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공부의 첫걸음 / 김인환

 

 

글쓰기 공부의 첫걸음은 글쓰기에 대해 자의식을 갖는 것이다. 글쓰기는 어떤 것이며 나의 글쓰기의 의의는 무엇인가 하는 등의 문제를 두고 고심함으로써 자신의 글쓰기를 바로 세울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에 글 한 편을 소개한다. 글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말이 강하게 전해 온다.

 

 

가치 판단 


글은 못 쓰지만 머리는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느낌과 생각과 행동을 대중 삼아 내리는 것인데, 섬세한 느낌과 바른 생각은 반드시 좋은 글을 이루게 마련이다. 글을 지으려고 애써 공들이는 일은 저 자신을 가꾸고 염려함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세상에 자신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릇되고 어지러운 글이 많이 보임은 참으로 야릇한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글을 짓게 되는 경우에 망설이고 어려워하는 이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쓸거리가 없어 그러하노라고 대답하는 수가 많다. 그런데 길가에 구르는 돌 하나를 두고도 장편 소설을 지을 수 있다고 한 박경리의 말을 들어보면, 지을 거리가 없다는 생각이 그릇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글 지을 감은 어느 어두운 곳에 따로 숨어 있지 않고 평범한 일상생활에 스며 있다. 소중한 것은 글감이 아니라 글 지을 거리를 갈고닦아서 한 편의 글을 마련하는 솜씨와 눈이다.


글감을 바라보는 눈과 글감을 거머잡는 솜씨는 나날의 생활 속에서 형성된다. 왕희지는 글 짓는 길을 묻는 사람에게 한 달 동안 뜰에 가득한 꽃나무의 이파리와 꽃술을 모두 세게 하고, 상에 오른 밥과 찬의 맛을 음미하게 하였다. 삶에 정성을 다하지 못하면서 글에 공을 들일 수는 없다. 느낌과 생각이 촘촘하지 못하면서 앞뒤가 맞는 글을 지을 수는 더구나 없다. 글을 지으려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일상의 평범하고 용이하고 명백한 생활에 깃들여 있는 맛을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인생의 의미를 찾는 일이 높은 나무 위에 열린 과일을 위태롭게 모험하여 얻어내는 것이라고 하는 생각은 크게 잘못되었다. 자연과 사회의 속뜻은 나날의 일과 놀이에 배어 있다. 어머니의 한 마디 말씀이나 매일 보는 친구와 잠시 나눈 이야기도 좋은 글이 될 수 있다. 여유를 가지고 삶에 공들이는 사람에게는 모든 순간이 놀랍고 새로운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늙으면 주름지고 죽으면 없어지는 얼굴보다 어떻게 보면 글이 더욱 무서운 경우도 있다. 아무렇게나 써둔 일기의 한쪽이 뒤에 남아 우연히 후배의 손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수도 있다.


여유 없고 답답한 심정으로는 글을 지을 수 없다. 정작 글을 짓기 시작할 때에는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봄에 대하여 글을 지어보라고 하면 나물 캐는 색시와 우짖는 노고지리만 써놓고 말거나, 일기장을 펴놓고는 세수하고 학교에 다녀와서 놀다 잤다고밖에 쓰지 못하는 사람들의 잘못이 모두 서두름에 있다.


글 지을 내용을 마음에 정한 후에는 그 대체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상념의 날개를 펼쳐야 한다. 스스로 돌아보아 감수성이 예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글 지을 내용을 특수화하여 느낌의 글을 짓는 것이 좋다. 나무에 대하여 글을 짓는다면, 내용을 자기가 아는 어떤 나무로 특수화하고 그것을 어느 때 어디에 있던 어떤 나무로 더 구체화한다. 그 후에 나무 주변의 경치와 분위기, 나무 밑에서 나눈 대화, 나무 아래서 일어난 사건들로 글감을 확대하는 것이다. 스스로 이지력이 강하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글 지을 내용을 보편화하여 생각의 글을 짓는 것이 좋다.


나무를 두고 상념을 시작하여 자연의 본질을 사색하는 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세히 느끼고 바르게 생각해야 좋은 글이 되는 것이지만 글 쓰기가 반드시 느낌과 생각보다 뒤에 오는 것은 아니다. 글 짓는 데 공을 들이면 저절로 느낌과 생각이 다듬어진다. 느낌과 생각을 훈련하는 지름길이 바로 글짓기라고 할 수도 있다.
아름다운 여자를 묘사할 때에 여자의 눈썹과 입술에 대하여 쓸 것이 아니라 밝은 달빛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글쓰기의 정도이다. 달빛을 환하게 받고 있는 담과 뜰, 그리고 뜰에 피어 있는 꽃을 묘사하고 달빛을 받고 반짝이는 섬돌과 문살을 묘사해 놓으면 방안에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여주기가 쉬워진다. 여자만이 아니라 담과 뜰과 꽃과 섬돌이 모두 글감이 되는 것이다.


글을 지으려면 글 지을 내용에 대하여 떠오르는 상념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공책에 적어 두어야 한다. 남의 글에서 글 지으려는 내용에 관련된 부분을 찾아 적어두는 것도 좋은 태도이다. 체험에서 우러나는 글이 좋은 글이지만 독서를 통한 체험도 현학만 아니라면 글감이 될 수 있다.


글감을 아무리 풍부하게 갈무리하고 있다 하더라도 글감들을 꿰뚫고 흐르는 연결선이 없으면 좋은 글을 지을 수 없다. 잘된 글에는 모든 부분들을 꿰뚫고 흐르는 하나의 중심선이 있다. 글감이 풍부할 뿐 아니라 앞뒤가 맞아야 좋은 글이 되는 것이다. 대화를 하다가 문득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한 경우가 있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대화의 앞뒤에 어긋남이 있기 때문이다. 술자리가 때때로 피곤한 이유도 저마다 자기 이야기만 하는 데 있다. 저를 심하게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어떠한 의미선을 붙잡아 내어서 자기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끼어 넣는 것이 대화의 기술이다. 다시 말하면 대화에는 수다쟁이가 아니라 이야기의 교통순경이 필요한 것이다. 한 사람이 "교육은 조각과 같다"고 말하는데, 다른 사람이 "내일 등산 가자"고 말한다면 그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교육은 조각과 같다"는 말을 받아서 "교육은 원예와 같다"고 함으로써 의미선을 연결해 놓는다면, "교육은 학습자의 능력을 북돋우는 원예와 같으면서 동시에 바람직한 인간형을 형성하는 조각과 같다"는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러한 대화의 윤곽을 설정해보면, 조각이란 항목이 하나, 원예란 항목이 하나, 조각이며 원예란 항목이 하나로서 모두 세 항목이 될 거이며, 항목마다 세부 항목을 다시 세워 볼 수 있을 것이다.


앞뒤가 맞는 글을 쓰려면, 공책에 적어둔 상념의 조각들을 엮어낼 만한 뼈대, 즉 글감들을 배치할 설계도를 그려보아야 한다. 윤곽의 항목은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으나, 대개 세 항목에서 다섯 항목 사이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윤곽의 형식적 전개는 글의 앞과 뒤에 들머리와 마무리를 두는 것이 표준이 되지만 그 외에 마무리만 두거나 들머리만 두는 경우도 있고, 하나의 사건을 시간 순서로 서술하는 경우도 있고, 흩어진 상념들을 보이지 않는 선으로 느슨하게 연결하는 경우도 있다.


글의 윤곽은 취미와 습관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다. 어떠한 방법으로 윤곽을 설정할 것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앞서 공책에 적어놓은 상념들을 얽어 짜내려는 목적에 합치되기만 하면 글의 윤곽이란 어떻게 설정되어도 무방하다. 글의 윤곽을 설정하는 데에도 어떠한 형식을 따르기보다는 직관에 의존하는 태도가 더욱 바람직하다. 다만 글의 윤곽 역시 종이에 적어두어야 한다. 자재를 설계도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 건축이고 상념을 윤곽에 따라 배치하는 것이 글쓰기이다.


글의 평가는 문장과 문단과 구성과 내용을 수 우 미 양 가의 5단계로 측정하는 방법이 무난하다. 8점을 줄 것인지 9점을 줄 것인지 사이에서 선택하기보다 '아주 좋다' '좋다' '보통이다' '나쁘다' '아주 나쁘다'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좀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한 문단에 2-3개의 주제 문장을 두거나 논거와 증거와 사례 없이 주제 문장의 앞뒤에 의미 없는 군소리를 배열하면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다. 소재가 단조로운 판박이 글이나 주제와 무관한 소재로 어수선하게 표현된 글도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없다. 평가의 척도를 여덟 개의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맞춤법과 구두점에 잘못은 없는가?
2. 낱말이 바르게 선택되어 있는가?
3. 문단의 중심 문장이 명확하게 진술되어 있나?
4. 문단의 중심 문장이 적절한 논거로 뒷받침되어 있나?
5. 문단들 사이에 연관성이 있는가?
6. 본론이 글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가?
7. 특수하고 다양한 내용이가?
8. 상상력을 자극하는 독창적인 내용인가?

 

요컨대 소재가 다양하고 앞뒤가 맞고 문법에 맞는 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7급에서 8단까지 단계를 나누어본 조지훈의 주도에 따라 글쓰기의 단계를 설정해 볼 수도 있을 듯하다.


. 글을 아주 못 짓지는 않으나 안 짓는 사람
. 글을 짓기는 하나 겁내는 사람
. 짓기도 하고 겁내지도 않으나 혼자 숨어 짓는 사람
.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글을 짓는 사람
. 성욕에 관한 글만 짓는 사람
. 잠이 안 와서 일기만 쓰는 사람
. 글의 경지를 배우는 사람
. 글짓기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
. 글짓기의 참된 경지에 반한 사람
. 글짓기의 참된 경지를 체득한 사람
. 글의 도를 닦는 사람
. 글짓기를 아끼는 사람
. 지어도 그만 안 지어도 그만 글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사람
. 글에 공들이다 병이 들어 이미 지을 수는 없고 글을 보고 즐거워만 하는 사람
. 글로 말미암아 다른 글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글짓기가 평생토록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일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선비들은 주필을 천하다고 하였다. 글을 짓지 아니할 수 없으며 글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살다 보면 남에게 뒤처질 수도 있고 남보다 앞설 수도 있으며 때로는 길과 길이 어긋나 혼선을 빚을 수도 있다. 그러나 꾸준히 더 높은 경지를 향하여 걷고 있는 동안에는 위험이 없을 것이다. 교만한 용에게는 후회할 일이 생긴다는 말이 <주역>에 있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씀도 행동의 결과보다 정성의 밀도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삶에, 죽음에, 병에, 늙음에 공을 들여야 하듯이 글에도 공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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