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 그 고요의 얼굴 / 정태헌

산책길,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덩굴 앞에서 발걸음을 멈춥니다. 늘 걷는 길이지만, 그 앞에서 멈춰선 적이 거의 없었지요. 익숙해서 그저 무심히 지나치던 풍경이었으니까요. 오늘따라 담쟁이잎의 푸르던 기운이 마지막 힘을 쓰듯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찰나가 눈에 잡힙니다. 늘 보던 잎이었는데, 오늘따라 둥근 장과 형태의 검은 열매가 새롭고, 톱니 달린 잎의 색깔 경계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습관이 만든 마비에서 깨어나 제자리에 고요히 붙들린 상대, 아마 내 안에서 시간을 거슬러 보려는 시도일 겁니다.

이 멈춤은 단순히 낯설고 혼란스럽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끄러운 세상 소리에 가려듣지 못했던, 삶이 들이미는 솔직한 질문의 얼굴처럼 다가옵니다. 그동안 쉴 새 없이 달려왔습니다. 시곗바늘은 봤지만, 정작 지나온 세월의 색깔은 희미했지요. 늘 움직였지만, 정작 삶의 중요한 데서 쉼표를 찍는 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 쉼표를 찍고 고요히 서 보는 자세, 그것이 바로 '우두커니'의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우두커니 서있는 자세는 겉보기처럼 공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충만함이 깃든 느낌입니다. 쉼표를 찍은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고요 속에서 세상의 무게를 군말 없이 받아내는 형국인 셈이지요. 이는 무력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쩌면 능동적이고, 가장 깨어있는 자세로 다시 서는 일입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에서, 가끔은 휩쓸리지 않고 바위처럼 가만히 서 있어야 할 때가 있지요. 바위의 잠잠함이야말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깊은 생각의 얼굴처럼 비칩니다.

담쟁이덩굴이 기어오른 벽 앞에서 우두커니 서면, 내 안의 풍경이 그제야 또렷하게 펼쳐집니다. 서늘한 바람을 맞을 때, 내 몸이 이 세상과 어디에 맞닿아 있는지 정확히 느낄 수 있습니다. 멈춰 서야 비로소 내가 정말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지금 내 영혼이 어디쯤 서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됩니다. 담쟁이가 긴 시간을 들여 꼼지락거려 벽을 채우듯, 멈춰선 자세는 곁만 보는 행동이 아니라 내면을 완성하는 능동적인 행위로 작용합니다.

담쟁이잎이 붉어지는 가을의 시간은 이 멈춤의 본질과 닮았습니다. 멈춰서 올려다보니, 내가 걸어온 길과 이 잎들이 가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멈춤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아닙니다. 외려 흐름을 제대로 보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걸 다시 배열하는 강력한 인지의 행위가 될 수 있으니까요. 멈춤은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를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서두르면 잃는 게 많지 않던가요. 우두커니 멈췄더라면, 무심히 지나친 찰나의 순간에 이미 마음이 정답을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산길에서 바삐 걷다 잠시 멈춰 섰더라면, 흙더미 위로 돋아나던 여린 새싹의 첫 모습이나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았던 희귀한 새의 움직임을 놓치진 않았을 겁니다.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비로소 서둘렀기에 놓쳤던 결정적인 깨달음을 되찾기도 하고요. 멈춤은 움직임 속에서 생긴 사소한 상실을 모아 삶의 소중한 지혜로 바꾸는 역동적인 작업이기도 합니다.

우두커니 서있는 고요에는 상실의 기억도 그림자처럼 따라오더군요. 지난 계절, 영원히 곁을 떠난 그에 대한 기척을 느끼며, 숨결이 담긴 그의 낡은 흑단 묵주를 우두커니 서서 만지작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 부재를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담쟁이 잎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벽에서 떨어지듯 애써 흘려보내려고 합니다. 상실은 깊은 상처이지만, 멈춤 속에서 잠시 머물면 상처를 넘어선 사유의 그림자가 되어 주기도 합니다.

"그곳에 잘 갔을까."

나지막이 흘린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낙엽 하나가 발치에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낼 뿐입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일은, 들리지 않는 대답을 마주하고 다시 기다리는 고요한 몸짓입니다. 이는 침묵 속에서 나만의 해석을 찾는 고독한 자세지만, 고요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우두커니 서있는 것은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허무가 아닌, 가장 충만한 무위의 자세로 다시 서는 일입니다. 삶의 소란에 휩쓸리지 않고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저 잠시 눈을 감고, 붉게 물들어가는 담쟁이 잎이 시간을 견디며 계절을 건너는 모습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의 본질을 붙잡는 가장 강력한 행위입니다. 진정한 고요는 멈춤 속에서만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우두커니’를 삶을 지탱하는 지렛대로 삼으렵니다. 이것은 흐름에 맞서는 싸움이 아니라, 흐름이 잠시 멈춰 물의 깊이를 재보게 함으로써 흐름을 완성하는 또 다른 힘이 됩니다. 어쩌면 가장 조용한 순간에 가장 큰 울림입니다. 우두커니, 멈춤은 끊어짐이 아니라 이어짐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중단입니다. 이 고요한 숨결 속에서 비로소 가야 할 다음 걸음의 방향을 가늠해 봅니다. 발걸음을 옮겨 산책길을 재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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