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개구리는 말을 듣지 않는다 / 홍윤선
개구리를 잡아야 했다. 낙동강 하굿둑을 지나다니면 그 일이 떠오른다. 대학 전공과목 중 해부학 실험이 있었다. 그런데 실험 재료인 개구리를 학생들에게 직접 잡아 오라는 것이다. 나는 그 시절을 상기할 때마다 군대 가는 사람에게 총을 사들고 오라는 말이며 의대생에게 시신을 구해오라는 격이라며 흥분을 하곤 했다.
아무튼, 부산 지리를 잘 모르던 내가 동기들 손에 이끌려온 곳이 을숙도 부근 하굿둑이다. 지금이야 현대미술관과 낙동강 에코센터, 문화회관까지 즐비하지만 당시는 내가 살던 촌 벌판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리쬐는 초여름 뙤약볕에 도시 맹꽁이들에게 잡힐 눈먼 개구리는 흔치 않았고 시골 출신인 나의 활약을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과를 대표해서 학생 수 만큼 잡아가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왔건만 나도 개구리라면 질색을 했다. 네댓 마리나 잡았을까. 가져간 점심에 막걸리만 거나하게 마시고 왔다.
흰 가운을 입고 해부 도구를 준비해서 엄숙하게 실험실로 들어섰다. 단짝 친구는 학교 화단에서 청개구리를 한 마리 잡아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통을 냅다 흔드는 것이다. 개구리가 자꾸 나오려고 해 기절시키는 거란다.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곳곳에서 새 나왔다. 부족한 개구리를 어떻게 조달했는지, 어떤 식으로 마취를 했는지, 친구가 흔들던 청개구리는 너무 작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지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래도 해부를 무사히 마치고 오롯이 실험 일지에 결과를 남겼던 사실은 선명하다.
시골 외가는 놀거리가 지천이었다. 그중에서 나를 애태웠던 것은 미꾸라지다. 물에 빠지는 사고가 빈번했던 때라 어린 나는 안된다고 했지만 언니 오빠를 앞세우고 줄행랑을 치면 잡을 재간이 없었다. 개천이나 도랑에 이 빠진 낡은 소쿠리를 들이댔다. 물풀 주위를 발로 차서 소쿠리 쪽으로 몰면 실한 것에서부터 자잘한 것까지 미꾸라지가 걸렸다. 오빠가 뱀새끼를 미꾸라지라며 잡아와 외할머니한테 혼났다는 일화는 우리들 사이에 신화 같은 이야기다.
내 소쿠리는 늘 허탕이었다. 아니 올챙이만 가득 올라왔다. 검은 쉼표 같은 것들이 쉬지 않고 꼬리를 흔들어대는 모양새에 약이 올랐다. 그것들이 자라 마당에 나타났을 때는 더 싫었다. 꼬물거리는 새끼 쥐가 차라리 나았다. 미끄덩거리고 축축한 개구리는 올챙이 시절부터 내 눈 밖에 났다. 하지만 동네 오빠들이 개구리를 굽는 날에는 냄새의 유혹을 견디기 힘들었다. 건네는 다리 한쪽을 하마터면 덥석 받을 뻔했지만 침을 꿀꺽 삼키며 나는 도도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어스름한 저녁 무논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만큼은 여름날의 서정을 풍성하게 했다.
결혼 후 이사 와서 처음 살았던 곳은 논밭이 멀지 않아 개구리 소리가 들렸다. 살기 좋은 곳이라며 나는 좋아했지만 사람들은 선호하지 않아 동네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지금은 아파트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집 가까이 터널이 개통되면서 하굿둑을 지날 일이 잦다. 실험실의 개구리는 매번 생각이 났지만 복남 씨의 청개구리는 잊고 있었다. 어쩌면 복남 씨와 함께 그날의 청개구리도 기억 속에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복남 씨는 늘 집에 없었다. 몸뻬바지를 입고 이른 아침에 나가 해가 져서야 들어왔다. 밥도 찬물에 말아 서서 급하게 먹기 일쑤였다. 그리해도 다섯 자식을 거두기 버거웠고 큰 자식들은 원하는 만큼 공부도 시키지 못했다. 복남 씨가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촌에서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병은 이미 진행이 많이 되었다. 일 년 뒤 대처인 부산에 가서 식도암 진단을 받았다.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고 마지막으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호전이 되는 듯하여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가끔 동네 마실을 가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막내딸을 기다리는 일상을 누렸다. 죽을 만큼 아프고서야 복남 씨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민간요법이 시작되었다. 누구는 민들레가 좋다 하였고 어느 날에는 동네 사람이 굼벵이를 가져왔다.
그날은 청개구리를 잡으러 갔다. 개구리라면 소스라쳤던 나도 따라나섰다. 외할머니와 복남 씨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나들이라도 가는 듯 발걸음이 가볍다. 엄지손톱만 한 청개구리였다. 외할머니는 딸을 재촉했다. 복남 씨는 머뭇머뭇거리다 이내 돌아서서 그것을 산 채로 삼켰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막둥이 울음소리는 저승까지 들린다는 그 말이 귀에 쟁쟁했을까. 딸을 살리겠다는 외할머니의 간절함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짧디 짧은 본인의 생이 가련했었을까. 입이 밭다고 타박을 듣던 복남 씨지만 그때는 헛구역질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가을, “살으라 살으라.” 등을 두드리는 외할머니의 말을 청개구리 마냥 듣지 않고 복남 씨는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마흔여덟 살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기력이 하나도 없는데 일어났다. 부축을 하려니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다.”며 붙잡는 손을 마다하고 느린 걸음으로 재래식 화장실을 혼자 다녀왔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말이다. 살 때까지 살고자 했고 자신의 의지로 살아내려 했다. 그래서인지 아파서 메말랐던 모습보다 마지막까지 꿋꿋한 여인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생명력 짙은 청개구리의 초록을 닮았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뗄 일이 생겼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을 보고 나는 멈칫했다. 출생연월일, 주민등록번호가 다 삭제되고 이름 석 자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전. 복. 남. 엄마라고 불렀고 그 호칭마저 낯설어 버린 세월에 더는 이름을 부를 일이 없었다. 복남 씨, 얼굴을 만지듯 서류를 쓰다듬었다. 어디선가 겨울잠에서 깬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