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정 / 장상일

 

 

집집마다 긴 세월을 함께 해온 물건들을 한두 개씩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여전히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며 가족들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는 물건도 있을 테고, 아니면 버리자니 아깝고 두자니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 신세가 되어 그늘 속에서 먼지만 쌓이는 물건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한 생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연유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될 때가 오기 마련이다. 그때는 어떤 모습과 태도로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이, 혹은 내려오게 해주는 것이 나와 상대의 자존을 지키는 길일까.

얼마 전 남도지역으로 출장을 갔었다. 거리를 걷다가 어느 앤티크 숍 쇼윈도에 전시된 물건 하나가 눈에 띄어 반갑게 다가갔다. 구식 재봉틀 철제다리에 몸통인 재봉틀은 없고 대신 작은 건반악기가 올려져있는 나름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재봉틀용 철제 다리의 재활용 사례라고나 할까. 이런 식으로 자의든 타의든 버림받지 않고 그럭저럭 쓰임도 유지하면서 다른 개체와 한 몸을 이루어 제2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저 철제 틀은 그나마 다행이지 싶었다.

돌이켜보면 6,70년대에는 소위 부라더 미싱, 싱아 미싱이라는 상표를 단 재봉틀이 우리와 친숙했다. 가족들의 옷가지와 이불, 커튼 등을 주부들이 직접 꿰맬 수 있게 해준 재봉틀은 가정의 필수품이라고 할만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가정집에서 TV 냉장고 등 값비싼 가전제품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대접받던 시절이었다. 재봉틀이 이토록 각광을 받는 데에는 바느질 시간을 기록적으로 단축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바늘 끝에 실을 꿴다'는 어느 발명가의 천재적인 발상이 배경이 된다. 가정용 재봉틀 안에 구현된 획기적인 동력전달구조도 큰 몫을 했다.

그러나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화려한 날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동력발생과 전달이라는 철제다리 쪽 역할이 시대의 새로운 발명품인 전기모터의 등장으로 하루아침에 통째로 쓸모없어지게 된 것이다. 야속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미련 없이 철제를 분리해서 고물상에 팔거나 아예 폐기처분도 서슴없이 했다. 이러한 문명의 파도 속에서 오늘날까지 원형 그대로의 재봉틀 모습을 유지한 채 살아남은 것이 과연 몇 대나 있을지.

한 시절 사람들한테 귀한 대접과 쓰임을 받으며 재봉틀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건만, 어느 날 갑자기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가족 신세가 되어 무대 뒤 어둠 속으로 쓸쓸히 퇴장당하고 말았으니 화무십일홍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이번 출장길에 참으로 오랜만에 그 철제 다리와 다시 마주하게 되어 무척 반가웠고, 자연스레 어릴 적 기억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태어나던 해 양장점 하던 작은 외삼촌네서 들여왔다는 부라더 미싱이 방 두 칸짜리 우리 집 안방 창가에 무쇠다리를 뽐내며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첫돌이 지날 무렵부터 미싱 다리 밑으로 기어 들어가 놀길 좋아했다고 어머니가 흐려지는 기억을 더듬으며 들려주시곤 했다.

내 인생에서 첫 기억은 흐릿하지만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인 7살 즈음부터다. 그 무렵 우리 집은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서 1,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야 했고, 그 중 서울 신당동 살 때 재봉틀과 내 사이가 깊어졌다. 여섯 식구가 모여 아침밥을 먹자마자 다들 분주하게 일터와 학교로 가고 나면 어머니와 나만 남는다. 그리고 어머니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면, 안방에서는 재봉틀과 내가 일대일 둘만의 시간을 나누었다.

아침 햇살을 역광으로 받아 눈부시게 서 있던 무쇠다리재봉틀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마징가 제트처럼 폼 나게 보였을 것이다. 그 재봉틀 밑에 구겨지듯 기어들어가 장난감처럼, 친구처럼 같이 노는 것은 어쩌면 그 또래 사내아이라면 누구나 그랬을 듯싶은데, 얼마 전 형과 누나들한테 물어보니 그들은 나처럼 재봉틀 밑에서 놀았던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고 한다.

어머니께 확인해도 형과 누나들 노는 모습은 기억에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집 재봉틀은 사형제 중 막내였던 나만의 유일한 놀이 기구였던 셈이다. 넓고 평평한 쇠 발판을 의자 삼고, 둥그런 회전 바퀴를 자동차 핸들처럼 돌리며 붕붕 자동차 놀이를 주로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돌 지날 무렵부터 기어 다니며 시작했다는 재봉틀과의 놀이는 내 키가 재봉틀만큼 자라 몸을 잔뜩 웅크려야 겨우 들어가 놀 수 있었던 초등학교 1학년까지가 마지막이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어느 봄날. 학교 수업을 파하자마자 재봉틀하고 놀기 위해 서둘러 돌아왔다. 그런데 회사에 가셨을 아버지가 그날따라 안방에서 등을 보인 채 뭔가 작업을 하고 계셨다. 잠시 후 일을 마친 아버지 몸 사이로 보이는 건 이미 분해된 재봉틀이었다. 내 유일한 친구이자 장난감이었던 철제 다리와 쇠 발판, 회전바퀴 등이 몸통인 미싱에서 분리된 채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자세로 마치 나를 올려다보는 듯한 그들의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워 보였던지.

그날 해질 무렵, 동네 고물상아저씨가 철제다리와 발판들을 리어카에 실으면서 얼마의 돈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그리고 강냉이 한 소쿠리를 나에게 안겨주었으나 받지 않고 뿌리쳤다. 마치 포로들처럼 리어카에 실려 가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대로 서서 눈물만 흘려야 했다. 어쩌면 어머니보다도 내 손때가 더 묻었을 정든 친구들과 헤어지는 그 순간은 태어나 처음 겪어야 했던 '상실'이라는 경험이었다.

그 후 나처럼 달랑 혼자 남게 된 재봉틀 본체는 여느 집들처럼 발판과 바퀴 등을 대신하는 고속 모터를 장착하는 변신을 거치면서 오랜 세월 우리 가족과 함께 지냈다. 그러다가 십여 년 전 어머니가 낙상으로 팔 골절수술을 받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우리 집에서는 미싱 돌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봄, 집 청소를 하면서 평소에는 잘 열지 않던 벽장을 오랜만에 열었다. 그곳에는 먼지 쌓인 채 쓰임이 거의 없어진 물건들이 그득했다. 그 사이에서 긴 잠을 자던 부라더 미싱과 재회했다. 그리고 어릴 적 상처로 남은 기억을 떠올리며 팔려 나간 친구들을 회상했다.

돌아보니 우리 집에선 아버지가 어머니와 약혼하며 보내온 사주단자 다음으로 가족과 함께 오래 지내온 물건이다. 누나들은 더 이상 쓸모없어진 이 쇳덩이를 내다 버리라고 성화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어 나와 재봉틀과의 사연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다행히 누나들도 내 뜻에 공감했다.

여덟 살짜리 나에게 상실이라는 아픈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해 준 미싱. 그 분신을 거실 벽에 걸린 부모님 결혼사진 아래 사주단자와 함께 고이 모셨다. 내 유년 시절 한때를 공유한 철제 친구들과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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