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그릇 / 반숙자 

 

다리와 다리 사이에 열일곱 살 애기 초경 같은 빛깔이 어른댄다. 누가 장난삼아 색종이를 끼워뒀나 싶어서 가까이 다가갔다. 겹겹의 잎 사이 안쪽 한 장이 그 빛깔을 푹 덮고 있다. 볼펜 끝으로 잎을 들춘 순간 아! 숨 막히는 황홀. 누가 볼세라 얼른 잎을 도로 덮어주는데 가슴이 뛴다. 처음이다.

​ 밖에는 눈보라 치고 영하 십사 도의 혹한에 거실에 들여놓은 화초들은 철모르고 푸르러 커피를 마실 때면 커피잔을 들고 군자란 앞으로 갔다.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 군자란이 내 집에 온 지 달포가 지나도록 잎들은 단순한 ​구도로 어제가 오늘인 듯 변화가 없었다. 새침떼기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지금 가슴에서 다리까지 떨려 구부정하게 걸어서 소파에 앉았다.

열두 서너 살쯤인가. 송판때기 같던 가슴에 이상한 증세가 나타난 것은. 그냥 가슴이 아팠다. 혹여 어디에라도 가슴께가 부딪치면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가렵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자가 진단으로는 꼭 죽을 병이 든 것 같았다. 그때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언니 그리고 삼촌이 함께 살았다. 언니는 나보다 여섯 살이 위지만 대범하고 사내 같아서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언니보다 삼촌이 만만했다. 삼촌과 언니는 두 살 차이로 저녁이면 얼굴에 여드름을 싸느라 하나뿐인 쪽거울 쟁탈전이 벌어졌다. 나는 건넛방 삼촌에게 가서 삼촌 손을 내 가슴에 대주며 "아재야, 나 죽는다. 너무 아파." 하고 하소연을 했다. 언니는 무덤덤한데 삼촌은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 "쉿, 비밀이야." 하고는 엄마께 가서 말하라고 등을 떼밀었다. 그때 비밀이라고 강조하던 삼촌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큰 눈을 부라리며 입술에 검지를 세워 억지로 위엄을 부리던 얼굴, 그러나 하나도 무섭지 않고 장난을 치는 것으로 보였다.

아마도 그것이 상징이었던 것 같다. 아이가 소녀가 되는 과정의 변화, 그로부터 몇 년 지나서 나는 자지러지게 놀라서 엄마를 부르며 울며불며 부엌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뒤 곁 김치광으로 가더니 이슬을 보고는 놀란 듯 얼른 옷을 도로 입혔다.

오늘 군자란 잎 사이에서 나는 67년 전 그 충격의 격랑을 만난다. 엄마가 그랬듯이 나도 얼른 잎으로 꽃을 가리며 가슴이 두근댔다. 이 두근거림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떤 비밀을 훔쳐본 것 같은…. 송판때기 같던 가슴에 앵두만 한 유두가 봉싯해지며 여체는 비로소 비밀의 열쇠를 건네받는다. 소녀에서 여인이 되며 우주의 환희를 처음 배운다. 그 환희가 밀주일 때 여인은 애달프다는 것도 모른 채다. ​

군자란도 내 집에 올 때는 밍밍한 아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푸른 잎으로 밀봉하고 안으로부터 조용한 변화를 시도하는 생체의 리듬을 누가 눈치를 챘으랴. 이파리 댓잎뿐이던 포기 사이 누가 저토록 황홀한 비밀을 숨겨 놓았을까.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생명의 저 안쪽을. 겨울 들판에 서면 대지 깊숙이 잉태의 씨를 뿌려놓고 시침을 뚝 떼는 누가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하랴. 화분에 눈길을 줄 때마다 군자란 포기가 물구나무 서서 내게로 걸어오는 환각이다. 나는 이 설렘을 사랑한다.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만물을 향한 호기심과 설렘은 바로 내 창작의 옹달샘이다. 심리학자 김정운은 막연한 그리움이 현실 속에서 가능한 것으로 변할 때 생기는 심리적 반응이 설렘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행복의 기준은 바로 이 설렘의 유무라고 하니 아무래도 나는 누구도 말릴 수 없는 해피니스트가 아니겠는가.

지금 군자란은 색종이 한 장에서 꽃송이 다섯 개로 불어나서 하루가 다르게 올라오고 있다. 소녀였던 아이가 여인이 되고 엄마가 되고 늙어서 노파가 되는데 인생은 헤르메서의 그릇인 양 아직도 밀봉되어 있다.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납이나 아연 구리를 금으로 만들기 위해 적정한 비율로 섞어 헤르메스의 그릇에 넣어 밀봉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열을 가하는데 이때 만약에 그릇이 깨져 밀봉상태가 무효 될 때 연금술 과정이 모두가 어그러지고 만다. 사람이 태어날 때 저마다 헤르메스 그릇 하나씩을 선물 받은 것은 아닐까 싶다. 알에서 깨어나기 이전의 모습을 그 안에 담고, 가끔은 그 그릇이 깨져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일생은 언제 연금술이 완성되어 제대로 된 그릇 하나 탄생할까. 자아완성이라는 먼 지평의 사막을 가며 세상은 모르는 것이 많아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은 신의 비밀. 탐내서도 안 되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 나는 헤르메스의 그릇에 담겨있는 구리 조각이라는 것. 내면의 공간에서 충실히 숙성되기를 기다리는 것. 나의 주인이신 연금술사의 처분만 바라고 있다는 것. 그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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