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로 쓰는 수필론
한상렬
가슴으로 인화된 불꽃. 애초엔 그저 가늘고 유약해만 보이던 불꽃이었다. 마음 맡바닥에 채 고이지 않았던 상념의 꽃이었다. 그런데 이내 그것은 굵어져 선을 그으며 원무를 시작하였다. 그 순간 작열하는 빛으로 바뀐 상념은 드디어 날개를 달고 환호하기 시작했다. 열락의 순간이다.
이런 기쁨이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알 것인가. 그렇다. 수필문학의 묘미이자 창작의 기쁨은 이렇게 길고도 긴 기다림의 초조함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다.
수필이 좋아 신들린 듯 문단의 서자 취급을 받으며 주변문학, 신변잡기라는 오명을 씻어보고자 뛰어다니던 어제의 일들이 눈앞에 선명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미진한 모습으로 긴 목을 지닌 사슴을 닮아 간다. 마음에 차는 수필 한 편을 쓰지 못했다는 괴로움 때문이다. 또 한 편의 수필 창작이 얼마나 외로운 작업이었는가에 대한 깨달음과 불꽃같은 작품 한 편에 대한 열망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 나에게 지금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수필을 삶의 진주로 삼아 수필다운 수필 한 편을 쓰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언제나 맑은 정신이길 소망한다. 쉼 없이 솟아 나오는 샘물과도 같은 정화된 생명수로 한 줄의 글이나마 길어 올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단 한 줄의 글이라도 그것이 독자의 가슴을 울리고 오래도록기억될 수 있는 글이라면 바랄 것이 없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생명수를 퍼 올리는 표주박이고 싶다.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그 어느 것도 이에 견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나는 지금 성급해 하거나 조급하게 그 날이 오길 소망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모든 일은 수고로움의 끝에 비로소 봉오리를 맺고 개화하기 마련이어서다. 그러니 기다리는 날들이 조금은 지루하여 나를 안타깝게 한다한들 그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런 소망이 이루어지는 날.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가슴에 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고자 한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과도 같이 쉼 없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길 나는 원한다. 언제나 유순하고 조금은 손해 보는 일이 있다 해도 이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고자 한다. 그리하여 누구에게나 관대하고 다른 이의 어려움을 나의 일이듯 더불어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고자 한다. 그러나 어디 이런 일이 쉬운 일이랴.
수필은 나의 고백이다. 수필은 나의 참회록이다. 수필은 원고지 15매짜리 내 인생의 축도요, 고백소다. 그러므로 나는 수필이라는 텃밭에서 내 삶의 애환을 있는 그대로 소박하고도 진솔하게 그려내고자 애쓴다.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주어진 삶을 살아왔는가를, 또한 삶의 무게 때문에 내가 짊어진 세속적 욕망에서 저지른 나의 잘못을 하나하나 고백하고자 한다. 그때 나의 독백은 우리 모두의 독백이며 참회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나의 위로요, 피난처이며 내 삶의 안락한 휴식처이다. 또 나의 기쁨과 슬픔의 마당이기도 하다. 기쁠 때 수필은 나에게 있으며, 세상사는 일에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역겨운 현실이 나에게 있어 수필의 현장이 되곤 한다. 신문 사회면에도 소개되지 아니한 뜨거운 이웃의 사랑에 감격하고 살맛 날 때에 나의 붓끝이 이루는 춤사위는 어우러지게 된다. 그런가 하면, 광란하는 무대에서 난무하는 무희들의 펼치는 바람이나 억장이 무너지는 비통한 현실이,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는 인면수심의 뉴스가 '세상에 이럴 수가...'를 연발하는 민초들의 분노가 화면 가득할 때, 그때 나에겐 수필이라는 피난처가 있다. 그런 때에 적어도 수필은 나의 흥분된 마음을 조금이라도 위로해 줄 것이다. 또 때로 나는 그 속에 은인자중한다.
어쩌면 나의 수필은 훌륭한 수필과는 먼 거리에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완숙한 문장이 아니어서다. 그러나 좋은 글은 좋은 인품과 사상 그리고 인생관을 지녀야 한다는 점만은 늘 염두에 두고 있다. 비록 내가 훌륭한 인품을 지닌 사람이 아니어도 그런 사람이길 소망하면서 속되지 않고 다정한 글이야말로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독가자에게 잠시라도 여유 있는 시간을 갖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글일수록 고상하지는 못하나 그렇다고 속되지도 않아 은은한 향기가 독자에게 전달될 것이다. 그래 나의 수필이 다정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읽는 이에게 그리움을 전해주는 글이길 바란다. 또 내가 사랑하는 님의 창가에 추억의 등불이 켜지고 수수한 열정이 샘솟게 한다면 내 여기서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글을 쓰는 일이 반드시 독자를 염두에 둘 수만은 없는 일이겠다. 그러나 독자를 외면하고 쓴 글은 진정한 문학적 영역에서 이미 벗어난 글이 아닐까 싶다. 글이란 일단 원고지에 옮겨지면 그와 함께 내 것이 아닌 독자의 몫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독자의 가슴에 진한 감동으로 오래도록 남아 기억될 수만 있다면 글의 가치는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살아남게 마련이다. 이 또한 나의 바람이다.