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라와 시간의 배를 타고 / 민명자
아마포 붕대로 전신을 감싼 미라 여러 구가 유리 진열장 안에 곱게 누워 있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옆의 작은 안내표지가 성별을 알려준다. 요즘엔 일일이 붕대를 풀지 않고도 CT 스캔 기술로 남녀성별을 알 수 있단다. 한쪽 벽의 화면에선 미라 내부를 동영상으로 속속들이 보여준다.
영원히 살고 싶은 꿈은 인간의 오랜 염원이던가. 고대 이집트인들에겐 내세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던 듯하다. 예술의 전당 〈이집트 미라 전: 부활을 위한 여정〉 전시장에서 만난 미라들이 그 소망 한 자락을 보여준다. 수천 년의 시간을 지나 머나먼 대한민국 땅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나름대로 영생을 실현한 것인가. 미라와 유물 하나하나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되새기게 한다.
사람 얼굴과 몸통 형상을 한 미라의 목관 뚜껑에는 신의 도상과 주술이 화려한 색채로 그려져 있다. 도록에 따르면 “1799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서 로제타스톤이 발견된 후, 1822년 프랑스 언어학자인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이를 해독”했다 한다. 이로써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문화를 읽을 수 있는 길이 열렸으니 한 사람이 남기는 업적은 그만큼 위대하다. 덕분에 우리는 이집트 상형문자인 ‘히에로글리프’로 쓰인 내용과 여러 신이나 사람 또는 동식물의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사후세계에서도 온전히 살려면 육체보존이 우선, 그래야 죽은 자의 영혼이 자유롭게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던 이집트인들은 미라를 만들면서 심장과 신장은 몸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위, 장, 폐, 간 등 나머지 장기는 꺼내어 카노푸스 단지에 따로 담되 각각 수호신 형상의 뚜껑을 만들어 덮었다 한다. 모든 장기 중에도 특히 숨결과 혈액 순환을 관장하는 심장과 노폐물을 걸러내는 신장을 중히 여겼던 듯하다. 하긴 내세에 가서도 숨을 쉬어야 하고 독성이 쌓이면 살아갈 수가 없을 테니까. 더구나 내세로 갈 때는 심장의 무게로 심판을 받아야 한단다. 심장을 저울에 달아, 진실을 나타내는 여신의 날개 깃털보다 무겁거나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괴물에게 잡아먹혀 영생의 꿈이 무산된다니 어찌할꼬. 이는 현세에서 거짓 삶으로 죄의 무게를 더하지 말고 선량하고 참된 마음으로 살라는 지침이자 경고인 듯, 섬뜩하다.
영생하려면 부활은 필수다. 그래서인지 부장품 중엔 부활의 상징물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건 태양을 상징한다는 쇠똥구리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처럼 부활하라는 의미를 담은 쇠똥구리 장식을 미라의 가슴에 부적처럼 얹었고, 목걸이 등 장신구에서도 쇠똥구리는 중심을 차지한다. 살아있는 자들도 부적을 소중하게 지녔다. 풍요나 치유, 행운의 힘을 믿으며 신들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외에도 여러 동물의 미라가 죽은 자를 위험에서 지켜주는 부적 역할을 한다고 믿어 부장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게 깊은 울림을 남긴 건 파피루스에 적힌 ‘사자(死者)의 서(書)’였다. 우리가 여행할 때 지도가 있어야 하듯, 죽은 자도 사후세계에서 길을 제대로 찾아가려면 안내지도가 있어야 한다는 게다. 현세의 인생길에서도 길 잃고 헤매기 일쑤거늘 ‘생자(生者)의 서(書)’라도 있다면 오죽 좋을까. 사후의 여정에서라도 안내서가 있다니 다행이다. 그림과 주문(呪文)에 따라 저승에서 만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자의 서’는 신관이 시신의 겨드랑이에 곱게 끼운다. 설명과 현물을 실제로 보니 마치 이집트에 가 있는 듯, 아니면 내가 빙의되어 내세를 여행하듯, 생사의 경계가 아련하다.
자, 이제 사후세계로 갈 준비가 다 되었다. 부적도 달고 사자의 서도 가졌다. 그럼 이제 어떻게 떠나야 할까. 새처럼 훨훨 날아서? 아니면 뜨거운 사막을 가는 낙타처럼 터덜터덜 걸어서? 아, 저쪽에 돛단배 한 척이 보인다. 부장품 중엔 돛단배 모형도 있다. 배의 갑판에는 미라가 누워 있고 수로 안내인도 있다. 나일강이 이집트의 젖줄인 점을 감안하면, 그들 삶과 밀착한 돛단배의 등장은 사후세계에서도 낯설지 않다. 이승에서 저승의 경계를 넘는 하데스의 강을 건너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리라. 돛단배를 탄 미라들, 내세에서의 항해가 시작된다.
장례문화는 시대와 민족과 종교에 따라 다르다. 시신을 거두는 방식도 그러하다. 자연에 유기하여 비바람에 풍화시키는 풍장(風葬), 시신의 소멸을 조류에 맡기는 조장(鳥葬)이 있는가 하면, 일반적인 매장과 화장 외에 수장(水葬)도 있다.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하늘 장(葬)’도 치른단다. 화장한 유해를 헬륨가스로 채운 풍선에 날려 보내는 ‘풍선 장례식’이다. 누적된 고령자들의 다사(多死), 고인과 가까운 추모객 감소, 매장지 부족 현상 등이 빚은 반향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엔 산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는 고려장과 순장도 있지 않았던가. 한 어머니가 떠오른다. 꽃구경 가자던 아들 말 믿고 “좋아라고” 등에 업힌 어머니, 그런데 이를 어쩌나. 마을과 들길 지나 산자락 숲길에 접어들자 “아이구머니나”…. 뒤늦게 알아차리고 말을 잃는 어머니, 그렇건만 오히려 아들 혼자 돌아갈 산길에서 길 잃을까 걱정하여 아들 등에서 한 움큼씩 솔잎 따서 길바닥에 뿌리며 가는 어머니, 김형영 시인이 쓴 시 <따뜻한 봄날>이 보여주는 정경이다. 풍습에 떠밀려 고령의 어머니를 버려야 했던 아들, 어머니가 뿌려둔 솔잎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아들 심정은 또 어땠을까. 언제 읽어도 절절하다. 장사익 님은 이 시를 <꽃구경>이란 노래로 바꾸어 불렀다.
문득 드는 생각 하나, 과연 사후세계가 있을까. 간혹 의학적 죽음 판정을 받고 임사체험(臨死體驗)을 하며 살아난 이들의 증언을 들을 때가 있다. 한없이 펼쳐진 꽃길을 걸었다는 이, 지옥을 경험했다는 이, 조상을 만났다는 이도 있다.
만일 사후세계가 있다면, 전지전능하신 분이 계셔 ‘너,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주겠노라.’ 하신다면, 나는 그 뜻을 순순히 따를 것인가, 아니면 싫다고 고개를 저을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몇몇 지인에게 지나는 말처럼 물었다.
답은 대개 순응이나 거부, 둘 중 하나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이들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건 숭고한 일이잖아요. 푸른 하늘과 꽃과 나무를 감상할 수 있고, 철학과 놀며 사색하고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건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 아닌가요?”라고 반문하거나, “남녀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어요. 엄마 되고 할머니 되어 아이들 돌보는 게 뿌듯해요. 그 벅찬 기쁨 다시 누리며 살고 싶어요.”라고도 한다. 유복한 가정에서 다시 태어나 부모님 사랑 듬뿍 받아보고 싶다거나, 못다 이룬 꿈 꼭 성취하고 싶다는 이도 있다. 반면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이들은 “그냥, 영원히 안식하고 싶어요.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요”라고 하거나, “태어나서 우유병 입에 무는 순간부터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경쟁에 던져져요. 다시 경쟁하며 살고 싶지 않아요. 지겨워요.”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아주 단호하게, 다음 생에서는 더 좋은 남자 만나고 싶다고 말해서 함께 웃기도 했다. 그 반대로 더 좋은 여자 만나고 싶다는 남자도 있지 않을까. 남편에게 짓궂게 물었다. 금수저로 새로 태어나고, 다른 여자랑 살게 해준다면 받아들이겠느냐고…, 되지도 않을 소리를 왜 하느냐고 핀잔만 들었다. 사후세계란 터무니없는 몽상일지, 어쨌든 나는 영원한 안식 쪽에 무게를 둔다. 설령 지금보다 더 나은 생을 살 수 있다 해도, 어차피 선계(仙界)가 아닌 인간 세상에선 이쪽이든 저쪽이든 생존게임은 별반 달라질 게 없을 터, 속진(俗塵)에 이리저리 몸 부대끼며 사는 일은 한번 생으로 족하다. 그저 내게 주어지는 하루하루 감사히 받고, ‘지금, 여기’의 존재로 한세상, 나이 잘 들며 살다 가면 된다.
내세에 대한 확신은 때로 현세의 고통을 이겨내거나 생의 성찰과 희망을 구하는 버팀목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영생의 기대에는 결국 죽은 자의 의지보다는 산 자의 애도와 허무 또는 종교적 믿음과 갈망 등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불로장생을 바라며 불로초 구하려 백방으로 애쓰다가 제주도에까지 ‘서복(徐福) 설화’를 남긴 진시황의 욕망도 까마득한 옛일, 아방궁에서 온갖 부귀영화 누리던 그도 숙명적인 생로병사의 그물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제 시대는 급변하여 이른바 디지털 영생 시대가 도래했다. 죽은 이가 AI(인공지능) 힘으로 부활한다. 군 복무 중 순직한 아들을 16년 만에 AI 동영상으로 재회한 엄마의 모습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비록 몸은 떠날지언정, 누군가의 마음 한구석에 오래 남아 영혼을 어루만지고 위안을 준다면 그것이 곧 영생하는 길이 아닐까. 타인을 위한 사랑과 배려가 남긴 온기, 혹은 그림 한 점이나 노래 한 곡이나 글 한 편이 주는 감동과 위로도 영생의 문을 열 수 있다. 내 안에는 고흐가, 베토벤이, 괴테가, 그리고 더, 더, 더 …, 저 먼 유계(幽界)에서 잠자던 영혼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수시로 빗장을 열고 찾아와 머문다. 선한 영향력이 이끄는 영생법이다.
수많은 별 중 작은 별 하나같은 존재,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잊힐 권리를 원하든 영생을 꿈꾸든, 사후 평가는 이승 떠난 ‘나’의 몫이 아니라 이승에 몸담고 사는 ‘그들’의 몫이다. 현생에서 삶의 숱한 갈래와 갈피를 어떻게 통과했는지, 그 길에 새겨진 발자국이 답을 가르는 빗장과 열쇠가 될 것이다. 미라와 잠시 만나 시간의 배를 타고 항해하면서 생각해본 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