 묶여진다. 운동에 비유하면 축구의 경우 예선전 단계에서는 선수와 감독과 관중이 느슨하게 임하는 시합이 이루어지기 쉽지만 결승전에 가까워질수록 선수와 감독과 관중은 스포츠 규칙에 의하여 더욱 응집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한 편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작품과 작가가 지닌 여러 요소가 얼마나 기밀하게 결속하는 것에 좌우된다고 할 것이다.

 

칩 2 : 만다라를 그리는 언어화가 

 

로그 인 : 언어의 춤과 마술 

수필문은 날줄과 씨줄로 이어지는 옷감처럼 내용과 형식 간의 결속으로 엮어진다. 형식은 다시 구조와 기법으로 나누어진다. 문장구조는 음절, 단어, 구, 문장, 단락 등이며 기법은 직유, 은유, 풍유 등의 수사학을 말한다. 그러므로 좋은 문장이 되려면 구조와 기법이 상호간에 결속력을 지녀야 한다.

구조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의 수필 단락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음절, 단어, 구, 문장이라는 각 요소 간의 비중이 안배되어 균형미를 이루어야 수필 단락의 자격을 지닌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3·3·3 원칙이 요구된다.

수필문은 서두와 전개부와 결미로 나누어진다. 서두는 배경 설정, 분위기 조성, 주제를 암시하는 기능을 지니고, 전개부는 서두에서 암시된 내용을 펼쳐 내는 부분으로서 일반적으로 세 개의 내용군이 바람직하며 설명과 묘사를 통해 주제와 소재가 엮어지는 무대에 해당한다. 결미는 전개부에서 펼쳐진 내용을 요약, 재정리하고 비전 제시와 가치 평가의 기능을 담당한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시작과 중간과 끝”이라는 내용 구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기승전결이나 5단계도 가능하지만 문장 수련을 시작하는 경우 3단 구획이 가장 효과적인 구분이 된다.

 

클릭 1 : 단락문 구조의 3원칙

단락은 도입 문장과 뒷받침 문장과 마무리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도입문은 해당 단락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겠다는 첫 문장이므로 짧고 함축적인 표현으로 명시적인 내용을 담으면서 앞 단락의 끝 문장과 유기적 호응을 이루어야 한다. 도입문에 이어 내용이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뒷받침 문장들은 설명, 해설, 보완, 인용, 재설명, 열거 등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상호간에는 호응, 대조, 정립, 평행, 보완, 반증, 순차 등의 결속으로 이어진다. 뒷받침 문장을 엮을 때 문장 길이가 일정하지 않고 장단이 있어야 음성적 리듬과 시각적 입체감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마무리 문장은 단락에서 서술하는 내용이 끝났다는 신호를 주면서 다음 단락의 내용을 암시하는 기능을 수행하여야 한다.

덧붙이면 하나의 단락은 적어도 세 문장 이상으로 구성하며 단락끼리의 장단도 필요하다. 단조로운 길이는 수필을 읽는 재미를 빼앗기 쉽다. 체험과 느낌의 배열에 있어서 설명과 느낌의 서술이 불균형을 이루면 주제가 의미화되지 못하고 제재의 양적 균형이 깨어지면서 보고문이거나 관념의 글이 되어 버린다.

 

여름도 다 끝나려는 어느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 그때 나는 달팽이의 이상한 몸짓을 보았다. 억새풀의 제일 높은 끝에 한 방울의 이슬처럼 위태롭게 맺혀 있었다. 목은 길게 솟아올랐고, 조그만 입은 약간 벌어졌으며, 꽃의 수술 같은 두 개의 눈은 긴장되어 있었다. 마치 노래를 부르려는 순간의 어떤 가수처럼, 나뭇가지를 떠나려는 순간의 새의 자세처럼 보였다. 가늘고 긴 목에서 벌레 소리 같은 어떤 슬픈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달팽이는 내내 아무 소리도 내지르지 못했다. / 투명한 달빛이 조그만 몸을 비추고 있다.

―손광성의 「달팽이」 일부

 

윗 글은 전개부에 속한 한 단락을 인용하여 단락이 어떤 구조를 지녀야 함을 설명한다. 단락에도 도입문과 전개문과 마무리 문장이 있다. 도입문과 마무리 문장은 달빛 배경을 그려낸다. 그 다음 문장은 달팽이의 몸짓에 초점을 맞추고, 이어 목, 입, 눈, 자세를 열거와 직유와 대비의 수사법으로 보충 보완, 상술한다. 뒷받침 문장들은 소리 없이 움직이는 달팽이의 모습으로 침묵의 수용과 무저항을 의미화한 다음 달빛 달팽이로 회귀하고 있다. 마무리 문장에서 “조그만 몸”으로 달팽이의 소시민적 양상을 제시한다. 이처럼 하나의 단락 구조도 전체 수필문의 구조처럼 3단계로 구성된다.

 

클릭 2 : 단락문 내용의 3원칙

각 단락은 구성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핵이 필요하다. 이것은 세 개의 핵심어를 말하는데 핵심어는 단락의 내용을 압축하면서 내용을 이어 주는 허브(핵)에 해당한다. 세 개의 중심어가 단락 내에서 적절하게 안배되어야 내용이 구체성과 균형감과 안정감을 지니게 된다. 가령 얼굴을 묘사한다면 한 단락 안에서 눈, 코, 귀, 입, 점, 안색, 표정, 얼굴형 등을 모두 그려내기보다는 윤곽, 안색, 표정 세 가지만 그려내는데 그때 윤곽, 안색, 표정이 3개의 중심어가 된다. 인상적이고 선명한 이미지가 만들어지려면 묘사와 서술의 균형이 필요하고 그 진정성은 중심어의 배열, 전개부의 예시문, 나아가 결미를 이루는 내적 질서가 필요해진다.

 

어느 날, 사람들은 이상한 말을 보게 되었다. / 죽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끝까지 달리는 독종을 보았다. 저 늙은 말이 미쳤나 보다. 저러다 쓰러지겠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놀라웠고 감격스러웠다.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눈물나도록 서럽게 달려나가는 희망을 보고 있었다. /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신현길의 「어느 경주마 이야기」 일부

 

인용한 단락은 외적 구조에서는 도입문, 뒷받침문, 마무리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용에서는 늙은 경주마가 우리 자신임을 인식해 가는 추이를 나타낸다. 위 단락의 전개부를 이루는 핵심어는 “늙은 말, 눈물, 희망”이다. 세 개의 핵심어가 말과 인간을 묶고 있다. 작가는 말의 모습을 구구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늙은 말을 보고 감격하는 관중의 눈물로 말이 질주하는 모습과 말에서 전이되는 인간의 희망을 그려낸다. “삶이란 외부와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임을 인식하면 우리는 “자신의 과거 전적과 지녀 온 습관과 기술”이라는 내부의 적에 대항한다. 이것이 경마 대회에서 항상 꼴찌를 할지라도 어느 코스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말의 교훈이다. 희망을 늙은 꼴찌 말에서 찾아낸 낯선 시선이 돋보이는 단락이라고 하겠다.

 

클릭 3 : 단락문 수사의 3원칙

마지막 3은 문장 표현에서의 수사적 기법을 말한다. 수필문에서는 직설적인 설명이나 해설보다는 주제를 함축적이고 은근하게 표현할 때 진실성을 가지게 된다. 직유, 인유, 은유, 이미지, 반어, 역설, 의성, 의인화 등의 많은 수사 방법이 있지만 한 단락 내에서 구사되는 비유법의 유형은 세 개 미만으로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인용이나 열거나 묘사의 수사학은 심리학적으로 독자에게 안정된 가독성을 주는 반면에 수사학이 가미되지 못한 문장은 단순한 해설문이나 설명문, 또는 보고문에 그쳐 버린다. 반대로 한 단락이나 한 문장 안에서 지나치게 비유법이 사용되면 논리가 흐려져 가벼운 미문이 되거나 감상적인 문장이 되어 버린다. 수필이 시적 표현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주제성이라는 산문 정신을 해쳐서는 안 되며 적절하게 안배된 수사의 미학이 갖추어져야 시성과 산문성을 확보하게 된다.

 

녹차보다 더 깊고 은은한 솔잎차는 성급한 마음을 가지고 마시면 그 맛을 알 수 없다. 들끓는 욕망을 가라앉히고 세상 잡사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한 편의 아름다운 수필을 읽듯 솔잎차의 향기를 맡아 보라.(청유법, 후각 심상) 솔잎차 한 모금이 입술에 닿는 순간(미각 심상) 날카로운 첫사랑의 추억처럼 마음을 아릿하게 적셔 오리라. 목을 타고 넘어가는 동안 머릿속에 자라는 온갖 상념(활유법)들이 서리 맞은 풀잎처럼(직유법, 시각 심상)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오병훈의 「잎차를 마시며」 일부

 

「잎차를 마시며」는 시적 비유법을 다수 도입하고 있다. 청유법, 의인법, 활유법 외에도 후각, 미각, 시각의 이미지를 도입하여 어찌 보면 수필문의 간결미와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듯이 사람의 오감과 오각에 호소하는 제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시적 비유법의 도입은 불가피하다. 그렇더라도 미문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이미지의 도입이 후각, 미각, 시각으로 체계화되어 있고 청유법, 활유법과 직유법이 상호 결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로그 아웃 : 작가의 비애, 작가의 환희

예술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정서적이며 미적인 기능이다. 영국의 철학자인 베이컨은 역사는 기억을, 철학은 이성을, 문학은 상상(想像)을 바탕으로 전개된다고 하였다. 모든 예술 작품은 상상으로 태어나 미적구조에 의하여 형태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작가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향상과 질료, 추상과 구상, 상상과 언어 사이의 문학적 결속력을 높일 수 있는 자체의 역량을 높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작품이 보여 주는 질적 경계선은 작가가 얼마나 미지의 상상을 향하여 탈주할 수 있는가라는 동력에 좌우된다. 이 동력은 작품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두께뿐만 아니라, 작가가 지니게 되는 사상과 인식의 무게까지 결정짓는다. 그리하여 작가는 그 한계에 좌절하고 그 한계를 추월함으로써 환희를 만끽하기도 한다.  만일 작품이 질적으로 떨어진다면 그것은 사회적 환경이나 문학 자체의 제약 때문이 아니라 그가 지닌 상상력의 결핍 때문일 것이다. 화가든, 목공이든, 작곡가든, 창조하는 예술가는 이러한 심미적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한다는 의미에서 상상은 작가적 능력을 측정하는 저울이자 탐지기라고 할 수 있다.

밤을 새워 공부를 하고 글을 쓰되 상상의 저력을 쌓아 가는 작가에게 기대하는 이유도 이런 까닭이다. 시인보다 소설가보다 수필가에게 상상력은 명약이면서 스스로 짐 질 바위이기도 하다. 작가적 환희는 작가적 비애의 꽃임을 잊지 말 것이다.

 

스위치 오프 : 다시 탈주선(脫走船)을 조립하며

 

수필은 인생의 거울이면서 사회의 종이라고 한다. 동시에 작가와 독자 간의 평등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문학이면서 체험을 미적 가치로 승화시켜 리얼리티를 제시하는 인본주의 문학이기도 하다. 이것을 정리하면 수필은 의미화와 형상화를 바탕으로 자아와 타자 간의 다리를 놓는 소통의 문학이 된다. 그 소통을 이루기 위해서 수필가는 전통과 실험 간의 균형을 이루는 창작 정신과 장인 정신을 발휘하면서 낮은 곳에 머물면서 높는 곳을 응시하고 자유자재로 문학의 경계선을 안팎으로 넘나들어야 한다. 낮음을 높음으로, 작은 것을 귀하게, 흔한 것을 아쉽게 바라보면서 그 사이에 의미라는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이것이 실험성과 현대성과 개성을 지닌 수필가의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면 부서진 낙엽, 떨어진 밥풀, 낡은 휴대폰, 농 밑의 먼지 등을 성찰하여 실존적 존재로 승격시키려는 애정과 해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귀천의 진폭이 클수록 독자에게 미치는 인식과 충격의 파장은 높아진다. “구슬은 꿰어야 한다”는 말을 빌리면 기법이나 기교와 같은 두뇌 굴리기(Brain-storming)보다는 상상이나 ‘낯설게 하기’라는 심성 굴리기(Heart-storming)라는 훈련을 뜻한다. 미학적 기법을 꾸준히 연마하고 작품을 통해 실험하고 검증하면 수필의 문학성은 더욱 향상될 것이다.

나아가 좋은 수필은 4성(性)의 원리(一物一性, 一事一言, 一氣一品, 一材一題)를 지닌다. 일물일성이란 모든 사물은 각각 하나의 고유한 성질을 지닌다는 의미로서 좋은 글을 쓰려면 그 사물의 가진 본질적인 속성을 포착하여야 한다. 두 번째, 일사일언이란 어떤 사건이나 체험일지라도 하나의 이야깃거리를 지닌다는 뜻으로 눈 주기에 따라 좋은 글감을 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세 번째, 하나의 착상은 하나의 글감을 만들어 내므로 부단하게 ‘어, 이거 글 되겠네’라는 착상을 연습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재일제는 하나의 제재는 가장 적절한 하나의 주제를 가진다는 의미이다. 4성의 원리는 결속성과 더불어 좋은 수필을 이루는 2개의 핵심적인 축이 된다.

결론적으로 수필은 인간의 삶과 자연의 현상과 우주의 제반 법칙을 풀어내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를 제대로 전하려면 남다른 상상과 언어에 대한 이해력과 서사를 꾸려 가는 능력이 필요하다. 달리 말하면 진지한 수필가는 부단하게 자신의 문학적 영토에서 새로운 영토로 진군하는 탈주선(脫走船)을 조립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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