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읽다 / 염귀순

 

말에는 각인 효과가 들어있다. 한마디 말의 파장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게도 한다. 누군가의 마음에서 태어난 말이 다른 사람의 마음 밭에 씨를 뿌리고, 소망의 뿌리가 되어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는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벼랑 끝의 삶을 이끌어주는 밧줄이 되고, 긴 인생을 만들기도 하는 묘한 힘을 발휘한다.

통기타를 치며 열창을 하는 남자가 후끈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독특한 꺾기와 강약의 박자로 희로애락의 고개를 넘으며 무대를 달군다. 스스로 몰고 온 신바람을 타느라 무아지경인 남자는 방청석에서 보내는 부인의 응원이 더해져서인지 맘껏 음정을 갖고 논다. '사랑이 이런 건가요~♪' 50대의 가장이면서 대학원 석사과정의 학생이며 무명의 통기타 가수. 그는 삶을 치열하게라기보다 흥겹게 사는 듯하다. 숨어있던 재능을 발휘하는 희열감으로 젊고 활달해 보인다. 어른이 되었다하여 더 이상 자신에게 잠재된 무엇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말아야 할까보다.

어느 방송국의 <아침마당-도전 꿈의 무대>라는 프로에 출연한 중년의 남자를 봐도 그렇다. 고교시절, 그는 좀 엉뚱했었다. 교과서 공부보다는 생뚱맞게 장자나 석가에 더 관심이 기울었으며 인생의 근본문제에 대해 혼자만의 생각에 골똘했다. 나는 왜 태어났는지, 사람들은 왜 행복하지 못한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누구도 명쾌히 풀지 못할 문제 앞에서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 날, 집 근처의 양산 통도사를 찾았다. 한데 스님의 말씀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돌아와 곱씹고 곱씹어본 결론은 '스스로 찾아보라'였던 것. 그로서는 아무래도 찾아지지 않는 답이었으니 어쩌랴. 애를 끓이다가 마침내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며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게 웬일? 통도사에 다시 찾아간 그가 이번엔 머리를 깎겠다고 간곡히 청하자, 스님은 충격적이게도 약간의 돈을 쥐어주며 일갈하셨다.

"얘야, 머리는 이발소에 가서 깎아라."

그 후 몇 번을 더 찾아갔으나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셨다. "자신의 행동으로 다른 누구, 아니 단 한명의 생명에게라도 살아갈 힘과 용기를 준다면 그게 제일 큰 공부이니라."

세상은 무한 가능성을 가진 동시에 예측불허의 무대다. 결국 출가에 실패한 그는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스스로 부대끼며 혈기 왕성한 청년이 되고 건실한 장년이 되고 믿음직한 남편이 되었으며 어엿한 부모가 되었다. 중년의 고개를 넘으면서 통기타 가수도 되었다. 사람들과의 즐거운 소통을 위해 음악치료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며 머리는 이발소에서 깎는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사람들을 웃게 한다. 그 옛날 통도사의 스님께선 ‘아무리 봐도 너는 중이 될 상이 아니다.’ 라는 직관이 있으셨지 싶다.

말은 마음의 에너지다. 흐름과 방향성을 가진 힘이다. 남다른 끼 또한 그러한 열기를 지녔으며 의외로 큰 파장을 갖고 있다. 더러는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부추기는 방랑 끼에서부터 얄팍하고 소소하지만 삶을 유쾌하게 만드는 잡다한 끼들까지. 삶의 목적이나 존재의 의미는 개인의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 배경 등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지라도, 삶이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자칫 우울하게 가라앉으려는 일상에서 눌러두고 덮어두었거나 숨은 끼를 발휘해본다면 뜻밖의 해방감과 새 의욕을 불러와 또 다른 인생의 장을 열어줄지도… 시간은 쓰는 사람의 몫 아닌가.

무대가 출렁거린다. 열정으로 무장한 저 남자, 생동적인 기운이 상쾌 통쾌하다. 맥 빠진 마음에도 덩달아 흥겨움이 번지고 곤고한 삶의 행간도 일순 시원해진다. 만약 스님께서 생존해 계신다면 이번엔 그에게 무어라 말씀하실는지.

"봐라, 중이 된 것보다 자신의 능력대로 더 많은 중생을 구원해주고 있지 않느냐. 공부가 특별한 게 아니다." 라며 호탕하게 웃으실까.

세상은 오늘도 누군가의 꿈의 장이 펼쳐지는 경이롭고 열띤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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