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 '가을날' 단상 / 이덕형 (경북대 독어독문학과 교수)

 

 

조석으로 소슬바람 불어오니 가을이 오기는 온 모양이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자연의 섭리마저 어찌 되나 싶었는데, 다행이다. 곧 추석,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큰 명절도 올해는 예년 같지 않다. 사색의 계절에 새삼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는 진정 행복한지를 자문해 본다.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심취해 봤음직한 릴케의 시 '가을날'을 통해서다.

 

"주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름은 정말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올려놓으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주소서." 대자연의 위대함에 대한 찬사는 제2연으로 이어진다. "마지막 결실이 꽉 차도록 명해 주시고,/ 그 결실에 이틀만 더 남쪽의 따스한 낮을 주시어/ 무르익도록 재촉하시고,/ 무거워져 가는 포도에 마지막 달콤함을 넣어 주소서."

 

1902년 27세의 청년시인 릴케는 생애 처음 방문한 월드시티 파리에서 심적·물적 어려움을 크게 겪고 있었다. 현대사회의 각종 병리현상을 목도하면서 시인은 무신론자임에도 '주님'에게 위대한 여름과 풍요로운 결실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간의 따스한 낮'을 기원하는 대목에서는 '포도의 마지막 달콤함'으로 표상된 최고의 예술작품에 대한 시인의 간원이 느껴진다. 그러나 뒤이은 제3연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인간의 질서가 자연의 질서에 극명하게 대비된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홀로/ 깨어 앉아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며,/ 낙엽 날리는 가로수 거리를/ 이리저리 불안하게 방황할 것입니다."

 

문제는 '집'이다. 여기서 시인은 '집'을 구체명사가 아닌 추상명사, 곧 '고향', 그것도 '마음의 고향'으로 썼음이 분명하다. 고독과 소외와 상실의 20세기를 미리 넘겨본 것일까 시인은 현대인의 고향 상실을 예감한다. 고향을 잃어버린 현대인은 한밤중에 잠 깨어 낙엽 흩날리는 길거리를 서성이며 고독을 되씹을 수밖에 없다. 고도로 추상화시켜서 말한다면, 행복과 자연은 비례한다. 삶이 자연의 일부였던 지난 시대의 삶이 불편했을지언정 반드시 불행했다고만 할 수 없는 이유다. 옛사람들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라고 읊조렸지만, 지금은 산천도 인걸도 간 데 없다. 바야흐로 총체적인 고향 상실, 인간 상실의 시대다.

 

어젯밤 아파트 숲 불빛에 별빛이 사라진 신천변을 한참 지나 가창댐 산책로를 아내와 함께 걸었다. 저 멀리 북극성이 아스라이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문득 필자가 각별히 좋아하는 루카치 '소설의 이론' 첫 구절이 떠올랐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의 지도였던 시대, 별빛이 훤하게 길을 비추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세계는 넓었고 집처럼 아늑했다. 자아와 세계, 내면의 불꽃은 천공의 별빛이었고, 별빛 속에 내면의 불꽃이 감싸여 있었다." 옛날 누군가 '낙엽을 태우며'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져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제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대장정에 용감하게 나서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