헷갈린다 /김영화
뒷마당에 나왔다. 오랜만에 단비를 맛본 빨간 동백꽃이 반갑게 웃는다. 그와 나란히 서있는 사과나무사이에 거미줄이 햇빛에 반짝인다. 가까이 흰나비가 날아온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맨손으로 새벽부터 부지런히 작업했을 거미줄을 무자비하게 걷어치웠다. 무방비 상태로 한낮을 즐기는 순진한 나비를 비겁하게 망을 쳐놓고 먹이감을 기다리는 거미가 얄미웠다. 나는 대부분의 경우 약자의 편을 드는 편이다. 모퉁이를 돌아서니 오래된 듯한 거미줄에 작은 잠자리 만 한 큰 모기 한마리가 걸려있다. ‘잘 걸렸구나!, 거미가 착한일을 했네.’조금전에 거미줄을 무참하게 걷어치운 내가 아닌가? 분명 거미보다 모기가 약하지만 이번에는 모기는 해로운것, 악한것이고 거미는 해로운 것을 용감하게 해치운 선한 것이 되었다. 선한 편을 들어준 것이다. 이렇게 거미는 금방 비겁하고 나쁜것에서 용감하고 선한것으로 둔갑했다.
탄자니아의 세렝게티 자연 동물공원에서 암사자들이 사슴사냥하는 것을 보게되었다. 맹열히 쫓는 사자에게 잡히지 않을려고 있는 힘을 다해 도망치는 어린 사슴을 보며 가슴 졸였다. 다행히 잡히지 않아서 안도의 숨을 쉬는 내게 투어가이드는 “저 암사자는 새끼들을 굶기게 됐는데 다행이라뇨?” 하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이드는 암사자 편이었고 나는 사슴편이 되였다. 사자는 새끼와 자신의 일용할 양식 만큼 만 사냥한다. 사람처럼 욕심을 내서 쌓아둘려고도, 자손대대로 물려 줄려고 하지않는다. 그러니 열심히 사냥하는 사자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새끼를 잃고 가슴 아파 할 어미사슴을 생각하면 사슴편에 서고 싶다. 사냥을 못해서 새끼와 함께 굶을 처지에 놓인 사자를 생각하면 사자 편을 들어야 맞다. 헷갈린다.
무조건 약자의 편에 서는 것 보다는 무엇이 옳은지 깊이 생각해서 정의 편에 서고 싶다. 하지만 나는 상황에 따라 나비 편이 되기도하고 거미 편이 되기도 한다. 사슴 편이 되기도 하고 사자 편이 되기도 한다. 시대와 환경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나 정의는 무엇일까? 진리란‘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승인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나 사실’이라고 한다. 사르트르는 ‘절대적인 진리는 쉽게 붙잡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다. 그것은 타인의 손에 의해서 붙드는 것이 아니고 자기 스스로 붙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를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 거울이 더렵혀 졌거나 깨지면 있는 그대로를 반영하지 못하고 왜곡될 수 있듯이 진리도 왜곡될 수 있다. 이 세대의 많은 사람은‘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진리라고 믿는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비진리로 정의하며 상대방을 이해하고 포용하려 하지 않는다. 당파를 만들어 서로 적대시 하고 자기 편이 옳다며 온갖 흑색선전을 남발한다. 평범한 사람은 어느편이 옳은지 분간하기 어렵다. 이렇게 헷갈릴 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신만의 원칙 즉 가치관, 신념, 도덕적 기준 등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지나친 정의, 진리주의는 타인에게 폭력이 된다. 진리는 물과 같아 흐르고, 막아도 길을 찾아 나아간다.’고 한다. 거미나 모기 같은 미물에서부터 사자나 사슴, 그리고 만물의 영장 이라는 인간에 이르기 까지 창조주의 섭리인 자연의 법칙을 따라야한다. 물 흐르듯 순리에 따라 순응하며, 정결하고 완전한 거울 앞에서 살아 간 다면 헷갈리지 않을 것 같다. 무엇이 옳은가 보다 어떤 삶이 나 다운가 를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