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까치는 어느 쪽이 길조일까 / 강돈묵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야 니. 까치가 어찌 우는지 아나?”
뜬금없는 질문에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까악 까악….”
“그럼 까마귀는…?”
잘못 대답했음을 알아차렸지만, 순간 혼란스러웠다.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은 두 새의 울음소리를 굳이 구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새면 됐지. 흔히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이 오고, 까마귀가 울면 불길한 일이 벌어진다는 소린 들었어도 그게 무슨 상관이랴.
우리 동네에는 까치나 까마귀가 몇 마리 되지 않아서 그런지, 그것들을 입에 담는 사람이 없었다. 까치가 미루나무 꼭대기에 집을 짓든, 까마귀가 우듬지를 피해 갈참나무 숲에 둥지를 틀든 관심 밖의 일이었다. 가끔 동네 어른들이 길조와 흉조로 나누며 차별해도 거기에 말을 섞는 이는 거의 없었다.
내 기억에 까마귀가 확실한 이미지를 가지고 나타난 건 십육 주의 호된 전‧후반기 교육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속되었을 때였다. 눈이 겁나게 퍼붓던 저녁, 전령병은 나를 인수하여 “따라와” 한 마디로 내게 목줄을 걸었다. 주인은 더는 말이 없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 굽이굽이 고갯길을 끝없이 걸었다. 방향감각도 없었다. 벌떼처럼 달려드는 눈발을 맞으며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땐 눈이 어깨를 덮었다. 어깨와 더플백의 경계선이 눈 속에 숨었다. 내 머릿속에선 눈발보다도 더 분주하게 공포와 두려움이 활개를 쳤다. 그러나 속내를 털어놓고 물을 수도 없었다. 지금 향하는 곳이 북쪽인지, 휴전선인지, 심지어는 전령병이 목줄을 끌고 휴전선을 넘는 것인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간밤을 어찌어찌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막사를 나오니 솔수펑이 가지마다 까마귀 떼가 새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 순간 불길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내팽개쳐졌다. 이 흉조 까마귀가 내가 배속된 부대에 나타난 이유는 뭘까. 어쩜 엊저녁부터 따라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더 옥좨왔다. 전방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내겐 이곳이 분명 적이 코도 베어간다는 휴전선 안이라고 착각하게 하였다.
깊은 산중의 부대에서 바라보는 앞산은 한 해가 지나자 한 뼘은 낮아졌다. 두 해가 지나자 산봉우리는 저 스스로 한 뼘 더 깎아내렸다. 세 해째가 되니 이곳도 내 나라 땅이라는 확신이 섰다. 내 나라 땅에 매일 찾아오는 까마귀는 있었어도 까치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사병에게 찾아올 기쁜 소식이 뭐 있겠나. 오면 불길한 소식뿐이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까마귀는 떼로 찾아와 식당 옆의 잔반통을 뒤졌다.
소나기가 흩뿌리던 여름날,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내무반에 뛰어들었을 때 텔레비전 화면에는 낯익은 조류학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조류에 대한 지식 중 잘못 알려진 것이라며, ‘실상 조사해 보면 까마귀보다 까치가 훨씬 작물에 해를 끼친다.’며 ‘영악스러운 까치에 비해 까마귀는 영리한 길조’라는 주장이었다. 까마귀로 인해 군 생활이 두려웠던 내겐 반가웠으나 믿어도 되나 싶었다.
아파트에 살다가 시골집으로 옮긴 탓인지는 몰라도 새를 많이 만나게 된다. 하루는 박새가 다녀가고, 또 하루는 곤줄박이가 인사를 한다. 산비둘기가 정원 잔디밭에 내려 먹이를 찾고, 까치가 찾아와 잔디밭에서 깡충거린다. 가끔 까마귀 서너 마리가 지붕 위로 선회하며 괴성을 지르더니, 전봇대 위에 앉는다. 녀석들은 언제나처럼 제 존재감을 과시하듯 목청껏 소리를 지르다가 마당 위를 종이비행기처럼 스쳐 날아간다.
노을이 타던 저녁나절이었다. 전에 없이 까치들이 무리를 지어 잔디밭에 내렸다. 대여섯 마리가 마당 잔디에 앉았다가 전봇대로 옮겨 앉고, 오랜만의 만남인지 울음소리가 격앙되어 있다. 흥분한 탓인지,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차분히 앉아 있는 게 아니고, 자주 자리를 옮겨가며 요란을 떤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나도 긴장한다.
바로 그때 까마귀 떼가 들이닥쳤다. 마릿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조금 지나자 까치들도 더 보태졌다. 두 진영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대치하더니 서로 공격하고 물러서기를 반복한다. 순간 나는 삼국지의 유비와 조조가 맞붙는 장면을 상상했다. 한번은 밀리고 바로 공격하여 회복하고…. 그러기를 여러 차례. 팽팽한 긴장은 풀릴 성싶지 않았다. 이건 누구의 공격이 먼저인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서로 세력을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다. 오로지 떼를 지어 싸우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다만 삼국지에서는 산악을 이용한 지상전이었는데, 이들은 철저한 공중전이었다. 전투기가 비행하여 적을 공격하듯 이들은 무섭게 활강하여 적진에 꽂혔다가 비상하여 제 무리 속으로 숨는 것이었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새들도 무리 지어 패싸움을 전개한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 전에 자신의 진영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 이젠 어느 새가 길조인지 흉조인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켜보다 보니, 어느 쪽이 더 나쁜 것인지도 구별되지 않는다. 왜 저리 싸워야 하는지를 알고나 싸울까. 어쩌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전투에 나섰는지 모른다. 그것은 오로지 내 진영을 위해서 목숨 걸고 싸움터로 나서는 것 같다. 저들은 왜 싸우는 것일까.
문득 어린 날 받은 질문이 소환된다.
“니, 까치가 어찌 우는지 아나?”
대답은 못 했어도 두 새의 구별조차 필요치 않았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제 나이 들어보니, 어느 한쪽 편을 들려 했던 옹졸함이 부끄럽고 어리석어 보인다. 어린 날이 현명해 보인다.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현명했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