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락의 첫 문장 들여다보기 / 엄현옥

[수필과 비평 10월호 월평] 

 

문장은 작가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형식이다. 문장은 작가의 면면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이 쓰이고 읽히는 시대와 세태를 반영한다. 나아가 그 글이 문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첫인상은 처음 대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사람들은 0.3초라는 짧은 시간에 호감, 비호감 정도를 판단할 만큼 첫인상에 민감하다. 3초 안에 상대방의 첫인상이 결정된다던가.

 

작품에서도 첫 문장은 글의 흐름을 좌우한다. 첫 문장은 독자의 눈길을 끝까지 이어주는 단서로 작용하는 만큼, 작가의 개성과 심오한 문학세계가 담겨있기 마련이다. 이상李箱의 단편 소설 《날개》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로 시작된다. 이어지는 단문으로 소설의 주제와 성격을 인상적으로 제시했다.

 

필자가 기억하는 수필 첫 문장의 진수는 근원 김용준의 수필 〈매화梅花〉다.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라는 문장으로 작품의 문을 열어,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라는 유려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서두는 다음에 펼쳐질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이 수필은 매화를 완상玩賞하는 자신만의 예의(?)에 대해 서술하고, 탐매探梅의 소소한 여유마저 즐기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각박한 삶에 대한 반성으로 마무리된다.

 

지금껏 우리 수필문학사에서 끊임없이 거론되었던 화두는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무형식의 글”이라는 오해였다. 그렇다고 수필 창작에서 “붓 가는 대로”와 “무형식”이라는 관념을 벗어나기 위한 어떤 종류의 고정된 방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문학의 다른 장르와는 달리 형식적으로 특정한 제약없이 쉽게 쓸 수 있다는 의미로 왜곡되어, 수필의 장르적 가치를 폄하하려는 의도로까지 확장되곤 했다.

 

수필가들은 이러한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동안 부단히 노력을 기울였다. 2000년대에 들어와 양적인 확대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따라서 특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문장에 대한 고민없이, 자유롭게 쓰면 되는 글이 수필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시기는 지났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에세이의 본질과 형식〉에서 “형식은 하나의 세계관이고 하나의 입장이다. 또 형식은 그것이 생겨나는 바의 삶에 대해 갖는 일종의 태도 표명이다.”(게오르그 루카치 《영혼과 형식》, 반성완 역 심설당, 1988)라고 했다. 모든 작품에는 작가의 세계관을 구현하는 최적의 형식이 있으므로 작품의 구성은 단순히 형식이나 틀이라기보다는 인식의 내용이고 방법이다. 구조론을 외면한 채 단락 인식에 둔감하거나 충동적인 구성을 일삼는다면 수필이 “무형식의 문학”이 아니라고 부정해본들 무용한 일이다.

 

집필 전의 구상은 건축의 설계와 다르지 않다. 건축가는 집 지을 터와 재료, 집에 담아내야 할 공간들을 세부적으로 설계한다. 작가는 자신이 설정한 주제를 전달하고 독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 자신의 글에 적합한 구성과 형식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한다. 창작 과정에서 형식에 대한 고려 없이는 좋은 작품을 얻기 어렵기 때문이다수필은 필자가 쓰지만 집필의 주된 목적은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다.

 

형식적인 면에서 수필의 틀을 구축하는 최소 단위는 단락paragraph이며 문단과 같은 의미다. 단락은 작가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여러 문장을 연결한 묶음이다. 단어가 문장을 이루는 하위 단위라고 볼 때, 문장은 단락을 이루는 하위 단위가 되며, 단락은 완성된 한 편의 글을 이루는 하위 단위가 되는 셈이다.

 

단락은 형식적으로는 ‘들여쓰기’를 통해서 시작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디지털 매체 시대에서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모든 문장을 한 줄씩 띄어 쓰는 일도 흔하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글의 생산과 소비 증가로 단락의 형식 파괴도 확대되기 때문이다.

 

대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거나 소설적 요소를 차용한 경우에는 단락의 역할은 줄어든다. 그러나 대상을 독자에게 보여주거나 해석하고, 내면을 고백하는 경우 단락의 역할은 중요하다.

 

단락을 구성하는 문장은 작가를 드러내고 그 문장이 쓰이고 읽히는 사회를 보여준다.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을 대변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의미화하는 강렬하고 인상적인 문장을 구사하고 싶으리라.

 

《수필과비평》 9월호의 작품 중, 단락의 첫 문장을 단문으로 시작하여 주제에 다가가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류창희의 〈통곡의 벽〉은 열한 개의 단락으로 되어있다. 이 중 대부분 단락의 첫 문장은 단문短文이다. 류창희가 구사한 단문은 독자의 호기심과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신영복 교수가 20년 수감 생활 중에 가족과 주고받은 편지와 엽서를 엮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돌베개, 2018)은 간결한 문체의 진수로 남아있다. 교도소는 종이가 귀한 특별한 장소다. 그곳에서 허락된 단 한 장의 엽서를 망치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문장을 나열하고 정리한 다음 엽서에 한 자씩 썼다고 한다. 그가 남긴 엽서에는 틀린 글자나 비문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고친 흔적도 거의 없다. 긴 문장도 아닌 간략한 글이 적혀 있을 뿐인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간결하게 쓸수록 주제가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통곡의 벽〉에서 “한 남성이 운다.”라는 첫 문장은 짧은 만큼 강렬하다. 이를 단락의 주제 문장으로 세운 류창희는 우는 남자의 주변 상황을 뒷받침하는 서술로 이어간다.

 

한 남성이 운다. 허우대가 멀쩡한, 양복 차림의 번듯한 남자다. 털벅 주저앉아 발버둥 치며 엉엉 소리 내어 운다. 그러나 울음소리는 달리는 자동차 소리에 묻힌다. 동백섬, 해운대, 달맞이 고개, 수영만 요트장, 마린시티 쪽으로 가는 사통팔달 오거리 화단에 붉은색 노란색 튤립도 팬지도 곱다. 길을 건너는 사람들이 힐긋힐긋 바라본다. 대부분 관광객이거나 발걸음 가볍게 산책하는 사람들이다.  - 류창희의 〈통곡의 벽〉에서

 

“한 남성이 운다.”라는 첫 단락의 서두는 글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의 덩어리 역할을 한다. 예시한 이후의 문장들은 서두를 부연하며 생각을 뒷받침하는 사실로 서술하거나 예시, 이유, 증거들을 제시한다.

 

글의 서두는 작품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머리에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고 서두의 탄력으로 글 전체를 견인하기 때문이다. 윤오영은 “시작이 중요하다. 첫 한 마디가 전편을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 자기가 그 글을 써 보려고 느낀 동기가 있을 것이다. 그 정서에서부터 출발하면 가장 좋다. (중략) 서두에 설명이나 서론을 늘어놓지 말 일이다. 그것은 극히 문장의 정서를 죽이고 청신한 기분을 해친다.”(윤오영 《수필문학 입문》 태학사. 2001)고 했으며, 이는 수필의 서두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통곡의 벽〉의 서사의 흐름은 “통곡하는 남자의 목격담 - 남자의 울음에 대한 작가의 유추- 제자 안연의 죽음 앞에서 통곡했던 공자의 일화 - 박완서의 작품 속 통곡의 의미 -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와의 만남, 어머니의 기다림 - 작가의 통곡 - 훗날 자식의 통곡을 우려하는 모성”으로 진행된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른 후, 엄마는 그곳에서 그렇게 울었더니 한결 개운해졌다고, 너도 참지 말고 울라고 했다. 아이는 말없이 어미를 바라보다가, 앞으로는 “저 때문에 울지 마”시라며 애써 가볍게 말한다. 어미가 되어 자식에게 ‘육시戮屍랄’이다. 자식을 두 번 죽이는 철없는 어미다. 자식 앞에서 차마 울어서는 안 되는 통곡의 벽이다. 훗날, 자식은 어미를 아프게 했던 기억으로 통곡을 할 시간이 더 길기 때문이다.  - 류창희의 〈통곡의 벽〉의 결미

 

이글의 도입 부분에서 류창희가 단락의 서두와 글의 중간에 구사한 몇 단락의 첫 문장만을 나열해 보자. “한 남성이 운다.- 왜 울까? - 공자께서 제자 안연이 서른세 살에 단명하여 죽었을 때, 울었다. - 나도 위의 남자처럼 운 적이 있다.” 이렇듯 눈물을 화소로 한 각 단락의 첫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 작가의 의도가 읽힌다.

 

눈물을 흘리는 행위는 단순한 감정의 표출만은 아니다.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적인 연극의 효과를 ‘카타르시스 Catharsis’로 표현했다. 눈물로 인해 불안. 긴장감 등의 해소와 마음이 정화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카타르시스’ 효과는 후세에 이르러 눈물의 화학적 성분도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과학적 사실로 입증된 바 있다. ‘카타르시스’는 현실에서 풀기 어려운 응어리를 해소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며 심리학에서는 정신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눈물의 카타르시스 효과를 떠올리게 하는 〈통곡의 벽〉에서 단락은 글 전체에 기여하는 부분으로써 역할은 물론,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완결된 의미 또는 소주제를 나타낸다. 류창희가 단락의 서두와 글의 중간에 구사한 단문은 “통곡할 겨를도 없이 살면, 허균이 <통곡헌기>에서 말하듯, 팽함彭咸이나 굴원屈原처럼 바위를 가슴에 안고 물에 몸을 던지거나 바위에서 뛰어내리게 된다.”라는 문장에 다다르기 위한 치밀한 구성임을 알 수 있다.

 

 

심선경의 〈살아있는 집〉은 “퇴직하면 꼭 한 번이라도 전원생활을 해보고 싶어서 시골 빈집을 구하러 여러 군데 발품을 팔았”던 시간으로 채워졌다. 집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시골집 순례에서 빈집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언젠가는 가족들의 따뜻한 입김이 서렸을 집이지만, 오랜 시간 집을 지탱하던 서까래는 물론 지붕, 문 창살 등은 서서히 흙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폐가로 남은 누군가의 집을 바라보는 작가의 심정은 착잡하다.

 

작가가 구사한 단락의 첫 문장은 문장과 문장의 상호관계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단락의 적절한 분할과 매 단락의 첫 문장 배치 등 이러한 문장 쓰기의 탁월함은 글 전체의 흐름에서 보면 주제의 밀도를 더한다.

열한 개의 단락으로 구성한 〈살아있는 집〉에서 작가가 배치한 단락의 첫 문장을 배열해 보자.

 

비 온 뒤 개망초가 마당을 죄다 점령했다.

부드러운 바람의 숨이 드나들었을 들창문은 이제 문살만 앙상하게 남아있다.

마치 공포영화 촬영지처럼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놓은 세트장 같다.

이 집주인은 무엇이 그리 급해서 가재도구며 가방이며 구두까지 다 버려두고 여길 떠났을까.

동네에는 폐가가 여럿 보인다.

석면 슬레이트 지붕 아래, 서까래든 문창살이든 사람의 온기가 떠난 집의 모든 것들은 서서히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푼다.

굳이 문 열고 들여다보지 않아도 저 속의 삶을 속속들이 알 것만 같은 집. 이미 묵은 것들,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은 누군가에겐 꽃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기도 하고 상처의 흔적으로 이 집에 들러붙기도 하였으리라.

늘 새롭고 좋은 집들만 들여다보던 내가 안목이 조금 넓어진 걸까. 요즘은 낡고 오래된 것들에게 더 애착이 간다.

재개발 구역에 들어 이름 있는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아랫마을에도 으리으리한 저택부터 고만고만한 주택들이 많았는데 시공사에서 보상이 끝났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대문에 빨간 페인트로 숫자가 표시된 집부터 용역업체 사람들이 철거를 시작했다.

깊어진 생각만큼 가슴에 품을 것이 더 많아진 이곳, 나는 종일 안팎이 허물어지지만 여전히 작은 생명들이 숨을 쉬고 바삐 움직이는 폐가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고 서 있다. - 심선경의 〈살아있는 집〉에서

 

이렇듯 〈살아있는 집〉은 각 단락의 첫 문장만으로도 글의 정연한 흐름과 주제를 파악할 수 있다. 각 단락은 작가의 중심 생각을 ‘소주제 topic’로 담은 완결된 문장으로 짜여있다. 〈살아있는 집〉에서의 각 단락은 그 자체만으로 완결성이 있는 글 속의 글이며, 소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문장들 간의 일관성 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작가의 눈에 비친 사물의 정체성을 통찰할 때 물상의 희로애락에 공감하는 작가의 시선이 담지되지 않은 경우 건조한 기록이 되거나 공허한 메아리에 머물게 된다. 〈살아있는 집〉 속의 집은 현재 주거지로서의 기능과 온기를 잃은 허물어진 빈 집이다. 그러나 작은 생물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그곳에서 살았던 이들의 삶에 공감하는 심선경의 연민이 담겨있는 한 살아있는 집이다. 수필문학의 질료인 소재와 제재는 작가의 시선이 머무는 자연이나 인생의 고락, 사회 현상들과 부조리에서 가져오게 마련이다. 대상에 대한 외경, 인간에 대한 공감이야말로 문학의 근원이며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중편 에세이’에 실린 정희승의 〈토정월기土亭月記〉는 인터넷 운세 사이트에서 재미 삼아 검색해 본 토정월기가 발단이다. 매월 재미삼아 본 작가의 토정월기 세 줄을 예시로 들고 한 두 단락으로 주변의 일상을 서술한다. 여기에서 작가가 구사한 형식은 각각 3행의 운세를 제시하고 하단의 단락은 뒷받침 문장들만을 배치함으로써 숨겨진 소주제를 유추하도록 하는 방식을 취했다.

 

운세의 적중 여부는 작가의 생활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분수를 지키면 길하다”, “필히 청운에 오르다”. “출타하면 길하다” 등 믿어도 좋고, 믿지 않아도 그만인 말의 화려한 잔치인 운세에 괘념掛念치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달의 토정월기를 예시로 들었다. 운세는 운세일 뿐 정작 그것에 초연한 작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각 문단의 서두만을 나열해 보자.

 

새해가 밝아오면 인터넷 운세 사이트에서 재미 삼아 토정비결을 본다.

나이가 드니 이가 성치 않다.

바람이 불면 구름의 행로를 읽고 비가 오면 빗소리를 듣는다.

조용히 보내고자 책을 읽는다.

부질없이 또 한 살을 더 먹었다.

‘예까지 오다’라는 말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설을 쇠고 올라오는 길에 임사체험을 한 사람을 만났다.

8일에 코로나 부스터 샷을 맞았다.

치과 병원에 들렀더니 이를 뽑은 곳에 뼈가 차올라 굳어야 하니 5월 이후에나 임플란트 시술이 가능하단다.

6일이 넘어서자 벚꽃이 피기 시작한다.

부녀회가 주관하는 벚꽃 축제도 으레 이즈음에 열린다.

중순에 접어들자 올해도 어김없이 암컷 잉어들이 대여섯 마리의 수컷을 달고 나타난다.

5일에 임플란트 시술을 했다.

8일에 일본의 아베 전 총리가 피격을 당했다.

토정월기를 쓰다 보니 어쩐지 내 운에 비해 작고 소박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매사 크게 욕망하지 않는다.

 

〈토정월기土亭月記〉는 소소한 작가의 일상에 머무르거나 계절의 흐름과 자연의 변화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독자를 놀라게 할 만한 스토리텔링도 없다. 그러나 소소한 일상 서술과 시사성을 띤 구체적 서사와의 연결을 통해 추상적 관념에서 벗어나 생동감을 부여한다. 일상사의 체험을 사유하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지혜와 철학을 한 자락 숨겨두었다. 자신의 운에 비해 소박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 작가는 욕망을 버린 자신의 삶을 성찰함으로 귀결된다.

 

부질없이 또 한 살을 더 먹었다. 그런데도 전혀 배가 부르지 않다. 헛헛하기만 할 뿐. 아니, 먹었다는 말은 당치도 않다. 나는 어느덧 예까지 왔다. 이 나이에 어렵게 당도했다. 우린 삶의 끝을 향해 쉬지 않고 걸어가는 나그네다. 현재의 나이를 행년行年이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작가는 삶 자체를 가볍게 보거나 단순하게 여기지 않기에 “예까지 오다.”라는 의미에 비중을 둔다. 이 글의 어떤 면은 의식적 모더니즘을 실천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연상케 한다. 박태원은 소설에서 반복되는 일상 중의 하루를 포착하여 소외와 고독을 뛰어넘은 예술가로서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다. 내면과 현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오간 박태원은 자유 연상과 내적 독백의 다양한 기법을 통해 지식인의 내적 고뇌를 표출했다.

 

당시의 작가들은 빈부의 갈등이나 식민지인의 비애를 그려 내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는 그런 의식이 거의 보이지 않고 “계급이라든가 민족 문제와는 거리가 먼 근대 도시의 사소한 풍경들이 소설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당시 독자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뚜렷한 사건이나 갈등도 없이 한 지식인의 따분한 하루를 그려 내고 있을 뿐이어서, 이 작품을 간과했다. 글쓰기는 작가에게 현실이나 근대적 일상성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설 방법을 모색하는 행위가 된다.”(강영주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7》, 휴머니스트. 2006. 에서 발췌)고 보았다.

 

소설에서 고독한 산책자로서의 구보 씨의 빈번한 독백이 제시되고 일일 공간의 이동에 따라서 사건이 진행되지만, 사건과 사건이 밀접하게 연관된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 기존의 질서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문학의 요소에 대해 회의하고 반성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정희승이 〈토정월기土亭月記〉에서 모티프로 차용한 ‘토정월기’는 아카이브에서 뽑아준 운세일 뿐이다. 따라서 작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거나 일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작가는 일상에서 음악 감상, 독서, 치아 치료에 공을 들이고 임사체험을 한 사람을 만나거나, 코로나 부스터 샷을 접종하고, 대통령 선거일에 투표도 한다.

이렇듯 매일이 다르지만 큰 변화는 없어 보인다. 그의 일상에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발발과 아베 총리가 피격이 있다. 그 사이 연례행사처럼 벚꽃이 핀다. 이 글의 결미에서는 세파에 무심하듯 타인과의 관계에서 초연해지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을 담았다.

 

이제는 매사 크게 욕망하지 않는다. 내 생각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다시 말해 세상을 망가뜨리는 일에 관여하기 싫다는 뜻이다. 그저 세상이 나를 품고 있듯, 나도 아픈 세상을 안고 살고 싶을 따름이다. 더는 어쩌겠는가. 삶과 세상을 사랑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정희승이 산책하듯 무심히 그린 일상은 그가 관찰한 외적 풍경과 자신의 내면 풍경이 중첩되면서 미묘한 고리로 연결된다. “삶과 운명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운명은 사건을 통해 변화와 곡절을 만들어내길 좋아한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작가는 정작 사건을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 이렇듯 현실과 의식이 포개지는 작가의 내면은 운명에 순응하기보다는 그것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추구하려 한다.

 

작가는 운명과 밀접해 보이는 운세를 나열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는 그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소설 속의 구보 씨가 산책에서 많은 것을 관찰하지만 생활에 편입되지 않았듯이 정희승의 시점은 객관적 현실을 관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아픈 세상을 안고” 살아가되 “세상을 망가뜨리는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으로 최운숙의 〈춤사위〉는 천변 산책로 풍경에서 시작된다. 걷는 이들로 넘쳐나는 산책로 풍경은, 근래 전 국토가 둘레길화化될 정도의 걷기 열풍을 실감케 한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걷기를 ‘청복淸福’, 즉 맑은 즐거움이라 했다. 《동의보감》의 허준은 “약보藥補보다 식보食補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行補가 낫다.”고 했다. 이는 약과 밥보다 걷기가 최상의 보약이므로, 아무리 좋은 운동이나 노동을 하더라도 걷기만큼 즐겁고 건강에 이로운 것이 없다는 의미다.

 

〈춤사위〉는 ‘걸음걸이’를 화소로 했으나 직립보행 인간에게 작용하는 걷기의 가치를 새기거나 예찬하는 일 등과는 거리를 유지한다. 세대와 무관하게 걷는 이들로 넘치는 천변에서 타인들의 걸음걸이를 보고 그들의 삶을 유추할 뿐이다. 각자 걸어온 삶의 시간의 흔적이 서린 걸음걸이는 작가의 묘사처럼 다양하다.

 

저마다 자신만의 춤사위를 펼친다. 삐뚤빼뚤 빠져나온 몸짓은 뭉툭하거나 날카롭다.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기록이다. 그 기록은 대체로 한 박자 느린 노래처럼 호흡을 벗어나 있다. 징과 꽹과리를 곁들이면 마당놀이 한판으로 거나해지겠다.

 

작가가 바라본 노인들의 걸음걸이다. 느긋한 호흡의 마당놀이처럼 급히 걸어야 할 일도, 직선을 이루며 걸을 필요도 없는 노년의 걸음걸이는 젊은이들에 의해 제압당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인들을 추월하는 청년들이 나타난 것이다. 청년의 특권인 듯 경쾌하고 거침없는 발놀림으로 인해 천변 풍경은 “펄떡이는 청년과 구부정한 중년의 걸음이 합쳐져 풍류의 마당”이 된다.

 

이와 반대로 노년의 걸음은 판소리와 같다. 목을 긁어대는 걸쭉한 소리는 인생의 정한이 담겨있다. 농촌 장터의 광대로 살다 창옷과 갖신을 신은 내로라하는 인생이다. 숱한 희로애락과 풍파를 이겨냈으니 다채로운 감정이 들어있다. 고수와 청중만 있으면 춤가락 하나는 멋들어지게 뽑아낸다. 누군가 곱사춤을 추면 몇은 웃고 몇은 울고 몇은 돌아앉을 것이다.

 

이 수필은 단락의 첫 문장에서 핵심 내용을 제시한 후 구체적인 부연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와 반대로 노년의 걸음은 판소리와 같다.”라는 소주제문을 첫 문장에 배치한 후 뒷받침해주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판소리와 같은 노년의 발걸음에 대한 유추는 앞 문장과의 관계가 명확하다. 단락의 첫 문장에 핵심 내용을 담아서 쓰고 난 뒤로 보충하는 문장을 이어 쓰는 이와 같은 형식에서 독자는 글의 핵심 내용을 쉽게 파악한다.

 

〈춤사위〉에서 최운숙의 논리 구축이 명확해지는 몇 단락의 첫 문장만을 따라가 보자.

 

작열하던 한낮의 열기가 잦아들었다.

양쪽 길이 만나는 곳에서 만 보 걷기가 시작된다.

저마다 자신만의 춤사위를 펼친다.

(중략)

이와 반대로 노년의 걸음은 판소리와 같다.

나는 한쪽 어깨를 늘어뜨린 분의 뒤를 걷고 있다.

느린 걸음이 되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목표지점인 공원에 도착했다.

태양의 열기가 조금씩 사그라지는 예닐곱 시간이 되면 노을은 점점 붉게 타오른다.

사는 모습은 다양하지만 정한을 드러내는 몸짓은 닮아있다.

 

제시한 단락의 첫 문장만으로도 작가가 의도한 작품의 주제가 그려진다. 최운숙은 천변을 걷는 이들의 걸음걸이를 통해 그들의 삶의 궤적을 가늠해 본다. 걸음은 단순한 보행이 아닌 저마다의 삶의 정한을 드러내는 몸짓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의 걸음걸이를 파악할 수 없다. 무방비하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타인의 모습인 뒷모습과 다르지 않다.

작가는 산책의 목표지점인 공원에 도착하여 엄마와 함께 놀고 있는 아이를 본다.

 

공원에는 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엄마와 함께 놀고 있다. 사뿐사뿐 걷다 폴짝폴짝 뛰어오르더니 몸을 앞으로 실어 냅다 달린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팔꿈치를 올렸다 내렸다 한다. 그런가 하면 뒷짐 지고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올리며 어른 흉내를 낸다. 잠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 동안 보고 있자니 아이의 걸음에 청년과 중년, 노년의 걸음이 담겨있다는 생각이 든다. ‘옳다구나’ 이 어린아이 걸음이야말로 느림과 빠름과 기쁨이 담겨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이 아닌가.

 

작가가 서술에서 인간이 성장할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어린아이에게서 발견한 니체를 유추할 수 있다. 니체는 “인간 정신의 3단계”에서 본래의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 안수를 위해 많은 짐을 지고 있는 낙타의 단계와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지만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자의 단계에 대해 말했다. 이어서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아이들의 순수한 호기심”(사이토 다카시 《곁에 두고 읽는 니체》 이정은 옮김. 홍익출판미디어그룹. 2021(214쪽).이라고 했다. 니체가 “거룩한 긍정의 존재”로 어린아이를 바라보았듯이, 작가가 도착점에서 만난 어린아이의 모습은 “느림과 빠름과 기쁨이 담겨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이었다.

 

누구나 어린아이처럼 유희하듯 즐겁게 살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작가가 관찰한 저마다의 걸음걸이에 새겨진 삶의 옹이와도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생명력이 충만해질 때 인간은 아이의 정신으로 경쾌한 기쁨을 느낄 수 있으리라.

 

 

지금까지 문단의 소주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문장 간의 일관성을 확보한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글 한 편의 주제는 그 글이 다루는 중심 생각이고, 한 문장의 주제는 그 문장이 다루는 중심 생각이듯이 단락의 주제는 그 단락이 다루는 중심 생각이다. 따라서 한 편의 글이나 한 문장과 마찬가지로 주제를 지녀야 한다.

 

근래에는 수필이 특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내는 글이라는 인식을 넘어 형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었다. ‘어떻게 말하는가’는 ‘무엇을 말하는가’와 함께 문학의 심미성이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수필의 기본 성격인 형식의 자유로움과 더불어 형식과 구성의 문제는 긴밀한 연계선 상에 있다.

 

수필이 갖는 길이의 보편적인 제한성은 대체로 원고지 15매 내외다. 따라서 수필의 문장은 장르의 형식적인 특성상 간결해질 수밖에 없다. 수필의 길이 제한을 차치하고라도 문장은 간결할수록 가독성이 있다. 지지부진한 설명이나 보편타당한 일반론을 앞세울 필요는 없으며, 수필 창작에서 형식과 내용은 명백히 분리될 수 없다. 수필이 형식에 제한은 없으나, 구성 문제는 문학적 성취와 밀접하다. 두 가지 측면은 대립 구도가 아니며 수필 창작에서 형식과 내용은 명백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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