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할머니 / 조남숙
대학로가 처음 생길 무렵이었다. 마로니에 공원을 중심으로 주말이면 도로를 막아 만든 즉흥 무대가 여기 저기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차 없는 거리쯤 되겠지만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때라 버스 노선을 변경했다는 편이 옳겠다. 젊은이를 위한 문화의 거리를 조성하기 위해 바뀐 노선은 특히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에게 당황함을 안겨 주었다. 기존의 노선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차를 탓하기도 하고 원치 않는 정류장에 내리며 불편한 심기를 나타내기도 했던 어른들은 백발이 되었거나 돌아가셨을지도 모르겠다.
잔잔한 통기타 음악이 연주되거나 소극장에서 진행되는 연극을 거리에서 맛보여주기 위한 배우들의 길거리 공연을 보며 혼돈의 젊음을 나누곤 했다. 분장한 배우들 뒤로 보이는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로 새겨진 간판을 읽어내느라 애 먹었었다. 우리말이 영어에게 자리를 빼앗겼는지 얼떨결에 내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영어 간판 모습에 그리 속이 좋지는 않았다. 우리 낱말보다 외국어가 세련되어 보이도록 길들여지기 시작하던 시기였지 싶다.
어느 날 저녁 무렵, 한 무리가 꽤 큰 원을 그리며 모여 있었다. 계단식 무대도 아닌 평지에서 몇 겹의 원으로 둘러싸인 무리가 궁금해서 다가갔다. 자그마한 할머니가 춤을 추고 있었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무대로 이끌어 시선을 고정시켰던 꿈틀거리는 몸짓은, 나중에 알게 된 병신춤이었다.
제일 먼저 손동작이 눈길을 끌었다. 두 손목의 비틀림과 팔의 꼬임으로 얼굴도 비대칭으로 일그러지면서 이목구비가 움직였다. 내 눈에 비친 할머니의 얼굴은 슬픔 가득 담은 찌그러진 대나무 소쿠리 모습이었다. 오래 써서 때가 찌들고 엮어 놓은 대나무 살이 삐죽이 빠져 나온 모습처럼 할머니 얼굴은 흉해 보였다. 치마에 가려 보이지 않는 다리는 움직임으로 보아 절뚝거리고 있음을 치맛자락의 날림으로 알 수 있었다. 특히 할머니 키가 유난히 작아 보이는 것은 등이 굽었기 때문이었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꼽추 등은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채우고 있는 덩어리였다.
지금으로부터 삼사십 년 전에는 노동자의 권익과 임금보다는 기업의 생산성과 성장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러다 보니 저임금 도시 빈민층이 많았다. 그들의 삶은 형편없었고 불안정한 노동과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 하는 가장의 임금으로 많은 식구가 연명하며 살았던 시대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꼽추 아버지, 철거 경고장, 낙원구 행복동에 있는 무허가 건물에 번호가 새겨진 알루미늄 표찰, 공장에 가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큰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꿈인 큰아들 영수, 버스 차장과 다방 종업원으로 일하며 식구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도록 힘을 보태는 큰딸 명희, 인쇄공장에 다니는 둘째아들 영호, 투기업자에게 빼앗긴 입주권을 찾아오기 위해 순결을 잃어버린 막내딸 영희의 삶은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었다.
대학로에 있는 젊은이들 중에는 이런 현실을 가슴에 묻어두고 ‘배워야 산다.’ 는 어른들의 한(恨) 설인 말씀을 몸으로 받아낸 이들이 꽤 있었다.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형성된 이 거리에서 이러한 시대적 아픔을 잠시 잊을 수 있고, 그래도 잊혀 지지 않는 아픔들이 젊음의 힘을 가동시켜 새로 만들어가는 시대를, 미래를 꿈꾸기도 했다. 애써 잊으려고 용을 쓰는 이들도 있었다. 이 거리가 마치 낙원구 행복동이란 단어가 주는 의미 그대로의 거리인양, 세련된 간판에 마취되어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가난을 떼어 보려 했지만 오히려 선명하게 보이는 너저분한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무리하게 애쓰는 일을 그만 두기도 했다.
병신춤을 추고 있는 할머니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만큼 아려오는 가슴을 움켜지는 순간 박수소리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손바닥이 아플 만큼 쳐대는 박수 소리는 소시민이 겪고 있는 통증의 괴성을 삼켜버렸다. 할머니의 얼굴에 눈물 되어 흐르는 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손, 두 다리를 곧게 펴고 등을 구부려 인사하는 작은 모습은 고통을 이겨 내려는 몸부림이었다.
얼마 전에 고인이 되신 ‘일인 창무극의 대가’ 공옥진 여사는 이렇게 우리 시대의 아픔을 몸으로 말했다. 백신이 부족해 생긴 곰보 자국, 월남전으로 잃어버린 이웃집 아저씨의 한쪽 팔, 약이 부족해 치료시기를 놓쳐 마비된 몸의 마디마디, 가난의 대물림의 대명사인 장애인이 지금 보다 많아 큰 욕이 되었던 ‘병신’ 이란 단어를 몸으로 받아내었다. 치료 없이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마음과 몸에 극심한 병을 얻어 살았던 많은 내적, 외적 장애인에게 이 단어를 거침없이 춤으로 표현한 공옥진 여사는 환부를 그대로 드러내어 치료하는 신묘한 의술을 지닌 의사였던 것이다.
아픈 시대를 보다 명료한 색체로 덮어 보려는 의도가 이 거리 저 거리에 뒹굴었지만 시대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오롯이 아픈 부위를 드러내놓고 있었다. 아픈 것은 아프다고 말하고 고름이 나는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 인색해서 안 되었기에 공옥진 여사는 치유의 힘을 발산한 것이리라. 쉰을 막 넘긴 나이에도 산파 할머니처럼 그 시대의 산고(産苦)를 춤으로 이겨내었으리라. 할머니는 ‘병신’이라는 장애인 비하발언 뒤에는 우리 모두가 몸과 마음이 아픈 장애인임을 깨닫게 하는 역설을 주고 가셨다. 영원히 춤 출 것 같았던 할머니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