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 소재의 문예화 - 인간미와 인간성 회복을 중심으로 / 오창익

 

 

수필의 신변소재라면 작자 중심의 일상사를 이름이다. 자식, 부모, 형제 등의 가족사이거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병고와 죽음 등의 생활사로 결코 빛 곱고 질감 있는 글감들이 아니다.

 

그래서 신변사를 소재로 했을 때는 아무리 문예성이 짙은 경우에도 일단은 넋두리나 푸념 정도로 격하하거나 잡문시(雜文視)한다. 일반 독자는 물론 시나 소설 등 고유한 형식을 갖춘 장르에서 보는 시각이 더욱 그렇다. 내용 없이(부실하게) 존재하는 형식은 무조건 믿으려 하나 형식 없이 (자유롭게) 존재하는 내용은 아무리 귀하고 알뜰해도 일단은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문학 풍토, 특히 수필 장르에 한해서만은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경시(輕視)나 잡문시의 배경에는 '70년대 이후 대폭 확장된 발표 지면'이나 그에 따라 양산된 작품의 질 저하에도 원인은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인자(因子)는 '형식 없이 존재하는 내용의 경시성', 그 관성적인 편견에 있다 하겠다.

 

수필은 형식이 없는, 아니 형식이 매우 자유로운 (자율적인) 문학이다. 더욱이나 내용을 이루는 소재의 거개가 작자 중심의 일상사, 신변사이고 보니 잡문시하는 관성을 멈추기에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산문을 대표할 미래문학으로 격상을 서두르는 장르이기는 하지만, 이를 극복하지 않고는 결코 불가능할 것이다.

 

해서, 그 신변성을 의식적으로 피하거나 또 피해야한다는 주장도 없지 않으나(예외의 경우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본시 '隨筆'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출신성분 자체가 곧 작자 중심의 신변성, 즉 개별적인 사유와 정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필의 신변성은 그의 운명이자 체질이기도 한 것이다.

 

물론 객관적 사실을 내용으로 한 지적 수필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작자의 심경이나 분위기에 일단은 여과되지 않고서는 문학이 될 수 없는 것을 보면, 수필의 신변성은 분명 체질이고 성격인 것이다.

 

문제는 신변사를 그저 담담하게 기록하는 고백이나 서술에 그치느냐, 아니면 주어진 소재에 동화함으로써 그를 자기화(自己化) 하고 나아가 의미화(意味化)하여 공감 내지는 감동으로까지 격상시키느냐에 있다. 통칭, 전자를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수필'이라 한다면, 후자는 창작으로까지 승화된 '수필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신변성이다 잡문성이다가 문제는 아니다. 보다 생명적인 것은 그를 극복함으로써 창작문학으로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있는 것이다. 현대수필이 당면한 '장르 의식의 구체화'도 실은 그 이후의 문제일 것이다.

 

해서, 일찍이 이산(怡山) 김광섭도 그의 '수필문학소고'에서 "수필은 의식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결과적 현상'에서 씌어 진다."고 했다. 옳은 말이다. 결과적 현상이란 무엇인가? 다름 아닌, 작자에게 주어졌거나 몸소 선택한 현상, 즉 소재를 지칭하는 것으로써 수필이야말로, 현상의 연계나 전환을 필연으로 하는 소설과는 달리, 주어진 현상을 끝점으로 하여 그에 대한 자기 해석이요 이해란 말이다. 그러니까 수필 소재에 관한 한 신변적인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한 덕목이 아니라는 지적이기도 하다.

 

비유컨대, 김장을 할 때 버려지는 무청이나 배춧잎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경험이 적고 생각이 없는 젊은 주부에게는 쓰레기로 버릴 수밖에 없는 하찮은 존재다. 수필의 경우 푸념이나 넋두리쯤에 해당하는 신변사다. 그러나 경험이나 경륜이 깊은 할머니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호재 중의 호재다. 새끼로 엮어서, 울타리에 걸어 말렸다가 눈 쌓인 한겨울에 푹 삶아서 갖은양념으로 무쳐내는 시래기 요리의 깊은 맛은 일품이다. 이를테면 '쓰레기'가 질감 있는 '시래기'로의 변신이요 격상이다. 신변성(잡문성)과 문예성과의 관계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하겠다.

 

이렇듯 수필의 운명이자 체질이기도 한 신변 소재는 주지적(主知的)인 것과 주정적(主情的)인 것으로 대별할 수 있다. 주지든 주정이든 그를 소재로 주제의식을 구체화하여 독자로 하여금 공감 내지는 감동케 하는 것이 작가의 수법이자 최종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지적인 경우, 보다 중요한 것은 깊은 사고(사고)와 이해, 그리고 사랑과 자기 비움의 '인간성 회복 내지는 그 유지'에 있다 하겠다.

 

예컨대,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불화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며느리의 헤아림, 즉 냉철한 이성을 기조로 한 지적고뇌와도 같은 것이다. 이를 테면 ①자신의 친정어머니에게도 예외 없이 마땅찮은 며느리가 있고 ② 자신도 머지않아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가 되고 ③ 또한 목숨처럼 사랑하는 남편을 낳아준 이가 바로 그 분임을 인지, 재확인함으로써 갈등을 극복하는 현실인식, 즉 인간성 회복으로의 헤아림이다.

 

그렇다고 이를 녹고(論考)나 논리의 영역에 귀속시킬 바는 결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보다 인간적인 이해로만 절대 가능한 사유의 결과로써 바로 현대수필이 극복해야 할 '주지의 객관화' 작업인 것이다.

 

다음으로 주정적인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주지가 주로 '진리(眞理)'의 도움을 받는다면 주정은 '진실(眞實)'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소재 앞에 다가서는 작자의 솔직성과 순수성, 천진성과 난만성(爛漫性)으로써만 가능한 '인간적인 표정'이나 마음 깊은 곳에서 빚어내는 '인간적인 맛'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군대에 갔던 막내가 전역하는 날, 늙은 어머니 앞에 넙죽 엎드려 절을 하며 용처에 보태라며 내민 봉투, 비록 만 원권 몇 장이지만 그걸 받아들고 울며 웃는 어머니의 표정. 뿐인가. 그 표정을 감추고도 어쩌지 못하여 그 봉투를 핸드백에 넣고 다니며 모서리가 다 닳도록 만지고 또 만지는 어머니의 마음. 그게 어찌 진실과 통하지 않겠는가. 그 표정과 그 천진스러운 마음이야말로 독자와의 대우적(大愚的) 관계를 공감으로 이어주는 가장 인간적인 표정이요 맛일 것이다.

 

그래서, 이산(怡山)은 앞에 예시한 바 있는 글에서 이렇게 결말을 지었다.

 

"인간미를 보여줄 흥미나 자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평론이나 소설은 만들 수 있을지언정 결코 수필은 볼 수 없다."라고.

 

이렇듯 신변소재를 문예화 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인간성 회복 내지는 그 유지로 접근하는 '주지의 객관화(主知의 客觀化)'작업에 있고, 또한 보다 인간적인 맛이나 표정을 지음으로써 가능한 '주정의 인간화(主情의 人間化)'작업에 있다 하겠다. 또한 '경험의 재생적 창작화'에 있다고 하겠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