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분 / 이이경
현관문을 열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남편의 출근길에 기사 노릇을 자청하고 나선다. 먼지 묻은 복도 창에 반사된 주황빛 아침 햇살에 온기를 느끼며 하품을 삼킨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엄마와 함께 탄 어린 형제와 눈이 마주친다. 아파트에서 초등학생 만나기가 연예인 보는 것만큼이나 귀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녀석들은 남편과 내가 타면 엄마 옷자락 뒤로 숨기 일쑤다. 우리가 활짝 웃어 보여도 본척만척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언제나처럼 큰 소리로 "안녕? 어이구 이뻐라" 하며 너스레를 떤다. 마음 같아선 꼬불꼬불하게 파마를 한 녀석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고 싶지만, 꾹 참는다. 이상한 할머니로 오해하여 아예 모른 척하면 낭패다. 미련이 남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빠이빠이 손을 흔든다. 문이 닫히기 몇 초 전, 엄마 뒤꽁무니에 숨어있다가 살짝 고개를 내민 한 녀석이 씨익, 웃는다. 아마 녀석들도 내가 좋은 모양이다. 나이 들어선지 착각도 자유다. 뒤돌아보지 않고 나도 빙긋이 웃는다. 쌍둥이를 만나는 날 아침은 괜히 두 배로 기분이 좋다. 동심은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힘이 있다.
아파트 정문을 돌아나가면 공터 풀밭의 고정 손님인 말 두 마리를 마주한다. 근처 목장에서 아침에 방목했다가 해가 지면 데리고 들어가는 놈들이다. 출근 시간도 정확하고 더위와 추위에도 늘 제자리다. 올봄엔 외롭게 한 마리만 눈에 띄었는데 요즘엔 두 마리가 나와 있어서 보기에 좋다. 그들이 봐주지 않아도 반갑게 손을 흔든다. 봄, 여름엔 여물통에 물만 가득 찼더니 서리가 내린 후에는 사료가 담겨있다. 겨울이라 바싹 마른 풀들이 신경 쓰였는데 마음이 편한다. 늘 한자리에 매여 있는 탓인지 가끔은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사진 속 배경 같다는 느낌도 든다. 환경에 순응하는 생명체가 보여주는 고독은 사람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목줄을 매고 허락된 거리만큼만 움직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녀석들의 퇴화한 야성이 안타깝다. 아마도 그들은 목장과 이 공터가 세상의 전부일 것이다.
사거리의 빨간불, 잠시 기어를 중립에 놓고 눈 아래 펼쳐진 풍경을 본다. 점점이 떠 있는 배들과 끝이 닳은 붓으로 물감을 흩뿌린 듯한 구름 떼가 시야에 가득 찬다. 남편과 나를 제주에 정착시킨 가장 큰 그림이다. 신호가 채 바뀌지 않았는데 슬슬 앞으로 움직이는 옆 차를 보며 나도 따라 기어를 바꾼다. 초록 불이 들어오자마자 뒤에서 짧은 경적을 울린다. 왜 우리는 늘 바쁘게 사는 것을 열심히 산다고 착각하는 걸까. 빨간불이 주는 여유를 아쉬워하며 천천히 좌회전을 시도한다. 문득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고 있다는 생각이 스친다.
버스 종점 앞에는 쓰레기 분리 수거함들이 줄지어 서 있다. 까마귀들의 집합소다. 색깔로 보나 크기로 보나 예쁘게 봐주기는 좀 힘들다. 날개를 한껏 펴고 저공비행을 할 때면 그 위용에 놀라기 일쑤다. 울음소리는 더 모호하고 위협적이다. 먹을거리가 부족한 요즘, 쓰레기 집합장에 모여 길고 날카로운 부리로 비닐봉지를 쪼아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게 그들의 사냥법이다. 그 덕분에 정류소 앞 좁은 도로는 늘 어지럽다. 분리수거함 전면에 비닐 커버를 씌워놓고야 사태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집하장 뒤쪽에 몰려 있다. 철책 틈 사이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유유히 조찬을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누가 그들을 '새대가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 생존을 위한 절대적 필요는 모든 생명체를 진화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겨울이 되면 동물들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낮은 곳으로 내려온다. 결핍에 대비하는 그들의 자세일 것이다.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 더미들. 그 위에 당당하게 앉은 까마귀들의 날갯짓이 아침 햇살에 강렬하다.
로터리를 지나면 토스트 가게가 나타난다. 빨간 간판이 먼저 눈에 띄고 창으로 따뜻한 빛이 새어 나오는 작은 곳이다. 스멀스멀 풍기는 고소한 버터 냄새와 향긋한 빵 냄새는 늘 허기를 유발한다. 나이 지긋한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의 토스트는 소박한 맛이지만 속이 꽉 차 있어 풍성하다. 이른 아침 길 위에서 먹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젯밤 늦게까지 분주하게 준비해서 첫 손님을 받는 부부의 기분을 상상해 본다. '보시'. 타인에게 아침을 주는 이들이 품고 사는 마음이 아닐까. 비록 돈을 받고 파는 것이라 해도 초겨울 이른 아침의 한 끼는 순정한 마음이 없으면 힘든 일이다. 가게 앞 나무 테이블과 의자가 나에게 손짓한다. '따뜻한 빵 한 조각 나누고 가라'라고.
병원으로 들어선다. 출근하는 차들의 소음과 새들의 지저귐에도 넓은 마당은 적막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침을 맞는 이들이 존재하는 곳의 풍경이다. 투명한 유리문안은 살아내려는 사람들과 살리려는 사람들이 내는 신호로 가득 찬 공간이다. 환자들에게 이곳의 아침은 어쩌면 절대자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한편으로 출입문 안쪽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활의 무게를 짊어지고 늘 출퇴근하는 일터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이곳의 아침은 매일의 시작이고 삶의 진행 현장이다. 차에서 내리는 남편에게 웃으며 힘차게 손을 흔든다. 현존의 중량과 깊이는 얼마쯤일까. 병원에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을 물음으로 남기며 차를 돌려 나오니, 한라산이 우뚝 눈앞으로 선다.
매일 같은 길을 가지만 풍경은 미세하게 변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서로 신호를 보낸다. 아침은 내게 만물 조응의 시간이다. 9분 거리를 운전하며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손을 흔들며 그 신호에 답한다.
몸과 마음이 서서히 깨어난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이 시간이 소중해서 나는 또 내일을 기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