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 / 오세윤
놀라웠다. 거기, 옛날이 그대로 있었다. 609번 지방도로에 올라 용봉산의 날렵한 긴 허리를 오른쪽에 두고 달리기 10분 남짓, 길옆 과수원을 낀 낮은 함석지붕이 눈에 들자 홀연 아연해지고 말았다. 40년 세월이 삽시간에 접혔다. 궁금했다. 어린 날의 친구, 아직도 그냥 그곳에 살고 있을까. 길을 되돌아 집 앞 느티나무 아래 차를 세웠다.
휘우뚱 잦혀 기운 채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반신반의로 올려다본 문설주에는 반갑게도 친구의 이름이 쓰인 흰 대리석 문패가 의연하게 붙어 있었다.
들어서며 주인을 찾았다. 토방 곁에 누워 있던 누렁개가 엉거춤 몸을 일으키며 서부렁히 짖었다. 이어 뻐끔히 방문이 열리면서 홀쭉하게 볼이 패인, 볼품없이 검게 그을린 사내의 얼굴이 삐죽이 비어져 나왔다.
누구를 찾느냐 묻는 초로에게 이름을 대며 주춤주춤 다가갔다. 낯이 설었다. 나와는 달리 친구는 금세 나를 알아보고 허겁지겁 신발을 꿰어 신으며 반색해 뛰쳐나왔다. 오래 살다보니 세상에 별일도 다 생긴다며 대뜸 내 손을 잡아 세차게 흔들어댔다. 좀 전의 굼뜨던 탯거리와는 영 딴판이었다.
친구는 왼팔 하나가 없었다. 왼쪽 어깨에 쏠리는 나의 시선을 의식하며 친구가 심드렁하게 해명했다.
"응, 이거? 방앗간 피대에 말렸어."
설멍설멍 흔들리는 알맹이 없는 빈 팔소매 끝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친구가 헤식게 웃었다.
끌려들어간 방안은 구지레한 바깥과는 달리 안침하고 정갈했다. 구닥다리 자개장과 20인치 고물 텔레비전만이 후질 뿐 벽 한쪽을 다 차지한 제법 고급스러운 책장과 가득 꽂힌 책들은 사뭇 의외의 생급스러운 감동이었다.
친구가 봉창을 열고 과수원 울타리를 손보고 있던 장정을 소리쳐 불러들였다. 아들이라고 했다. 바로 들어와 큰절로 인사하고 난 아들이 부엌에 나가 술상을 봐왔다.
친구는 나와 중학교 2학년 한해를 한 반에서 짝으로 앉아 공부했다. 아버지가 읍내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셨던 친구는 변두리이던 내 하숙집에서도 한 마장을 더 가는 말무덤고개 아래 살았다. 사과과수원과 밭들 외에도 40마지기나 되는 논농사를 짓는 부농이었다. 위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3살 위의 형과 아래 두 여동생이 있으면서도 그는 늘 나하고만 등하교를 같이했다.
2학년 여름 장마 전 친구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슬픔에서 채 헤어나지도 못한 상고 두 달 만인 여름방학 끝 무렵 그의 아버지가 새장가를 들었다. 열아홉 다홍치마, 새어머니는 그의 형보다 겨우 한 살 더 많았다. 방학이 끝나 학교에 나온 친구의 얼굴은 많이 상해 있었다. 말수도 적어지고 많이 침울해했다. 공부 시간에도 자주 심란한 표정을 하고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는 조용한 아이가 되어갔다.
겨울방학 중의 어느 눈 오는 날, 친구가 핼쑥한 얼굴로 내 하숙집을 찾아옸다. 방에 들어서기 무섭게 친구는 어깨를 들먹이며 울음부터 터뜨렸다. 무슨 일이냐고 거듭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울기만 하던 친구가 한참 만에야 뜻밖의, 너무도 어이없는 이야기를 더듬더듬 토해냈다. 형이 자살했다고 울먹이며 말했다.
형은 새어머니가 들어온 첫날부터 그분에게 이성을 느끼고 빗나간 연정으로 고민했다고, 곁에서 지켜보기에도 딱하고 답답할 정도로 밤낮으로 몹시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주섬주섬 늘어놨다.
개학하고도 친구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연정으로 고민한 내용의 형의 유서가 발견된 다음 날 새어머니가 집을 나갔다는 것과 이어 아버지마저 동네를 떠났다는 사실은 근 보름이 지나서야 알게 됐다.
토요일 방과 후 찾아가면 친구는 어김없이 밭이나 부엌, 아니면 우물 곁에서 일하다 나를 맞았다. 반가워는 하면서도 한가롭게 말을 주고받을 만큼 틈을 내지는 못했다. 언제나 바빴다. 농사일과 집안일, 동생들 뒷바라지에 경황 없는 눈치였다. 화제가 궁해지고 대화마저 단순해지면서 내 발길도 점차 더 드텨지게 됐다.
친구가 엉뚱하게도 목욕탕에 가자고 했다. 일주일에 한번, 아들과 함께 목욕하는 날이 오늘이라고 했다. 오랜만에 만난, 서먹하게 변해버린 친구와 함께 목욕탕에 가 옷을 벗는다는 게 내키진 않았지만 수굿이 따라나섰다,
욕탕은 넓고 환했다. 수면 위로 수증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탕에서 나와 앉아 나에게 들을 내어 맡긴 채 친구가 지난 일들을 주섬주섬 이야기했다.집 나간 지 4년 만에 객사하여 한 줌 재로 돌아온 선친 이야기에서부터 아내 이야기와 월남전 참전 이야기까지.
왼팔 불구 외에도 친구의 몸에는 상흔 하나가 더 있었다. 오른쪽 늑골 아래 움푹 파인 상처, 부비트랩에 당한 상처라고 했다. 이야기 중에도 그는 남은 한쪽 팔로 자기의 아랫도리와 허벅지를 열심히 닦아 내려갔다.
볼품없이 마른, 상처뿐인 온몸을 벗고 이웃들과 함께 탕에 들어오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날을 망설였을까. 하지만 이제 그는 그 모두를 벗고 남들 앞에 자기의 나신을 가림 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그런 모믕로 살아오는 동안 받았을 욕됨, 곤고했을 한 생을 나는 그저 측은하게 유추할 뿐이었다.
기쁠 것도 슬플 것도 없는 허기평심의 담담한 자세로 빈 하늘을 향해 마른 가지를 뻗고 선 한 그루 느티나무, 친구는 표정을 읽기 어려운 무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돌아와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과수원을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과수원 끝 산비탈 아래에 마른 잔디가 잘 다듬어진 봉분 두 개가 겨울 햇살을 받으며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밑으로 하나가 더 있었다. 멀리 산마루를 쳐다보며 친구가 말했다.
"응, 부모님 묘야 그 아래 있는 건 오래 전에 곁을 떠난 집사람 거지. 쟤가 두 살 때 일이네. 그래도 젖을 뗀 뒤라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고맙지 뭔가."
신과 대지 앞에서, 인간이란 어쩌면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에 정신없이 휘둘리다 떠나는 별로 뽐낼 것도 없는, 저도 누군인지를 모르고 가는 어리석은 인연은 아닐까. 드물게는 어느 순간 그러한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은 겸허해지기는 하면서도 그래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하는, 속정에 메어 한생을 살고 가는 인생이란 업, 세심천의 물로 닦아낼 만한 더러움이, 인과의 찌꺼기가 이들 부자의 가슴에는 아직도 남아있을까. 기왕이면 다홍치마란 말을 저항 없이 받아들인 그 결과가 이렇듯 짖궂은 인연으로 이어져온 걸 안다면 무덤 속 묻힌 그의 선친은 얼마만큼의 회한에 몸을 뒤척일 건지.
느티나무를 올려다봤다. 이파리 모두 떨어내고 빈 가지로 선 겨울나무, 무성했던 여름의 현란한 영광도, 햇살 화려한 기쁨도 모두 떠나보내고 해 설피는 산자락 아래 홀로 선 나무가 가지 끝에 휘감기는 바람을 허청허청 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