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창문 / 공순해

 

창밖으로 아이들이 보인다. 아이들은 아스팔트에 널린 잔돌들을 발로 걷어차 멀리 보내기 내기를 하고 있다. 참으로 잠시도 가만히 못 있는구나. 집에서 나갈 때 땅에서 주운 돌을 갖고 놀지 말라 일렀더니 이젠 돌 걷어차기라도 해야 한다는 건가. 수시로 늦는 스쿨버스로 해서 그 짬을 메울 길 없기에 다만 뭐라도 하고 놀아야 한다는 뜻인지. 떠오르는 미소로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인류문화 발생 기원이 유희본능에서 비롯됐단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얘들아, 예전엔 신발 닳는다고 달리기조차 못하게 어른들이 말리던 시절이 있었단다. 이렇게 말해주면 애들은 어떤 얼굴을 할까. 그 시절 아이들은 달리기만 실컷 해도 행복했지. 지금은? 달리기만 아니라 더한 것도 할 수 있지. 그렇다면 아이들 가슴에 해처럼 들어앉아 있는 행복의 크기는 어떨까. 어느 쪽 아이들의 크기가 더 클까. 저만할 적에 잘하던 놀이에는 냇가에 앉아 고무신 구부려 배처럼 띄우는 것도 있었어. 금모래를 가득 담아 물에 띄우면 정말 배처럼 기우뚱거리며 흘러갔어. 하지만 잽싸게 낚아채야지 그대로 놔뒀단 아예 고무신을 잃기 십상, 여러 번 고무신을 떠내려 보내고 어머니에게 된통 혼났었어.

떠나보낸 신을 것들. 기억 속의 첫 부분엔 꽃버선이 있어. 언니가 수놓아 만들어줬던, 버선코에 빨간 꽃술이 달렸던 꽃버선. 그러나 그건 피란 열차에서 잃어버렸지. 열차에 오르자마자 버선 벗기라고 고집을 부려서 구속을 못 견뎌 하는 기질이 그때부터 있었던 걸까.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벗고 앉았던 중 열차가 피격됐기에 허둥지둥 겨우 몸만 피하느라 버선은 찾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했어. 피란에서 돌아와서도 아무튼 모두 버선 신고 살았던 때 난 양말 신고 살았어. 몸에 끼는 건 뭐가 됐든 싫었으니까. 대신 발 모양은 지금 그 값을 치르고 있지. 외씨버선 모양에서 아주 먼 발 여자 발 모양이 그게 뭐냐고 핀잔받는 발.

기억 속의 신을 것엔 뒤꿈치 터진 운동화도 있어. 신안으로 흙이 들어와도 신발 사 달란 말을 안 했었기에. 여학생 신발이 저게 뭐냐고 작은오빠에게 타박을 받고야 어머니는 운동화를 사주시곤 했어. 운동화를 빨리 닳린다는 말이 듣기 싫어 아예 말을 안 한 탓이었지.

중학교 시절엔 왜 그리 걷어차고 싶은 게 많았을까. 돌 뿐인가, 깡통도 걷어찼고, 만만해 뵈는 벽도 걷어찼어. 또 육신이 지쳐 허덕일 때까지 걷기는 얼마나 했던지. 안에 도사리고 있는 뭔가가 바닥이 나도록 걸어야 집에 돌아오곤 했어. 왕십리에서 영미다리로 신설동으로 안암동으로 그리고 미아리로, 그때 안에 똬리 틀고 있던 것의 정체, 소진시키고 싶어 했던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어느 날 퇴근길에서였지. 집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퇴계로에 내렸을 때, 지는 황혼이 세상을 다른 곳으로 물들이고 있었어. 같이 버스에서 내린 권 선생이 옆에서 문득 말했어. 이런 날 마시지 않으면 언제 마시냐. 그래, 저 황혼을 마시러 가자. 황혼에 마음을 깊게 베인 우리는 곧장 명동 골목으로 내려가 맥줏집에 마주 앉았어. 그때 그 친구에게 물었어. 살면서 행복을 느껴 본 적 있니? 내 질문에 그녀는 움찔했지. 짚어낼 수 없는 결핍을 서로 깨닫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결핍이 사회 전반을 지배했던 그때 개인이라고 다르지 않았어. 행복은 유보였어.

그때는 행복을 시간이란 비단보에 싸서 잘 모셔뒀어. 모셔만 두는 것, 감히 풀어볼 생각을 못 했어. 그렇게 길들여지다 보니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네잎클로버조차 한 번도 찾아본 적이 없네. 보물 찾기에 나서본 적도 없고, 로또도 사본 적이 없고.

요즘은 어떨까. 요즘은 행복이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처럼 활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알게 됐어. 미국이란 넓은 땅에서 풍부하게 생산되는 물질과 편리란 이름의 속도로부터 공급받는 행복.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며 몸집을 줄인 행복은 지금 먼지가 되어 주저앉았단 느낌이야. 지금은 열 켤레의 신발도 살 수 있는 능력이 있건만.

이쯤에 와서 생각해 보면 행복이란 지금 보고 있는 이 창문과 같은 것인지도 몰라. 즉 프레임. 뭘 통해 세상을 보느냐, 어떤 방식에 의해 세상을 인식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질과 양이 결정되는 게 아닐지. 나아가 행불행은 기억의 반응일지도……

거창하게 말해 요즘 세상의 행복의 질료인 속도, 이것도 참 맹랑한 것이지. 정말 빠를수록 행복할까. 전혀. 오히려 속도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해. 세상의 속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히피처럼 싸워야 할 판이야. 70년대만 해도 매몰되어 가는 개인을 위해, 자유와 평화를 위해 싸우던 히피가 있었는데, 개인이 더욱 매몰되어 가는 요즘엔 왜 그런 저항 운동조차 없을까. 너무 빨리 변화해 아예 미접이 되어버린 건가 하기에 결핍감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내 안에서 늘 솟구치며 허기를 느끼게 해.

그러고 보니 둘째가 내일 제 어미와 새 신발을 사러 간다고 했네. 방과 후 활동으로 하는 농구를 위해 요즘 애들은 예전에 비해 시간이 정말 없어. 틈 없이 돌아가는 일과가 매일 기다리고 있지. 그래도 아이들은 내일도 저렇게 학교에 갈 것이고, 앞마당에 무수히 떨어져 내린 단풍잎들이 하늘의 별이 내려와 깔린 듯 보일 때, 그 별들을 징검돌처럼 하나씩 밟으며 학교로 갈 것이야. 그 별들은 내 가슴으로 직진하여 들이박힐 게고. 아름다움. 기억. 이별. 깨지기 쉬운 것. 붙잡을 수 없는 것.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안아줄 아이들이 있어 행복해.

버스가 지나간다. 놀이를 그친 우리 아이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드디어 버스가 정차한다. 정지 사인을 내민 버스에 오늘의 행복들이 모두 차례로 차에 오른다. 차가 떠나고 마주 손을 흔들던 부모들이 흩어진다. 나도 창에서 물러선다. 하루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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