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카(Yucca)의 사명/김영화

마크함산(Mount Markham )이 오랜만에  찾아온 나를 반긴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음미하며 산불과 지진의 현장이 있는 산에 왔다. 산너머 아침 해가 세상을 향해 붉은 얼굴을 내밀고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빛으로 힘있게 올라온다.

산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 오늘 목표인 로우산(Mount Lowe1,709m) 정상에 도착했다. 작은 축구장 만한 정상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니 아직도 흰 눈이 쌓여 있는 볼디산(Mount Baldy10,064ft) 산맥이 기선 장군처럼 버티고 있다. 남쪽으로는 지난 1월에  Eaton 산불이 났던 Alta Dena와 주변의 동네가 내려다 보인다. 그때의 산불로  로우산의 남쪽 일부까지 삼키고 간  화상 자국이  도처에  아프게 남아있다.  로우산을 한 바퀴 돌아 내려오는 길은  산불의 흔적은 없지만  쌔~한 불탄 냄새가 코끝에 닿아 근처에 화염이 지나갔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금 더 내려오니 주위의 나무들이 산불에  까맣게  탔거나 누렇게  말라 화형을 당한 처절한 모습으로  서 있다. 산불의 종지부를 찍게 하였던 1월 말의 겨울 폭풍우로 등산로는 소실되었거나  망가졌을 뿐 아니라  막혀있어서 그 많던 등산객은 물론 들 짐승 한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씩 잃어버린 집을 찾으러 나온 새들이 주위를 빙빙 돌고 있다. 다  탄 집터를 찾아온 화재민들 모습 같아 가슴이 아리다.

     허탈한 마음으로 한 발작 한 발작  힘들게 산을 내려오는 길에 한 작은 식물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세히 살펴보니 사막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카가 몸둥이는 불에 타 까맣지만  밑둥 안에서 하얗고 파랗게 여린잎을 피우고 있다. 온 산을 다 태운 무서운 Eaton 산불에 유카도 피할 수 없었으리라.  유카는  척박한 사막에서도 뿌리를 깊게 내려서 최소한의 물과 영양분으로도 잘 자라는 선인장과 식물이다. 그렇다 하여도 화마가 전 산을 할퀴고 지나가며 저보다 크고 작은 나무들을 다 태울 때, 유커가 품고 있는 물로는 살아남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꺼져가는 생명을 붙들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 했을 유카가 경이롭다.  유카는 보통 5년 이상 성장하여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나면 그의 생명도 끝이 난다.  유카의 사명은 한 번의 꽃을 피워 후손을 이 땅에 남기는 것이다.그 뜨거운 불길에 온 몸이 태워지는 죽음을 이기고  새싹을 피워내고 있다. 그 무엇이 이 유카로 하여금  이렇게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게 했을까?  ‘사명이 있는자는 죽지 않는다.’ 고 혹자는 말했다. 생명 이상으로 귀중한 사명 때문이었을까?

  사명감은 삶을 움직이는 힘이다. 사명감은 개인을 강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단순한 책임감을 넘어서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이 되며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한다. 사명감이 있는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목표가 명확하고, 어려움이 닥쳐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역할과 목표에 대한 깊은 헌신은 곧 삶의 의미가 된다. 곧게 꽃대를 올려 핀 유카꽃을 보면 사명감을 가진자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유카꽃은 크림색의 자두만한 크기의 많은 꽃송이가 길고 큰 타원형의 봉우리를 만든 우아하고 고상하며 신비롭다. 사막 곳곳에 꽃대가 우뚝 솟아 피어있어  빛을 발하는 유카꽃을 사람들은 ‘Our Lord’s Candle’, 주님의 촛불이라고 한다. 누가 지은 이름인지, 꽃의 유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꽃의 모습에 잘 어울리는 이름 같다. 밝게 빛나는 유카꽃은 순결, 희망, 신성함을 상징하며 종교적으로 신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연이 주는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사명감을 지닌 의미가 담긴 이름 같다.

   내 몸은 말할 수 없이 지쳤지만 자기 사명을 다 하기위해  화마 중에도 살아서 일어나는 강인한  유카에게서 사명감을  배우고 간다 . 하루 종일  따뜻한 친구로 나와 동행해준 태양도 서산으로 넘어 가며, 다 타고난 잿더미 속에서도 여린 잎을 피우고 나오는 유카의 새 잎을 응원하리라. 이번 산불로 삶의 안식처인 집과 일터를 잃은 사람들도 강인한 유카처럼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라도 일어서서 주님의 촛불 같은 꽃을 피우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